▶ “중앙 눈치 보지마” 지역특성 반영·주민 뜻부터 살펴야“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아직도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지방화 시대 지방농정의 현 주소를 표현한 말이다. 95년 민선 지방자치가 실시된 지 8년이 흘렀다. 95년은 또 세계무역기구(WTO) 가 출범한, 세계화의 전환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민선 지방자치와 지방화는, 이러한 민주화와 세계화에 대응하는, 가장 유력한 대응방향이었다.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금언은 이를 표현한다. 이는 농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지방자치는 중앙중심의 농정을 지역중심의 자치농정, 특화농정으로 바꾸고 도·농간 균형발전을 이룰 일대 전환점으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민선자치 8년이 흐른 지금, 그런 기대는 좀처럼 충족되지 않고 있다. 아직도 중앙집중의 농정은 변하지 않고 있고, 지방자치단체와 지역기관·단체의 마인드도 미흡하다. 제도와 재정, 조직·인력, 주민참여도 따라주지 못하고 있다.그러나 희망은 있다. 지역농정 곳곳에서 변화의 몸부림이 일어나고, 부분적으로 모범적인 성과를 거둔 곳이 많아지고 있다. 민선자치 8년을 맞아 지방농정의 현 주소와 당면과제, 발전방향을 점검한다. ■ 왜 지방 농정인가정부수립 이후 우리나라의 농정은 국가가 주도해 왔다. 그것은 농업의 발전단계가 낙후된 상태에서 재정은 물론 농업개발을 위한 인적자원과 관리능력이 취약한 지방정부가 국민의 생존과 경제발전에 필요한 기초식량을 생산하고 농민을 지원하는 정책을 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런 중앙집중식 농정의 결과 한국 농업은 쌀의 자급을 달성하고 농업생산성과 공급능력을 크게 높여 왔다. 그러나 95년의 세계무역기구(WTO) 출범과 민선지방자치 시대의 도래라는 대내외적 변화는 중앙농정 중심의 농정체계를 지방중심으로, 증산중심의 농업을 환경 및 품질·소비자 위주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 중앙집중식의 획일적인 농정은 지역의 필요와 다양성을 바탕으로 하는 지역농정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95년 이후 지방농정은 지금까지처럼 중앙농정의 보조적 집행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탈피하게 된다. 지방자치의 정신에 따라 지역농민의 복리증진을 위해 자치적으로 지역농업·농촌개발을 추진해야 하는 의무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는 이를 제도적·예산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지방자치는 주민에 선출된 단체장들에게 과거처럼 중앙의 눈치를 살피기보다는 지역주민의 여론에 귀를 기울이고, 농정도 지역농민 의사와 지역실정에 적합한 방향으로 펼쳐 내게 한다는 게 가장 큰 의미다.” 농협 조사부장을 지낸 농업전문가 출신 고현석 전남 곡성군수의 설명이다. 고 군수는 지방농정은 중앙농정시책의 집행도 중요하지만, 지방농정이 예산부족을 이유로 중앙정부의 자금지원이 있는 사업에만 머무른다면 지방자치단체의 의미는 실종된다고 믿는다. 그는 농민들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조장하는 ‘조장농정’을 강조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방농정에서 지역농업개발은 지역이 지니고 있는 농업자원과 지역특화 작목 및 특화된 농업기술을 이용해 농민들이 원하는 소득을 달성토록 지원하는 일이다. 반면 지역농촌개발은 지방자치단체 권역에 거주하는 농촌주민, 즉 농민의 복지향상을 위해 소득증대와 함께 주택, 도로, 각종 생활편익시설의 설치와 농업기반정비 및 농민들의 교육과 문화의 창달을 도모하는 사무이다.지방농정의 대표적인 케이스는 지역브랜드 지원, 지자체 자체 직접지불제, 각종 농어촌기금 지원, 지역특화사업, 명품육성사업, 친환경 농산물 지원, 새농어촌건설운동 등 소득지원 사업이 제시된다. 그리고 지방의회와의 협력·각종 포럼 등 주민참여 장치의 개선도 빼 놓을 수 없다. 시·도 광역자치단체나 시·군 기초자치단체들의 농정을 들여다보면 이런 메뉴가 최소 한 두개 없는 곳이 거의 없을 정도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이제 지역특화농정을 찾아 내기 위해 머리를 짜내야 하는 형편이다. 이렇게 남들이 다 하는 것을 가지고는 경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 무엇이 문제인가그러나 민선자치 8년 동안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중앙중심의 농정이라는 본질적인 문제점은 의연하게 지속되고 있다. 정부는 지난 94년 농어민과 지자체의 창의와 자율, 상향식 농정체계를 표방하는 ‘농림수산사업통합실시요령’(현 농림사업시행지침)을 만들어 공공사업과 자율사업을 분리하고 있지만 아직도 지방농정은 중앙농정의 통제를 받고 있고, 그것의 축소판에 불과하다는 평가다. 사실상 이 지침에 따른 사업이 대부분이고, 결국 지자체들의 농림사업중 자체사업 비율은 10%에도 못미치고 있다. 또 각종 예산과 재정부족, 중앙중심의 예산배정 체계가 지방농정이 지역특성화사업을 하고 싶어도 어렵게 만드는 구조다. 특히 중앙정부가 만든 농림사업시행지침상의 사업들은 지방정부의 재정을 상당부분 요구하고 있어 지자체 부담이 크고, 지자체가 독자적으로 만든 특화사업은 지자체가 알아서 재원을 마련해야 하는 실정이다. 이같은 중앙중심 체계는 농촌지역인 군단위의 재정자립도가 평균 19.1%에 불과한 상황에서 지방정부가 중앙사업에 의존하게 하는 주 요인이다. 여기에 지방농정의 농정기획 및 평가기능 미비, 단체장 및 지방농정담당자의 마인드 부족, 농정관련 조직과 인력의 분산 및 부족, 지방의회와 지자체간 협력체계의 불비 등도 큰 문제로 지적된다. 특히 95년 민선자치 이후 각 지자체들은 지역실정에 맞춘다는 이유로 조직개편을 했지만, 결과는 농정조직의 축소로 나타났다. 전국 8개도 가운데 경북도만 제외하고는 모두 국단위와 과단위 농정조직을 통폐합, 농정조직이 크게 축소된 것이다. 예컨대 강원도는 농정국과 산림국이 합쳐지고, 제주도는 산업경제국과 감귤특작국이 통합됐다. 각도 농정국에는 농정계가 있고, 시·군에도 농정기획계가 있기는 하지만 명칭은 있을 뿐, 각과별 업무를 취합하고 보고자료를 만드는 수준인 경우도 많다. 97년 농촌지도소가 시·군의 부서로 통합되거나 군 직속기관인 농업기술센터가 되고, 농촌진흥원은 도의 산하조직인 농업기술원이 됐지만, 농정기능과 지도기능은 애매하게 따로 가고 있다. 자율사업 대상자를 선정·심의하는 농정심의회 역시 전문지식이 없는 지역기관장 위주로 위원을 선정해 심의가 형식적으로 이뤄지며, 그저 형식적인 통과의례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지역의 주요 농정관련 조직인 농업기반공사, 농협, 농업기술센터, 지역농민단체와의 협력부재도 농정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농협은 정책사업 융자부분에만, 농업기반공사는 생산기반과 직불사업의 과정에만 참여할 뿐 농정기획단계의 참여 등 제도적으로 지자체와 유기적인 협력은 없다. 이런 여건에서 농민의 참여에 의해, 농민이 만족하는 지역특화사업의 육성은 먼 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어떻게 바꿀 것인가전문가들은 지방농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은 자치단체장의 역할과 농민참여라고 입을 모은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이규천 부연구위원은 “자치단체장이 지방농정에서 절대적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치단체장을 농정마인드가 있는 사람으로 뽑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따라서 농민들이 자치단체장을 잘 뽑고, 그들이 농정에 관심과 투자를 아끼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농정심의회 등 각종 심의·협의기구에 농민대표를 많이 포함시키고, 주민 옴부즈만이나 주민투표, 주민청구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지방의회 전문위원 증원, 의정자문기구 및 농림관련 상임위 설치로 지방의정 활동을 활성화하고 지자체 집행부를 견제하는 것도 제시된다. 다음으로는 농정추진체계상 중앙의 권한을 지방으로 대폭 이양하고 지방의 농정기획과 평가기능을 강화하라는 얘기다. 지방을 중앙사업의 집행기관으로 묶어 둘게 아니라 중앙은 방향만 제시하고 예산, 인력, 사업의 중심을 모두 지방으로 이관해 지역의 자율성과 책임성을 제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보조금법, 지방양여금법과 세제를 개편해 지방이 자율로 쓸 수 있는 포괄적인 재정의 범위를 넓혀야 함은 물론이다.
이상길leesg@agri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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