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도는 간데없고….” 지난해까지만 해도 포도밭이었던 이곳은 올 봄에 복숭아나무로 대체됐다. 포도 주산지인 영동을 중심으로 전국의 주요 포도 산지는 올해 이런 밭이 크게 늘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라는 일제강점기 민족 저항시인인 이육사 시인의 대표작 ‘청포도’를 봐도 알 수 있듯 포도는 예로부터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과일이었다. 그런 우리 포도가 100년 전 우리 땅을 제국주의자들에게 내줬듯 수입산 포도 등에 밀려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포도가 익어가야 할 7월, 산지에선 버려진 포도밭이 널려 있거나 복숭아, 자두 등 특정 과수 품목으로 재배가 전환돼 향후 이들 국산 과일에도 파장이 우려되고 있다. 포도의 위기가 국산 과일까지 흔들어놓고 있는 양상인 것이다. 이에 한국농어민신문은 ‘위기의 포도 산업, 흔들리는 국산 과일’이란 주제로 산지 상황 점검에서부터 관련 토론회까지 3회에 걸쳐 포도 산업을 중심으로 국산 과일의 현주소와 나아갈 방향을 집중 모색해본다.

“소비도 없고 시세도 안나오고” 2년째 FTA 폐업지원금 신청 잇따라
“폐업지원은 일시적 처방…농가가 재배현장 떠나지 않게 해야” 목청
판로 못찾은 포도즙 가공공장은 운영 중단…“농가 포도주 제조 허용을”

#폐원 늘어나는 포도 산지


“저기 보이는 나무가 전부 올 봄에 심은 1년생 복숭아나무입니다. 작년엔 포도밭이었는데….”

충북 영동에서 30년간 포도 농사를 짓고 있는 오용은 한국포도회 영동지회장은 “작년에 영동지역에서만 8%의 포도 농가가 폐원 신청을 했다. 영동 지역에 4000여 농가가 포도를 재배했으니 한 해만에 수백여 농가가 포도 농사를 포기한 것”이라고 전했다.

20일 찾은 영동 포도 산지는 많이 변해 있었다. 풀이 자라 지난해까지 이곳이 포도밭이었는지 의심이 갈만한 곳도 많았고 복숭아, 자두 등 타 과일 품목과 콩, 고추 등의 밭작물이 심어진 밭도 자주 목격됐다.

이는 2년째 이어지고 있는 FTA 폐업지원금의 여파다. 가뜩이나 수입산 포도에 밀려 국산 포도에 대한 소비가 이뤄지지 않고 시세도 받쳐주지 못하다보니 폐원 신청한 포도 농가가 부지기수로 늘어난 것이다. 특히 이들 농가 중 다수가 복숭아와 자두 등 특정 품목으로 작목을 전환했다.

오용은 회장은 “차라리 아무 것도 심지 않고 풀밭으로 놔둔 곳은 그나마 낫다. 2000년대 후반엔 복숭아에 대한 폐업지원금 지원이 이뤄져 당시 복숭아에서 포도 등으로 작목을 전환한 농가들이 많았는데 그들 중 이번엔 포도 폐업지원금을 받고 다시 복숭아로 갈아타려 하고 있다”며 “5년 후 복숭아가 재배 면적이 증가해 시세가 폭락하면 포도로 또 한 번 갈아타지 말라는 법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는 포도를 넘어 복숭아 등 국산 과일 산업 자체를 무너트리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렇다고 줄어드는 규모만큼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올해 포도 작황이 좋아 품위가 높은데다 재배 면적은 줄어들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센터의 5~7월 포도 관측에선 ‘포도 생육 상황이 매우 양호하다’고 계속 게재돼 있다. 올해 포도 생산량은 전년보다 6% 감소한다고도 했다.

그러나 공급과 수요 법칙과 달리 품위가 좋고 생산량이 줄어든 올해 포도 시세는 고전하고 있다. 가락시장에서 평년 기준 캠벨얼리 2kg 상품 평균 도매가격은 9497원, 지난해 7월엔 8028원이었다. 그런데 올 7월엔 20일 현재까지의 7월 평균 도매가격이 7754원에 그치고 있다. 포도 폐업자금지원은 사실상 실패작으로 기울고 있다.

오용은 회장은 “폐업지원금을 지원해주는 것은 아무리 잘해봐야 일시적인 처방책밖에 되지 않는다”며 “차라리 그 자금을 직불제 등으로 활용해 농가들이 포도 재배 현장을 떠나지 않고 좀 더 나은 포도 생산 기반을 만들어 수입산과 경쟁해 우위를 점하도록 해야 한다. 포도 현장에서 떠나라고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경북 상주에서 포도 농사를 짓고 있는 황의창 한국포도회장은 “2004년 포도 주산국인 칠레와의 FTA 체결 이후 12년 동안 수입 포도가 대한민국 시장을 잠식해 국내 포도 산업을 무너트리고 결국엔 타 국산 과일 산업까지 연쇄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할 동안 우리는 대체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며 “이제라도 정부에서부터 유통업계, 농가 등 모두가 머리를 맞대 예로부터 우리의 중요한 과일 품목이었던 대한민국 포도를 지켜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멈춰버린 포도 가공공장

▲ “거미줄만 늘어져있고….” 포도 가공공장 중 현재 문을 닫은 곳도 적지 않다. 경북 상주의 한 포도 가공공장도 운영이 중단된 채 수 년째 방치되고 있다.


지난 13일 상주 모동면에 위치한 한 건물 안엔 적막한 기운만이 맴돌았다. 오후 2시를 넘긴 한낮이었지만, 불빛이 필요해 보일 정도였다. 전기 시설이 끊긴 실내에는 건물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 사이로 기계 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곳곳에 휘감겨진 거미줄이 흉물스러운 분위기를 더했다.

기계 설비에는 백화산 고랭지 포도를 사용한다는 문구가 쓰인 ‘백화 포도즙’ 포장재가 걸려 있었다. 작동을 멈춘 지는 꽤 됐다. 출입구 근처 벽에 걸린 달력일자는 2006년 10월. 10년이 다 되도록 방치되고 있는 셈. 실내 바닥에는 먼지와 잡동사니들이 한데 얽혀 있었고, 빛이 바랜 포장상자가 눌린 채 한 쪽에 쌓여져 있었다. 퀴퀴한 냄새도 코를 자극했다. 이 공장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 공장은 모동면 일대의 포도 농가들이 만든 ‘백화명산영농조합법인’이 상주시의 지원에 힘입어 1999년 문을 연 포도 가공공장이다. 열과(과피가 터지면서 과실이 갈라지는 현상) 등을 처리하고, 가공을 거쳐 저장성과 부가가치를 모두 높이겠다는 목표 아래 8년여 동안 운영됐지만 결국 2006년 문을 닫았다. 현재 공장 운영을 포기한 상태로, 향후 재가동할 계획도 갖고 있지 않다. 

공장 운영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물었다. ‘고랭지 포도’라는 특성과 지자체의 지원, 확실한 목표의식, 생산 현장의 높은 호응 등이 뒷받침됐기에 충분한 성과를 낼 수 있었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공장 설립에 적극 나서 설립 이후 공장을 운영했던 황의창 현 한국포도회장은 “당시 농가들이 열과 20㎏ 상자에 3000원을 받고 업체에 처분했는데, 가공공장에서 6000원을 받고 처리해 줘서 농가 호응이 좋았다”며 “1년에 최대 200톤까지 포도즙을 생산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공공장 운영은 순탄치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채산성 악화라는 굴레 안으로 빠져들었다.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포도즙을 판매할 곳을 구할 수 없었고, 포도즙 수요도 생각만큼 많지 않았던 부분이 컸다. 끝내 수익을 내는 구조를 구축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황 회장은 “가공 처리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이를 판매할 곳을 확보하는 것이 어려운 문제”라며 “광고 및 홍보 역량이 부족하고 다른 지역에 판매점을 두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포도즙 판매가 힘들 수밖에 없었다. 홈쇼핑에서도 몇 차례 방송했는데 비용 부담이 컸고 포도즙 수요도 많지 않아 가공 제품이 나중에는 짐이 됐다”고 전했다. 판로 마련이 힘들어지니 공장 가동률도 떨어졌다. 이와 무관하게 공장 관리 및 운영에 드는 비용으로 고정적으로 발생했다.

그는 “포도 가공 분야를 활성화하려면 생산 농가들이 포도주를 담글 수 있도록 현행 관련 제도 등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며 “외국의 경우처럼 열과가 나면 바로 담글 수 있도록 해 중간 유통 업체나 가공 업체에 팔 수 있도록 하면 가공 활성화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 여름 소비지에선 수입산 포도 행사

제철 피해 들어오던 수입 포도
이제는 버젓이 여름에도 판매
대형마트 중심 홍보전에 분통


포도 생산 및 가공 기반이 위태로운 산지의 심각한 실태와 달리 한 여름 속 소비지에선 대형 유통업체를 중심으로 수입산 포도를 홍보하는 행사가 진행되는 등 웃지 못 할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무더위 속 생산 현장의 한숨이 더욱 깊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본격적인 휴가철을 목전에 둔 일요일이었던 지난 17일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선 여름철에 잘 볼 수 없는 행사가 열렸다. ‘칠레산 적포도’ 판촉행사가 진행된 것이다. 고온 건조한 분지에서 한정 생산된 고당도의 포도를 알린다는 취지였다. 이 행사는 다음날 주요 언론의 경제면에 실렸다.

이를 지켜본 포도 농가들은 아연실색했다. 국산 포도가 본격적으로 출하를 진행해야 할 여름철에 수입포도 행사를 여는 일이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포도 농가는 “솔직히 겨울이나 봄에 수입 포도 행사를 하는 것도 탐탁지 않지만 그래도 백번 양보해 우리 것이 제철이 아니니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국산 포도가 제철인 시기에 수입 포도 행사를 할 수 있느냐”며 “더군다나 이 업체는 국산을 강조하는 프로젝트도 자주 진행하는 곳이라 실망감을 넘어 분노감마저 들었다”고 답답함을 피력했다.

이렇듯 수입 초기에는 겨울과 봄철 위주로 시장에 들어왔던 수입 포도가 이제는 포도, 복숭아, 사과 등 국산 과일이 나오는 여름철 이후 시기에도 시장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고, 유통업체 과일 매대의 메인 품목으로 등장하는 곳도 많다.

포도 유통업계 관계자들은 수입 포도의 경우 칠레와 페루산 포도의 무관세 마지막 달인 4월 대거 물량을 들여와 여름철 내내 시장에 내놓는다고 밝힌다. 이렇게 되더라도 저장 비용이 많이 들지 않아 충분히 저장비를 충당하고도 남을 수익 구조가 된다는 것이다.

수입 포도의 공세는 앞으로 더욱 강력해 질 것으로 보인다. 2014년 칠레산 신선포도의 계절관세가 무관세로, 지난해와 올해에도 페루와 미국산 포도가 각각 계절관세가 무관세로 전환됐기 때문이다.

특히 건조산 포도와 가공 포도 등 포도 2차 수입 품목의 공세도 거셀 것으로 보인다. 건조산 포도의 경우 칠레산과 미국산이 2014년부터 연중 무관세로 들어오게 됐고, 페루산도 2020년부터는 연중 무관세로 전환된다. 포도주스도 현재 칠레산과 미국산이 무관세로 들어오고 있고, 페루산 포도 주스도 2020년엔 무관세로 돌아선다.

이제 수입 포도는 단순히 우리 과일이 많이 나오지 않는 시기를 넘어 연중 국산 과일과의 경쟁 구도를 형성하며 국산 과일 시장을 위협하고 있다.

김경욱·고성진 기자 kimkw@agri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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