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훈 한국과학기술정책연구원 연구위원
[한국농어민신문]
자급률과 별개로 ‘자주율 제고’에 도움
기후위기 속 농업환경 대응력 강화 가능
단순 퍼주기 아닌 ‘생존전략’으로 인식을
농업 부문에 대한 전 세계 공적개발원조(ODA) 규모는 약 173억 달러(한화로 약 23.6조원)로 전체 원조의 약 7.7%를 차지한다. 한국도 국제사회 일원으로서 2010년 OECD DAC(공적개발원조위원회)에 가입한 이래 꾸준히 원조를 확대해 왔다. 원조를 받던 국가에서 원조를 하는 국가, 한강의 기적 등 표현이 장년층 이상 우리 국민에게 너무 익숙하듯, 한국은 고도경제성장에 힘입어 인도주의에 입각한 공적개발원조에도 진심을 다해 왔다. 한편, 전체 원조 중 농업 부문의 비중, 즉 농업 부문 원조의 집중도 측면에서 한국이 전 세계 1위인 점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비록 규모 자체는 아직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이지만, 농업을 중심으로 한 원조에는 다른 국가보다 진심인 셈이다. 한국 농업의 성공적 발전경로와 높아진 농업과학기술 수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한국은 농업 부문 공적개발원조에 진심이고, 또 진심이어야 하는가? 정직한 야만의 시대로 표현되듯이 타국(남)은 어찌되던 자국(나)의 이익이 강하게 우선시 되는 각자도생의 국제정세가 도래하고, 당장의 농정현안들이 산재하여 내 코가 석자인 상황인데 말이다. 인도주의, 글로벌 식량안보, 국격 제고 등 원론적 차원의 명분만으로는 그 진심에 온전히 공감받기 어려운 시대이다. 만약 농업 부문 공적개발원조가 OECD DAC 회원국으로서 단순 의무이행 내지 대가 없는 퍼주기가 아니라 한국에도 중장기적으로 이익이 되는 투자행위라면 어떨까? 원조와 투자를 동일시하는 것이 상당히 난센스 같지만, 대다수 국가들의 공적개발원조는 그런 셈법과 무관하지 않다. 일례로 수원국을 글로벌 무역경제에 동참시키는데 목적을 둔 ‘무역을 위한 원조(AfT; Aid for Trade)’가 공적개발원조의 새로운 방향으로 부상하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실리주의에 입각한 원조가 비난받던 때도 있었지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원조라야 그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K-농업(농업과학기술) 공적개발원조가 한국 농업의 미래발전과 확장에 중장기적으로 이익이 됨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선 주목할 이익은 新시장개척이다. 좁은 국토와 낮은 식량(곡물)자급률의 한계를 가진 한국 농업은 더 이상 국토 안에서만 생존하기 쉽지 않다. 섬나라 국가지만 대륙농업을 꿈꾸는 일본은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에 대규모 농업 원조를 수행하고 있다. 국내 생산력을 의미하는 자급률과는 별개로 국외 확보력(협상력)을 의미하는 자주율을 높이려는 목적이 깔려있다. 물론 원조 과정에서 자국의 종자, 비료, 농약, 농기자재, 농기계 등 농산업의 해외진출도 도모한다.
한국도 타공여국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의 중점협력국가를 중심으로 농업 부문 원조를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최근에는 K-라이스벨트, K-스마트팜, K-디지털농업 등과 같은 전략적 원조 브랜드도 구축중이다. 이로써 수원국의 농업생산력 증대에 기여함은 물론, 아직은 미약하지만 우리 종자, 비료, 농기자재 등 농산업의 해외진출 초석도 다지고 있다. 수출의 기본전제 중 하나는 잦은 노출(또는 접촉)이다. 잦은 노출은 인지도 향상, 신뢰 형성, 현지 협업을 유도하여 新시장개척의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시장점유율이 낮거나 수출 후발주자라면 더욱 그런 노출이 필요하고, 공적개발원조는 자연스러운 수단이 된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한국 농업, 농산업의 외연 확대에 있어 농업 부문 원조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유용한 해법이 될 수 있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하고, 또한 무엇보다 근원적인 이익은 한국 농업과학기술의 기후변화 대응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한국 농업의 발전역사는 농업과학기술의 진보역사이다. 그러나 사계절이 뚜렷한 온대기후에 맞춰진 지금의 농업과학기술이 앞으로도 농업의 발전을 뒷받침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미 아열대 내지 열대작물의 도입 및 재배가 확산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기후변화에 따른 한국 농업과학기술의 전환대응은 시급한 과제이다. 연구개발(R&D) 단계의 농업과학기술이 농업현장에 안착되기까지 짧게는 3~5년, 길게는 10년 안팎의 긴 검증시간이 필요하다. 지금부터 적극 서둘러도 이르지 않다. 다만 성큼 다가오고 있는 기후위기를 나라 안에서 논의하고 해법을 준비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런 맥락에서 농업 부문 공적개발원조는 아열대, 열대의 기후 및 자연조건, 작물, 병해충 등 우리에게 낯선 농업환경을 직접 경험하면서 한국 농업과학기술의 사전적 기후변화 대응력을 강화하는 중요한 수단임이 분명하다. 한국은 농촌진흥청 산하 KOPIA센터와 같은 현지거점(2025년 현재, 20개 수원국)을 운영하고 있다. 농업연구직, 농촌지도직, 민간전문가, 청년층 등을 직접 파견하여 농업과학기술 기반의 공적개발원조, 국제기술협력(해외농업기술개발)을 수행한다. 이는 수원국은 물론 한국 농업과학기술 및 농업의 기후변화 대응력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는 훌륭한 현지무대이자 국제자산이다. 많지 않은 예산으로 나라 밖에서 한국 농업의 해법을 찾는데 기여하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라 해도 무방하다.
요컨대 K-농업(농업과학기술) 기반의 공적개발원조는 단순히 퍼주기가 아니라, 한국 농업의 생존전략으로 이해하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좁은 국토, 낮은 자급률, 빠른 기후변화 등 극심한 제약상황에 직면하여, 농업의 문제든 농산업의 문제든 간에 나라 안팎에서 균형있게 해법을 탐구해야 한다. K-농업(농업과학기술) 공적개발원조는 나라 밖에서 해법을 찾는 우리의 생존전략이란 점에 공감하고, 긴 호흡 속에서 지속적인 관심과 응원을 보내야 할 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