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식물을 건강하게 잘 길러내는 사람을 ‘초록 손가락(green fingers)을 가진 사람’이라 부른다.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보면 마법사 같다.

ㅣ 김예슬(서와)/청년농부·경남 합천

식물을 건강하게 잘 길러내는 사람을 ‘초록 손가락(green fingers)을 가진 사람’이라 부른다.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보면 마법사 같다.

마을 할머니에게 “고추는 언제 심어요?”라고 물으면, “입하(21년 5월 5일)가 지나고 나면 서리 내리는 일이 없으니까. 이제는 뭣이든 다 심어도 괜찮어”라고 하신다. 무엇이든 다 심어도 되는 5월은 농부들이 쉴 틈 없는 철이다. 얼마나 바빴으면 지나가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는 말을 할까. 그런데 우리 집에 찾아오는 고양이들은 자꾸 밭두둑을 파헤쳐 놓고 간다. 지난겨울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었더니 식구들을 데리고 와 거의 우리 집에 살다시피 지내고 있다. 날마다 밭에 앉아 고양이들에게 으름장을 놓는 게 일이다. “네 손 빌려달라고 안 할 테니 밭두둑 파헤치지 마. 여기 레디쉬 심어놨단 말이야. 자꾸 이러면 너희들 밥 안 준다!”하고 말이다.

비가 오기 전날, 그동안 키워 오던 모종들을 ‘아주 심기’를 했다. 서로 맛을 좋게 해준다는 바질과 토마토를 함께 심고, 땅에 질소를 고정해 주는 땅콩을 텃밭 곳곳에 심었다. 고추와 토마토, 브로콜리 곁에는 향으로 진딧물이 덜 오게 막아주는 캐모마일과 차이브 같은 꽃이나 허브를 심어 주었다. 또 위로 자라는 옥수수와 아래로 자라는 호박을 한 두둑에 심었다. 호박 넝쿨이 땅을 덮어서 수분을 잘 지켜 주고, 풀도 덜 자라게 해줄 것이다.

함께 심어서 도움이 되는 것도 있지만, 서로 거리 두기가 필요한 작물도 있다. 옥수수와 토마토는 비슷한 영양소를 먹고 자라기 때문에 서로 다른 두둑에 심어 주는 것이 좋다. 그리고 고추와 다른 종 고추, 호박과 다른 종 호박은 가까이 심으면 쉽게 씨앗이 섞인다. 되도록 멀리 떨어뜨려 심어야 한다. 네 가지 호박 모종과 세 가지 고추 모종을 따로 심으려고 신중하게 밭 지도를 그렸다. 농부들은 봄이 오면 어디에 무엇을 심을지 계획하며 밭 지도를 그린다.

밭 지도를 보며 모종을 하나하나 심어 나갔다. 모종을 심고 왕겨와 톱밥으로 두둑을 덮는 일까지 하다 보니 모종을 다 심지 못했다. 비가 지나가면 촉촉한 땅에 남은 모종을 심어 주어야겠다.

토마토와 가지, 고추는 따뜻한 날씨에 크는 작물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하우스가 없다 보니 알맞은 온도를 맞추어주기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해마다 조금 작은 모종을 밭에 옮겨 심었다. 그 작은 모종이 밭에서 쑥 자라나는 걸 볼 때마다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올해는 유난히 모종이 크게 자랐다. 줄기도 굵고 튼튼해 보였다. 내가 모종을 돌보는 능력이 좋아진 걸까? 물론 경험치가 쌓이면서 해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지난해 모종과 견주어보면 잘 자라도 너무 잘 자랐다. ‘잘 자랐는데 뭐가 문제야?’하겠지만, 기분이 좋을 수만은 없었다. 유난히 더웠던 봄 날씨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올해는 봄 날씨 같지 않게 뜨거운 날이 많았다. 밭에서 일하다 보면 숨이 턱턱 막힐 만큼 말이다. 잘 자란 모종을 보면서 마냥 뿌듯해 할 수 없다니…. 마음이 씁쓸했다.

식물을 건강하게 잘 길러내는 사람을 ‘초록 손가락(green fingers)을 가진 사람’이라 부른다.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보면 마법사 같다. 시들시들 꼭 죽을 것만 같았던 식물을 다시 살려내니 말이다. 기후 위기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 초록 손가락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다. 작물과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푸른 땅을 가꾸어 가는 사람들이 말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숲밭’을 공부하고 있다. ‘먹거리 숲’이라고도 한다. 숲밭은 지속 가능한 순환 고리를 가진 숲처럼 밭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작물과 나무, 꽃과 허브를 함께 심어 자연이 가진 힘으로 먹거리를 생산한다. 자연이 일하는 만큼 농부는 일을 덜 하게 된다. 무엇보다 자연이 일하는 밭이니 지구를 건강하게 하는 방향으로 일구어진다. 땅이 살아나면 그 땅을 밟고 사는 사람들의 삶에도 이로운 영향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숲밭은 미기후를 만들어 기후 위기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숲밭을 배우며 들은 말 가운데 “숲밭은 백 년 뒤 모습을 떠올리며 디자인해야 합니다”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오늘 내가 심은 나무가 백 년 뒤에 어떻게 자리를 잡고 자랄지 상상하며 밭 지도를 그려야 하는 것이다. 한 해, 한 해 그리는 밭 지도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몇 십 년 뒤, 내가 죽고 없을 세상에 남아 계속 숨 쉬어갈 생명을 심는다는 건 정말이지 엄청난 일이다. 우리가 언제까지 지구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오늘 하루라도 안전하게 숨 쉴 수 있길 바랄 뿐이다. 다양한 생명이 어울려 자라는 숲밭이 그 바람을 이루어 갈 방법이 되어주겠다는 생각이 든다.

유난히 더운 봄 날씨로 몸과 마음이 지칠 때,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니. 내 안에서 “만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직은 배워야 할 것이 더 많은 농부지만 초록 손가락을 가진 사람이 되어가길 꿈꾼다. 초록 손가락으로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마법을 부릴 수 있기를!

저작권자 © 한국농어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