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산관련단체협의회와 농축산연합회는 10월 말부터 이달 10일까지 총 5차례에 걸쳐 기자회견을 열고 한미 FTA에 대한 농업 분야의 피해를 우려하며 한미 FTA 폐기를 촉구했다.

10일 오전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을 위한 첫 번째 공론화 자리로 마련된 공청회가 농축산 단체들의 거센 반발 속에 결국 무산됐다. 매년 7조원 가까운 농축산부문의 무역적자에도 불구하고, 공청회장에서 발표된 ‘한·미FTA 개정에 따른 경제적 타당성 검토’ 자료에서 농업 분야의 피해 품목에 관한 경제적 타당성 검토가 전혀 들어있지 않다는 점을 농축산 단체가 문제 삼고 항의를 벌인 것이다. 결국 의견 수렴 시간인 ‘패널 토론’과 ‘질의 응답’이 진행되지 않은 채 공청회가 끝이 났고, 중단된 2시간여 동안 농가들은 정부를 향해 불만과 섭섭함을 성토했다. 왜 농가들이 공청회 단상 앞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을까. 

부실한 발표 자료 '논란'
PPT 10페이지 분량 뿐인 자료
원론적 수준 언급에 그쳐
농업계 토론 패널도 단 1명

농축산단체 요구사항은
2007년 농축산물 희생 '과오'
이번에 바로잡아 자급률 제고
협상대상서 제외 정부 힘써야

농축산부문 무역적자 '눈덩이'
5년간 적자폭 20% 커지고
전반적 수입물량도 증가세
ASG 발동도 '사실상 불가능'


▲부실한 경제적 타당성 분석에 분노=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한에 발맞춰 한·미FTA 개정 협상 절차가 갑작스레 속도를 높이자 이번 공청회에선 한·미FTA 개정 협상에 따른 농업 분야 등 민감 품목의 추가 개방 시나리오가 공개될 것이란 추측이 쏟아지면서 농업계의 긴장감이 높았다.

하지만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공개한 ‘한·미FTA 개정의 경제적 타당성 검토’ 내용엔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는 농업 분야는 언급조차 돼 있지 않았다. 한·미FTA 개정에 따른 거시경제적 효과가 원론적 수준에서 언급되는 데 그쳤다.

발표 자료 역시 부실하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목차와 제목을 뺀 발표 자료는 PPT 기준으로 10페이지 정도의 분량에 불과했고, 이 중 ‘한·미 경제관계 및 성과’가 6페이지, ‘한·미FTA 개정의 영향’이 4페이지로 각각 요약해 실렸을 뿐이다. ‘한·미FTA 개정의 영향’ 중 경제적 타당성 분석을 위한 모형 설명 등에 2페이지를 할애했다고 보면, 실제 경제적 타당성과 관련된 내용은 발표 자료로 2페이지밖에 되지 않았다.

김영귀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지역무역협력팀장은 발표를 통해 “한·미FTA 개정의 거시경제적 효과는 실질 GDP는 0.0004~0.0007% 추가 증가, 소비자 후생은 0.12~0.24억달러 증가할 것이다. 다만 잔여관세 품목이 제한적이고, 관세율 수준도 높지 않아 효과는 제한적”이라고 밝혔다.

공청회 개최에 앞서 기자회견을 마치고 장내에 들어와 있던 농민단체 관계자들이 고성을 높이며 항의를 한 시점이 이때부터였다. 이승호 한국낙농육우협회 회장은 “한·미FTA로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농업 분야에 대한 경제적 타당성 검토조차 담겨 있지 않는 보고서를 내놓고, 5년 전 한·미FTA 협상을 벌였을 때처럼 의견 수렴이라는 형식만 갖추는 ‘묻지마 공청회’가 또다시 재현돼선 안 된다”며 “농업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서 농업 분야의 민감 품목에 대한 경제적 타당성 분석을 제대로 해야 한 뒤에 한·미 FTA 재협상을 위한 공청회를 진행해도 늦지 않다”고 주장했다.

공청회 토론 패널 중 농업계와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는 전문가가 1명(한석호 농촌경제연구원 모형정책지원실장)에 불과한 점도 농민단체들은 문제를 삼았다.

김홍길 전국한우협회 회장은 “토론 패널 8명 중 농업 분야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이들이 적어도 2~3명은 포함돼야 하지 않겠냐”며 “피해 분야인 농업 품목에 대한 분석도 없고, 패널까지 농업계 목소리를 담아낼 수 없는 이들이 농민들의 어려운 여건을 알 수 있겠냐 의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를 향한 섭섭함과 불만 성토도=공청회가 중단된 2시간 가까이 농축산 단체들이 내뱉은 호소는 절절했다. 여기에는 한·미FTA 발효 5년여가 지나는 동안 농축산업 여건이 위기에 처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뚜렷한 대책조차 내놓지 못하는 정부의 농정에 대한 불신이 자리했다. 정부가 농업 분야의 추가 개방은 검토하지 않겠다는 공식 입장을 내놓았지만, 농업계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축산관련단체협의회와 농축산연합회 등은 이날까지 포함해 10월 말부터 총 5번에 걸친 기자회견을 열어 한·미FTA의 개정 협상에 대한 우려를 여실히 쏟아냈다. 단체들은 “한·미FTA의 희생은 한번으로 족하다”며 “이번 재협상을 통해 지난 2007년도와 같이 농축산업을 철저히 희생시킨 과오를 이번 기회에 바로 잡아 농축산물의 자급률을 한·미FTA 협상 이전으로 유지하고, 국민의 대표적 먹거리인 한우, 낙농 등 농축산업이 농촌을 유지할 수 있도록 계기가 돼야 한다”고 거듭 촉구해왔다.

문정진 축산관련단체협의회장은 이날 공청회장에서 “한·미FTA 발효 5년 6개월 동안 축산업은 반토막이 됐다. 20만 한우 농가는 8만호로 줄었고, 수입 유제품의 범람으로 자급률은 50%대로 떨어져 위기에 놓여 있는 만큼 한·미FTA 재협상 이전에 한·미FTA 발표 5년에 대한 평가가 먼저 내려져야 하는 것이 순리”라고 강조했다.

이승호 회장도 “한·미FTA 체결에 따른 정부의 피해 대책이 계획대로 잘 이뤄져 왔다면 농가들이 이 자리에 또 오지 않았을 것이다. 무역이득공유제, 피해보전 직불제 현실화, 수입 축산물 검역 강화 등이 지난 5년 동안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농협 농업통상위원회 조합장들도 이날 한·미FTA 개정 협상에서 농업 부문을 제외해달라는 요구를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농업 부문은 이미 한·미FTA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는 만큼 이번 개정협상에서 절대로 추가 개방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정부는 농업 부문이 이번 개정협상 대상에 포함되지 않도록 협상력을 최대한 발휘해 줄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한편 의견 수렴 과정이 진행되지 않은 채 공청회가 끝이 나면서 이 부분을 둘러싼 논란도 예상된다. 더구나 농업 분야의 의견을 적극 수렴하는 방안이 마련되지 않을 경우 농축산 단체들이 단체 행동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어 향후 정부의 후속 노력이 요구된다.

▲더 개방하려고 해도 할 게 없다=한·미FTA 이후 전반적으로 농축산 부문의 무역적자는 상승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축산관련단체협의회가 분석한 데 따르면 한·미FTA가 발효되기 전 5년간(2007~2011년) 평균 농축산 부문 무역적자는 51억7900만달러 가량이던 것이 발효 후 5년(2012~2016년)간 평균 62억3300만달러의 적자를 보이면서 20% 넘게 적자폭을 키웠다.

특히 주목할 점은 수입액은 쇠고기와 닭고기 등의 수입 여부와 곡물류 수입 감소에 따라 등락을 보인 반면 전반적으로 수입 물량은 늘어나는 추세를 보임으로써 관세율 인하에 따른 가격경쟁력 제고가 심화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실제 미국산 주요 농축산물에 매겨지는 관세는 다른 주요 수입국에 비해 이미 낮은 상황이다. 냉동·냉장쇠고기 등의 관세는 호주(29.3%)와 뉴질랜드(32%)에 비해 낮은 24%로 내년에는 21.3%로 떨어진다. 특히 냉동되지고기는 지난해, 냉동삼겹살은 2015년에 관세가 폐지됐으며, 냉장삼겹살도 9%로 관세가 떨어졌다. 닭고기도 8~10%대로 EU에 비해 낮다.

이와 함께 오렌지는 3~8월 수입분이 내년도 0%관세로 전환되며, 신선포도는 올해부터 0% 관세가 적용됐다. 체리는 FTA 발효와 함께 즉시 철폐됐다. 이와 함께 저율관세할당(TRQ) 품목은 10~15년차에 무제한으로 전환되거나, 6년차부터 3%씩 복리로 물량을 늘리는 것으로 협상이 이뤄졌다. 사실상 제한이 없는 상황이나 마찬가지다.

농산물특별세이프가드도 있으나 마나한 상황이다. 지난해를 기준으로 쇠고기의 ASG물량은 29만4000톤, 돼지고기는 1만415톤이었지만 실제 수입된 물량은 각각 15만6078톤·3237톤으로 ASG 기준이 너무 높게 설정돼 있으며, 양파와 마늘·고추를 비롯해 사과·생강·참깨·인삼 등도 ASG 발동 물량 설정이 너무 높아 발동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에 대해 농축산 단체 관계자들은 공통적으로 “농축산물 시장을 너무 많이 개방을 해 놓은 상황이어서 정부도 추가개방을 하는 것 자체가 어려울 것”이라면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미FTA를 두고 ‘불공정하다’고 말하는데, 농축산 부문의 협정 내용이야말로 불공정한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고성진·이진우 기자 kosj@agri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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