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운동가 이경해 열사 14주기 추모식

▲ 지난 11일 한국농업연수원에서 열린 이경해 열사 14주기 추모식에서 김지식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회장과 임원진이 헌화를 하고 있다.
▲ 추모객들이 도농 어울림 걷기대회 참가 및 이경해 열사 묘소 참배를 위해 출발선을 나서고 있다.

한·미 FTA 개정 협상이 추진되고 있다. 자칫 쌀과 쇠고기의 빗장까지 풀어줘야 할 판이다.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나 RCEP(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과 같은 거대 FTA도 진행 중이다. 그나마 남은 농산물 시장의 한켠마저 내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크다. 시장개방이란 물결은 이렇게 우리나라 농업의 설 자리를 조금씩 좁혀왔고, 더욱더 좁혀가고 있다. 이경해 열사가 2003년 9월 11일 멕시코 칸쿤에서 외친 ‘WTO Kills FARMERS!’(WTO가 농민들을 죽인다)가 가슴에 와닿는 지금. ‘몸은 먼저 가지만 정신만은 지켜볼 것이다’는 그의 마지막 유언처럼, 오직 농업·농촌·농민만을 위해 자신을 바쳤지만 여전히 우리 곁에 숨쉬고 있는 이경해 열사의 ‘정신’을 ‘농민운동가 이경해 열사 14주기 추모식’에서 되새겨봤다.

ㆍ일시:2017년 9월 11일 
ㆍ장소:한국농업연수원 
ㆍ주최: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ㆍ주관:한농연전북도연합회·한농연장수군연합회


#현장스케치
유가족 등 350여명 추모
묘역까지 도농어울림 걷기대회
열사 흔적 담긴 사진전도 열려


2017년 9월 11일. 이경해 열사의 운구가 우리나라에 도착했던 2003년 9월 18일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궂은 날씨에도 ‘농민운동가 이경해 열사 14주기 추모식’이 열린 한국농업연수원 대강당 앞은 추모식 시작 1시간 전인 오후 12시부터부터 전국에서 모인 농업계 관계자들로 붐볐다. 강당 입구에는 멕시코 칸쿤에서 ‘WTO가 농민을 다 죽인다’는 피켓을 목에 걸고 있는 이경해 열사 사진부터 서울농장에서 소를 키우고 있는 사진, 인천공항에서 서울아산병원으로 운구차량이 이동하는 사진, 서울올림픽공원 내 평화의문 광장에서 진행한 영결식 사진, 이경해 열사 1주기 추모식 사진 등 이경해 열사의 흔적이 담긴 30여점의 사진들이 전시됐고, 농업계 관계자들은 사진을 천천히 훑어보며 나름의 방식으로 이경해 열사를 가슴에 담았다.

오후 1시에 추모공연이 시작됐고, 오후 1시 20분부터 40여분간 황민영 식생활교육국민네트워크 상임대표의 추모기념강연이 열렸다.

오후 2시. 김지식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장과 한영희 장수부군수, 유기홍 장수군의회의장, 이형권 농업경영인조합장협의회장, 이명자 한국여성농업인중앙연합회장 등을 비롯해 전국 한농연·한여농 회원 및 유가족 등 3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치구 한농연중앙연합회 대외협력부회장의 사회로 이경해 열사 14주기 추모식이 진행됐다.

“‘WTO가 농민들을 다 죽인다’며 WTO 협상에서 농업부분을 제외하라고 외치며 멀리 멕시코 칸쿤에서 산화하신 이경해 열사님의 14주기를 오늘 맞게 됐습니다.”

추모 묵념과 최흥림 한농연장수군연합회장의 약력보고, 김병일 한농연중앙연합회 수석부회장의 추도시(作 민족문학작가회 정도상) 낭송에 이어 유가족을 대표해 단상에 오른 이경해 열사의 둘째 딸 이고운 씨는 “하루는 아빠랑 식당을 간 적이 있는데, 아빠가 밥을 한공기 더 시켰고 왜 또 시키느냐고 물었더니 쌀 소비를 많이 해야 한다고 했다”며 “쌀 개방을 반대하면서 돌아가시니 ‘쌀을 하나라도 소비하려고 애쓰셨구나’란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이 씨는 “타국에서 왜 이경해란 사람이 돌아가셨는지 그 의미를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김지식 회장은 “요즘에 유례없는 쌀값 폭락, 우선지급금 환수상태, 농수산물 특수성을 반영하지 못한 김영란법, 최저임금 상승으로 인한 농가경영악화 등 농업·농촌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며 우리 모두는 힘들어하고 있다”며 “열사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만 한다면 이경해 열사가 추구한 진정한 농민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또, 김 회장은 “농업과 농민만을 걱정했던 열사의 생각, 농업개방에 맞서 싸웠던 그 의지, 피흘리며 목숨까지 바쳤던 열사의 그 신조, 열사의 이야기가 아직 지워지지 않은 모든 한농연 회원의 가슴 깊은 곳에 살아있기를 기원한다”고 밝혔다.

성태근 한농연전북도연합회장은 “내 몸은 부서지든 말든 오로지 반평생을 농업과 농촌, 농민을 위해 온 몸 불사른 열사의 숭고한 뜻을 깊이 새기고 앞으로 나아가겠다”며 “농업경영인 동지들은 열사의 그 높은 뜻을 계승해 21세기 행복한 농촌, 농업인들이 살맛나는 농촌을 기필코 이루고야 말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영희 부군수는 “안타깝게도 농민들이 처한 현실은 여전히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래도 이경해 열사의 정신을 본받아 농민들을 위한 가치있는 정책으로 발전해 나가리라 믿는다”고 말했고, 유기홍 의장도 “경사진 땅을 일궈 파란 언덕을 만들었듯이 피폐화돼 가는 농촌에 활기찬 새순이 돋도록 참된 희생으로 농촌을 살려보겠다는 이경해 열사의 정신을 우리는 가슴속 깊이 간직해야 할 것”이라고 외쳤다. 

이길영 한농연전북도연합회 제2대 회장은 “한농연이 이 나라의 농업·농촌이 바로 세워질 수 있도록 자성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이경해 열사의 추모식에서 고인에게 고인의 뜻을 다 못 다 이룬 것을 우리가 하겠노라고 다짐하는 계기가 돼 줬으면 좋겠다”며 “한농연이 이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돼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경해 열사의 활동과 이경해 열사 서거 후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은 농민단체들의 투쟁이 녹아있는 영상을 시청한 후 헌화와 분향을 마친 300여명의 참석자들은 ‘2017년 도농어울림걷기대회’를 겸해 한국농업연수원 강당 앞에서 출발, 이경해 열사 묘역까지 걸었고, 오후 4시, 묘역 참배를 마지막으로 ‘이경해 열사 14주기 추모식’의 문을 닫았다. 이경해 열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모인 이들을 위한 하늘의 배려였을까. 하루종일 비 예보가 있던 이날, 참배를 앞두고 잠시 비가 그쳤다.
 

▲ 이경해 열사 14주기 추모식은 농업계 관계자와 한농연·한여농 회원, 유가족 등 3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히 진행됐다.


#추모기념강연/황민영 식생활교육국민네트워크 상임대표 
“화이부동…한농연 깃발 아래 농업계 같이 가야”

조합원에 협동조합 돌려줘야
국민농업헌장 실행 앞장서길
농어업회의소 법제화도 시급

황민영 식생활국민네크워크 상임대표가 추모기념강연에서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가 ‘협동조합’이다. “우리나라와 같은 소농을 중심으로 한 농가경영시스템에서는 자조·자립·자강이란 협동조합적 힘이 없으면 안된다”라는 황 대표의 발언에서 보듯, ‘협동조합’의 미래가 곧 농(農)의 앞날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황 대표는 “협동조합은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농민이 더 이상 희생당하지 않기 위해 결국 작은 사람들끼리 힘을 모아 살아남으려는 최후의 수단”이라며 “1987년에 민주화가 됐으면 형식만 민주화가 될 게 아니라 협동조합도 농민인 조합원에게 돌려주는 민주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황 대표는 “청와대가 1994년에 농어촌발전대책으로 협동조합 개혁의 모범답안을 마련했는데, 신경분리하고, 면단위 조합을 통폐합하고, 신용사업을 협동조합 금융사업으로 개편하는 등을 이 때 만든 것”이라며 “이번 정부에서도 협동조합에 대한 다양한 문안이 있는 만큼 하나하나 챙겨서 달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움직임을 두고 황 대표는 “다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한농연을 위한 것이고, 이경해 열사가 실행하려고 했던 것들”이라고도 덧붙였다. 

특히 황 대표는 ‘국민농업헌장’을 강조하기도 했다. 국민농업헌장이 국민과 함께 하는 농업으로 가는 잣대가 될 수 있다는 게 황 대표의 생각이다. 황 대표는 “박진도 교수(지역재단 이사장)가 ‘농민이 행복해야 국민이 행복하다’라고 했던 것처럼 농업은 이제 ‘국민이 농업을 어떻게 대우하고, 농민을 어떻게 배려할 것이냐’에 따라서 달라져야 한다”며 “이런 측면에서 2006년 농특위 당시 식생활교육지원법을 만들었고, 2008년에 국민농업포럼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황 대표는 “농민단체들이 바빠 함께 하기 힘든데다, 국민농업포럼만으로 국민농업을 실현하기 어렵더라”며 “그래서 만든 것이 국민농업헌장”이라고 밝혔다. 그는 “한농연 등 농민단체가 중심이 돼 만든 국민농업헌장대로 실행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국민농업헌장은 2015년 농업인의 날(11월 11일)에 선포, ‘대한민국 국민인 우리는 모든 영역에서 다양한 단체·개인들 간의 연대와 협력을 통해 국민 모두가 주체가 돼 건강한 먹거리 체계 구축과 지속가능한 농업·농촌을 만들어 갈 것을 다짐한다’면서 교육·문화·복지·환경·노동·경제 등 6개 분야에서 실천해야 할 임무를 제시하고 있다.

황 대표는 ‘남과 사이좋게 지내기는 하나 무턱대고 어울리지는 아니한다’는 의미의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언급했다. 다름을 인정하면서 같은 길을 간다는 뜻인데, “우리의 회장이자 황민영의 회장인 이경해 열사의 추모식을 맞이해 한농연의 깃발 아래 농업계가 같이 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꺼낸 마지막 화두가 ‘농어업회의소 법제화’였다. 황 대표는 “최근 정부가 농민단체 요구를 받아들여서 농어업회의소법을 만들려고 하는데, 관변단체가 또 하나 생긴다고 하면서 반대를 하고 있다”며 “관변단체를 탈피하려면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서 새로운 농민조직을 꾸려 나가야 되고, 그 시점이 지금이라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황 대표는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면서 농어업회의소 법제화를 추진해 줄 것을 촉구했다. 

조영규·안형준 기자 choyk@agrinet.co.kr


이/모/저/모

“사진 속 열사의 모습 생생한데…” 
○…이번 추모식에는 이경해 열사를 기억하기 위한 사진 전시회도 함께 열려 추모객들의 관심이 집중. 사진 전시회에서 사진을 유심히 살펴보던 박노창 대전광역시유성구연합회장은 자신이 찍힌 사진 앞에 서서 한참을 관람. 해당 사진은 이경해 열사 서거 2년 뒤인 2005년에 ‘WTO 홍콩 각료회의 저지 한농연 투쟁단 출정식’의 모습. 박노창 회장은 “사진 속 나를 포함한 동지들 모두 젊은 모습인데, 지금은 머리가 희끗해지고 세상을 뜬 동지들도 있다”면서 “사진으로나마 함께한 동지들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고 다들 보고 싶다”라고 발언.

농업 위해 의기투합했던 그때로
○…추모기념강연과 추모사를 통해 추모식 내빈들이 이경해 열사와의 인연을 소개해 눈길. 황민영 식생활교육국민네트워크 상임대표는 “80년대에 이경해 열사가 FFK(Future Famers of Korea) 회장을 맡고 있을 때 용산에서 만났고, 이 때부터 인연을 맺었다”고 밝혔고, 김지식 한농연중앙회장은 “한농연 지방자치위원회가 있었는데, 이경해 선배께서 위원장을 맡았고, 저에게 사무국장이란 직책을 주면서 인연이 시작됐다”고 전언. 또, 이길영 한농연전북도연합회 제2대 회장은 “1981년 농어민후계자가 탄생되면서 같이 머리를 맞대고 이 나라 농업을 함께 고민했다”고 회상.
 

#이경해 열사 약력
1947년 전북 장수 출생
1974년 서울농업대학교(현 서울시립대학교) 졸업·서울농장 설립
1982년 농업계학부출신 100명 영농후계자 선정
1987년 전북농어민후계자협의회 초대 회장
1988년 FAO ‘올해의 농부상’ 수상
1989년 전국농어민후계자협의회 제2대 회장
1990년 한국농어민신문사 초대회장·스위스 제네바 UR반대 할복 기도
1991년 전라북도 도의원(제4대·5대·6대)
1992년 민주당 제14대 대통령선거대책중앙위원
1995년 전라북도의회 산업경제위원장
1996년 새정치국민회의 농어촌특별위원회 부위원장
2001년 스위스 제네바 WTO본부 앞 1인 단식농성
2003년 9월 11일 제5차 WTO 각료회의 개최지 멕시코 칸쿤에서 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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