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림축산식품부가 주최하고 한국농어민신문과 농협중앙회가 공동으로 주관한 ‘제1회 여성농업인 수기공모전’이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농촌 별별 이야기를 들려주세요’란 제목으로 진행된 이번 공모전에는 전국 각지에서 총 80편의 작품이 접수됐고, 수필가 반숙자, 김수자 씨 등을 포함한 총 4명의 심사위원이 약 2달간의 심사를 거쳐 최종 13편의 수상작을 선정했다. 대상 1편과 우수상 2편을 소개한다. 
      

이음전/경북 문경

봄 햇살에 장독대가 유독 반짝이고 눈부시다. 황사와 송홧가루 날리는 봄날에 장독대 닦는 행주질은 나의 몸을 씻는 일보다 개운하다. 파리나 해충의 침입을 막는 아귀가 꼭 맞는 유리 뚜껑 틈새로 잘 익은 된장 냄새가 폴폴 새어 나와 진동한다. 맛있는 된장이 가득가득 담긴 독의 종·횡대 나래비는 얌전하고 정직한 새색시가 어른 앞에서 정숙하게 고개 숙인 모습이다.

독을 들여놓던 날, 독쟁이 장인은 인부들을 대동하고 줄자까지 준비해 와서 차에서 내리는 족족 하나같이 간격과 줄을 맞추어 세웠다. 고뇌어린 자신의 작품을 가장 안정적이고 단정하게 진열해서 보다 멋진 풍경으로 보이도록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면서 판매가 푸져서 튼튼한 업체로 성장되기를 소망하며 풀던 구수한 덕담도 잊히지 않는다. 봄날이면 장독대 곁에 수줍은 듯 핀 복사꽃까지 어우러져 우리 집 뒤뜰은 한 폭의 그림과도 견줄만하다. 더욱이 반그늘은 된장 익는 속도를 마침맞게 조절할 수 있어서 꽃을 볼 수 있는 외에 일석 몇 조의 효과를 누린다고 할까. 장독대에 함박눈이 쌓인 풍경은 또 어떤가? 목 짧아서 더 단단해 보이는 눈사람들이 나와 우리 집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느껴진다. 사진을 찍어두고 된장을 소개할 기회가 생기면 어김없이 그 걸 찾아 전송하기를 몇 번인지.

동경했지만 준비한 기간 매우 길고 제반이 벅찼다. 능력 밖의 일이라 생각해서 깊이 우울한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우여곡절을 경험하며 이루어 냈으니까 반질반질 윤기 나는 장독대와 꽃나무가 나란히 줄 선 전경, 바라볼 때마다 자식을 보듯 흐뭇하고 든든한 마음이 여간 아니다.

신혼여행 후 마주한 살림살이
농촌과 시댁은 삭막·서글펐다
선택의 여지조차도 없었기에 
농사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결혼은 곧 행복이라고 줄긋기 하던 어리석음을 오지게 경험하는 일은 빨리 찾아왔다. 힘든 나의 앞날을 예고라도 하듯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후 마주한 시댁의 남루한 살림살이는 여기저기에서 눈에 띄었다. 어떤 환경이든 빠르게 적응하리라고 호언장담했지만 그것은 터무니없는 젊은 날의 치기였다. 아니, 농사와 농촌에서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를 인지하지 못한 내 무지의 탓이다. 이십대 중반, 그때 비친 농촌과 시댁은 삭막하고 서글펐다. 그러나 농사 외에는 선택의 여지조차 없었기에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신혼 시절은 고사하고 땅을 빌리고 씨를 뿌리는데 바빴다. 복합영농이라 하여 처음부터 이농사 저농사 작물을 가리지 않았지만 흡족하게 소득을 얻었던 기억은 드물다. 기존의 고추가 폭락을 거듭해서 다시 유망작목이라고 판단해 배추를 선택한 후 대풍을 이뤘는데도 시세는 하락이었다. 소의 마리수를 불려서 이득을 보려는 찰나에 소파동과 정면으로 만나기도 했다. 가축이며 농사 운이 지지리도 없는 몇 년이 훌쩍 지나면서 나의 정신세계는 고운 새댁을 뛰어넘어 산전수전 다 겪어낸 중년이 된 듯했다. 일꾼들을 거느리고 삼복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봉두난발 험한 일하던 엄마의 삶을 백분의 일도 닮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설상가상 몸까지 허약한 내 처지는 어쩌면 엄마 이상으로 불행하다는 부질없는 생각도 무수히 했다. 해마다 대풍이 들어도 투자비와 땅 도지를 제하면 남는 게 없는데 하품에 딸꾹질이라더니 연속적으로 흉년이 든 적도 빈번했다. 한 점 빛조차 허용되지 않는 블랙홀에 우리 가족이 갇힌 형국이었다. 매사에 드리운 나의 빈곤은 참아낼 수 있지만 어린 아들에게까지 긴축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일은 괴로웠다. 청춘 시절의 고생이 디딤돌이 되기도 하지만 상처 또한 그때의 것이 크게 회상 속에 등장하곤 했다. 하지만 잠시 의기소침했을 뿐, 절망하지는 않았다. 나는 정서적으로 농촌 아낙으로서 시나브로 여러 면에 깊이 스며들었고 이듬해 봄이 되면 어김없이 파종하고 싹을 틔워냈으니까.

더 오르지는 않을까 기대하며 
창고에 쌓아둔 콩 재고로 분류
헐값으로 넘긴 기억 너무 아파
된장을 담가야겠다고 결심 굳혀 


주력 작물로 우리는 특히 콩 재배 면적을 늘려 나갔다. 콩은 무농약으로도 충분히 재배할 수 있을 뿐더러 전량 농협 수매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추수할 때까지 생산비가 적게 드는 것도 이점이라는 계산을 했다. 특히 내가 사는 곳은 면단위 콩 수확 전국 제1의 지역이어서 한 뼘의 땅이라도 빈 곳이면 콩을 심는 주위의 분위기에 편승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피와 땀으로 영근 곡식이 혹여 더 오르지는 않을까 기대하며 창고에 쌓아두다가 재고로 분류되어 결국 상인에게 헐값으로 넘기는 기억이 너무 아팠었다. 수매하거나 차라리 오래 묵히면 묵힐수록 맛이 뛰어난 된장을 넉넉하게 담가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 이유 한 가지가 되었다.

우리 집에 놀러온 친구들이 된장찌개를 맛본 후 사업을 해보라며 부추긴 시기도 그때였다. 농사만 짓던 내게 사업이라니. 그 순간은 생경하고 놀라워서 헛웃음만 웃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맛의 칭찬에 인사치레로 그냥 던진 말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차츰 전환되었다. 오랜 시간 단순 노동에만 길들여진 내가 현금과 직결된 일을, 그것도 똑똑한 도시의 젊은 주부들을 상대로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 없지 않았다. 그러나 휴! 한숨 한 번 내쉰 후 용기를 내보기로 어느덧 작정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디서건 후덕한 인심과 진실한 맛 앞에는 통하리라는 믿음이 마음속에 자리했기 때문일까? 솔깃해지기는 그즈음 나는 신천지 인터넷 세상을 이미 만나고 있기도 해서였다.

수많은 주부들이 집결한 사이트에서 그들과 소통하며 친구가 되어 있다는 사실도 얼른 된장을 담아서 비축해야겠다는 결심을 실현하는데 한몫 했다. 당장 소득과 연결하는 엄두는 내지 못했지만 자신에게 필요치 않은 물건을 목록으로 만들고 그 걸 소용하는 사람과 물물교환 했다. 전에 없이 그런 일로 소소한 재미를 느끼던 중이었다. 이를테면 “사놓고 사용하지 않는 중간 크기의 커피포트를 백태 5kg과 무조건 교환할 분 연락 기다립니다.”라는 글을 올리면 득달같이 콩이 필요한 사람의 댓글이 달려서 거래가 성사되는 식이었다. 아들과 협력해서 꾸민 나의 카페에 일부러 들러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곳은 회원이 백여 명에 불과했다. 이왕이면 나드는 회원 수십만인 활발한 사이트로 찾아가는 공격적 판매를 줄곧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개인 카페의 회원 수에는 개의치 않았다. 사이트의 성격을 잘 이해하고 운영의 규칙을 반드시 지키면서 적은 벌이라도 해보려는 욕심이 새록새록 생겼다.

된장을 담그는데 독의 확보는 큰 문제였다. 새 독은 가격대가 엄청나서 구매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미루고만 있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하는 법인지, 집집마다 사용하지 않는 옛날 독 몇 개쯤은 소유하고 있다는데 착안하고 남편의 힘을 빌려서 모으는데 힘썼다. 엄마가 쓰시던 것과 시어머니께 물려받은 것까지 합하니 삼 십여 개나 되었다. 그리고 그 독에다 나는 매년 수매에 앞서 메주부터 끓이고 된장을 채웠다. 수매보다 메주를 만들었을 때 생기는 부가가치나 2차 가공 된장까지 담갔을 때의 이익을 비교하고 계산해 보는 눈이 저절로 뜨였다.

친구들의 응원과 가족의 격려에 힘입어서 숙성시킨 3년산 된장만을 판매하는 날이 드디어 왔다. 3년이 한편으로는 짧다고도 느끼지만 나는 기다리는 동안 매우 지루했다. 얕은 밑천에 회전되지 않고 돈이 사장된다는 생각으로 초조했다. 하지만 맛이 깊어야 된장 생명이 오래간다는 걸 알고 있으므로 정한 원칙을 스스로 깨고 싶지 않았다. 숙성 덜된 된장 판매는 그래서 서두르지 않고 없는 양 인내심을 발휘해 묵혔다.

카메라를 구입해서 배우고 가장 맛있어 보이는 된장을 어떤 각도에서 찍을까를 고민했다. 첫 광고 문안을 작성하던 순간의 떨림이나 문장들을 나는 아직도 잊지 않는다. 세상이 잠든 고요한 새벽에 정좌한 후 컴퓨터를 켜고 된장의 이력 등을 몇 번이나 수정하면서 깔끔하게 쓰려고 애썼다. 연습했던 대로 잘 표현되었다싶은 된장 사진 몇 컷도 함께 올렸다. 과한 광고에 기대했다가 실망한 주부들 마음도 장터에 오랫동안 서성이면서 헤아리게 되었고 그러기에 평소 이성적으로 군더더기 없어야한다고 생각했었다. 음식 맛에 대한 미사여구 남발은 어리석은 판매자라 여겼으므로 평소의 소신대로 실천했다. 승부의 첫 번째 조건으로 맛 위에다 진실 한 가지 더 얹어야한다는 생각만으로 내 마음은 꽉 차 있었으므로.

아침상을 물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켠 컴퓨터에는 내게 배달된 쪽지가 스무 건도 넘었는데 눈을 의심했지만 실제였다. 단순한 문의도 간혹 있었지만 대개 주소와 이름 전화번호를 내게 조건 없이 보내는 주문내역 쪽지였다. 얼굴을 서로 대면한 적도 없으면서 먹거리를 단 번에 주문한 것은 보태지 않고 표현한 광고 문구나 실제 사진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믿고 소중한 돈을 선뜻 입금해주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로도 좋은 품질의 콩으로 담근 맛난 된장을 생산할 수밖에 없었다.

고객들이 쓴 후기를 찾아 읽는 마음이 진정 두려웠는데 그 걱정 역시 기우였다. 글로 쓸 수 있는 최대의 찬사를 받으며 나는 물물 교환에서 전업 판매자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담근 양보다 주문양이 능가하니 지속적으로 된장이 달렸다. 서둘러서 규모를 확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좋은 품질의 콩 생산도 생산이려니와 더불어 된장 양을 늘려 직거래판매에 총력을 다 하고 싶었다. 아무리 농사를 잘 지은들 헐값으로 중간상인의 배만 불리는 악순환의 반복에서 한 해라도 빨리 헤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2008년 창조기업 비즈니스 센터 등록
버겁던 서류·프레젠테이션 넘어
꾸지뽕 된장 기술 임치증 등 획득
2010년 첫날 '이음전 식품' 창업  


2008년 우리 지역의 농촌지도소 내에는 창조기업 비즈니스 센터가 문을 열었다. 인근의 대학과 연계해서 교육도 한단다. 세무, 마케팅, 디자인, 특허나 온갖 자격증도 전문가들의 자문을 얻을 수 있다고 해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나는 등록을 마쳤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는 몇 군데의 사이트 안에서 소꿉놀이처럼 꾸러미를 판매한 주먹구구식이었다. 교육을 받으므로 규모를 갖춘 회사를 설립하고 나는 당당히 대표가 되는 것이었다. 생산하고 가공해서 판매까지 담당하는 것이 정부의 장려정책이라는데 진작부터 나는 그걸 시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문교육도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고나할까. 알엔디(기술개발) 소기업 창업자들이 성공에 이르는 비즈니스를 배울 수 있는 과정이라며 농업인들도 합류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주는 정책이라고 이해했다. 수년이 지난 지금에 부르짖게 된 슬로건 ‘6차 산업’을 십 여 년 전에 결과적으로 나는 실천했던 셈이다.

그러나 모든 서류 절차가 나이 든 내가 처리하기에는 너무나 벅찼다. 몸으로 하는 일이라면 겁낼 것도 없지만 서류를 완벽하게 메우는 일은 버겁기만 했다. 기억하기로 단번에 오케이 사인을 받은 적이 없다. 운전도 원활히 못하는 나는 남편을 대동하고 하루에도 40분 거리의 비즈니스 센터를 네 번이나 방문한 날도 있다. 생전 들어보지 못한 전문용어 투성이인 사업계획서 작성 과정은 그랬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사람들 앞에서 제대로 말 한 마디 못하는 숙맥이 프레젠테이션의 관문은 또 넘을 수 있을까? 그래서 각종 허가를 얻는데 도움이 될 지원금을 순조롭게 수령하게 될는지? 괜히 발을 들였다는 후회를 수십 수백 번도 더 하면서 의욕도 점차 사그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7월의 땡볕이 이글거리는 들판에서 극심한 더위와 맞서기도 다반사에 일 년 내내 일한 수입이 0원이던 시절의 고통에 비할까라며 자신을 달랬다. 어떤 일을 시작하다가 힘들고 번거롭다며 중도 포기하기엔 이제 나는 부끄러운 나이가 아닌가? 그만한 일로 손을 씻었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업계획서를 쓰듯이 학창시절 공부에 열심이었다면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교에도 거뜬히 합격했을 거라며 그 고충과 스트레스를 나는 젊은 예비창업자들에게 하소연한 적도 있다. 이미 하고 있는 것에 획기적인 몇 가지만 추가한 뒤 머리에서 술술 꺼내 문장으로 얽으면 되는 줄 믿었던 나는 세상물정에 어둡고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전문용어에다 한글이지만 한문을 알아야 이해가 되는 단어가 넘쳐났다. 내 능력으로는 턱도 없어서 점점 민망해지는 시점에 돈이 들지만 적정한 부분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했다. 왼손으로 냉큼 집어서 오른손으로 퍼즐을 끼워 맞추기만 하면 되는 이치처럼 전문가는 내가 쓰다만 사업계획서를 쉽고도 매끄럽게 완성해 주었다.

큰 산을 넘고 또 한고비라고 걱정하던 프레젠테이션도 어차피 내가 정면으로 부딪혀야 되는 일이었다. 꾸지뽕 된장에 관한 나의 의견과 구상을 담뿍 담은 사업계획서를 심사위원들이 들어서 이해하기 쉽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데 북극의 중앙에 서있는 듯 덜덜 떨기만 했다. 거울을 보고 날마다 발표를 잘하기 위해 연습했는데 정작 그날은 미흡하기 짝이 없었다. 지방 사람인 내가 선 발표장이 낯선 서울의 중소기업 본청이라는 사실 때문일까. 발음은 왜 자꾸 꼬였는지 모른다. 일반 된장과 차별화해서 꾸지뽕 우린 물을 된장 밑물로 사용하며 그래서 기존 된장보다 1~2프로 염도가 낮다는 말은 그 와중에도 강조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마치 죄지은 사람 같았으니.

심사위원들의 질문에 나의 답은 구체적이고 거침없어야 했는데 더듬거리고 말았다. 유도 질문에 휘말려 허둥대던 나의 모양새라니…. 공정 전체가 수작업이라 해놓고 불쑥 메주 성형기는 왜 언급했을까? 의연하지 못한 채 허둥대던 자신을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러워 숨고만 싶다. 하지만 모든 과정은 마무리되고 진인사대천명의 심정으로 결과를 기다려야만 했다.

선정자 발표일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새삼 된장이라는 아이템 자체가 보편적인데다 포화상태라 어렵겠다는 불길한 예측을 나는 왜 자꾸 하는지 모를 일이다. 누구나 접근이 쉬운 분야이기도 해서 귀농인이나 퇴직자들이 된장으로 승부를 거는 추세라는 말을 누군가에게 듣고부터였다. 그러나 천일염을 풀어 담그는 일반 된장과 차별화한 꾸지뽕 된장인 점에 혹 점수를 얻지는 않았을까? 이전 해의 간장에다 메주를 띄워 담그는 겹된장이라는 것에 심사위원들의 관심이 더 머물지는 않았을까?

선정자 발표가 있던 날, 노심초사하며 기다리던 경쾌한 문자 음이 들리고 명단에서 드디어 내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심사위원들이 성의 없게 던진 질문이나 귀찮아하는 표정이 거슬렸는데 나의 서툰 발표를 경청했던 게 분명하다. 열의는 불타오르는데 다만 긴장해서라고 소리치고 싶었는데 고맙게도 심사위원들은 나의 진심을 정확히 꿰뚫었나보다. 농사를 잘 짓는 일 만큼이나 사업계획서와 프레젠테이션의 과정이 힘겨웠는데 좋은 결과를 맞으니 그 모든 일이 잊어지면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작은 경험의 도화지라는 바탕에 이제부터는 예쁜 빛깔로 나만의 그림을 그리는 노력만 필요했다. 어떤 일도 그러하듯 알기 전에는 너무나 견고해서 손톱조차 들어가지 않았다. 터득한 후에는 쉽고 만만한 게 세상일 같다. 그토록 어려운 사업계획서도 어루만져본 경험이 있어서 창업 준비는 수월했다. 그밖에도 나만 담글 수 있는 고유의 꾸지뽕 된장에 관한 ‘기술 임치증’외에 별별 허가증을 소유할 수 있었고 특허도 획득했다. 꾸지뽕이라는 좋은 물질과 된장을 접목했으니 특허의 의미도 특별했다. 꾸지뽕은 고혈압과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당뇨 환자에게도 이로운 영향을 미친다니까 광고 문안을 작성할 때마다 동의보감 등을 인용해서 나는 이 내용을 빠뜨리지 않고 명기한다. 판매에도 분명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 뻔하다.

2010년 새해 첫날에 나의 이름자를 넣어 꾸지뽕 된장을 생산하는 ‘이음전 식품’을 새롭게 창업했다. 좀 더 현대적 감각의 세련된 상호를 생각했지만 사람이 먹어야하는 식품이기에 내 이름을 걸고 완벽하게 책임지고 싶었다. 고객들에 대한 가장 기본이 되는 나의 서비스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무척 촌스러운 이름이지만 된장과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용기를 냈는지 모르겠다. 늘 된장 양이 흡족하지 않았는데 지원금으로 독을 보충해서 해결할 수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본 장독 수백 수천 개를 보유한 큰 기업은 아니지만 내 능력만큼만 늘려서 소중히 가꿀 참이다.

꾸지뽕 된장의 존재를 알리는 일은 나의 일상이 되었다. 광고하는 길은 여러 갈래이고 너무도 빠르게 진화해서 당황되는 순간이 부지기수다. 하지만 거북이처럼 느리지만 쉼 없이 공부하려한다. 나의 된장을 찾는 단골 고객들은 내가 컴퓨터의 고급 기술이나  SNS따위가 익숙하지 않은 점 까지도 이해해 주어서 고맙기 이를 데 없다. 초창기에는 인터넷만 고집하던 판로였다면 지금은 그 길도 다양하다. 회원 수가 천여 명으로 늘어난 개인 카페는 물론 사람들이 붐비는 마트나 농산물 직판장, 식당 등으로도 나의 된장은 꾸준한 상승세로 애용된다. 디자인에도 특별히 신경 쓴 흔적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다른 업체의 된장과 같이 진열해도 귀여운 글자 형에 파격적 주황색은 멀리서도 눈에 띄니까 고객들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문적인 판매를 겸하지 못하고 생산에만 몰두했다면 우리 집 경제 사정은 지금쯤 어떨까? 일반적인 농가들처럼 빚이 살림 밑천이라는 말을 위안 삼으며 묵묵히 거친 노동만 하고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소액 저축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널뛰는 농산물 가격에 해마다 충격과 번민이 더해져 나는 자존감마저 바닥일지 모른다. 해도 해도 끝없는 농사에 지금까지 쫓기는 처지라면 중년의 낭만이나 여유는 누리지 못하며 살고 있지나 않을까, 망중한 가운데 나는 여러 가지 옛 생각이 떠올랐다.

이 시점에 내가 다시 새로운 한 가지를 꿈꿀 수 있다면 그 건 무엇인가? 오래전부터 나는 명인이 되고 싶었다. 된장을 맛있게 척척 잘 담그는 발효 음식의 꼭대기 지점은 명인이 서는 곳이라고 여겼다. 외국이나 국내의 식품박람회에 참관할 때마다 음식의 명인을 여럿 만났다. 자신이 만든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충천하고 고유의 이론을 정립해서 세상에 알리는 멋있는 명인!

칭호만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기분이다. 나는 꾸지뽕 된장에 관한 이로운 물질들을 구체적으로 규명하고자 지역 대학에 의뢰해서 이미 성분 조사를 마친 경험도 있다. 조상 대대로 먹어온 된장이기에 무심히 넘길 수 있는 부분을 꾸지뽕이라는 물질과 결합된 뒤에 더 맛이 좋고 약성까지 뛰어나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명인이 되는 길도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온갖 까다로운 수료과정을 거치더라도 극복할 마음의 자세도 되어 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맛있게 먹고 건강해지는 된장의 명인이 된다면 정말 좋겠다.

혹여나 풍파에 시달려서 나의 인성이 거칠고 뾰족하다면 된장이 진득하게 숙성하며 곰삭아가는 과정을 닮아보련다. 누구라도 포용할 수 있는 너른 품을 가진 사람으로 변모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언제부턴가 이웃들이 나를 누구의 엄마로 부르는 대신 사장님이라고 칭하면서 농담을 걸어온다. 평범한 농부의 아내에서 CEO가 되었다는 걸, 나의 주변이나 도처에서 실감하고 있다. 처음엔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민망하고 어색했지만 이제는 편안하게 느껴진다. 이웃들이 때로는 된장 담그는 내게 있어서 천군만마가 되어주기도 한다. 초심을 잃지 않고 더 큰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나의 이웃, 나의 고객에게 신뢰와 믿음으로 보답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된장을 사랑해 주는 고객들에게 최소한의 도리이자 먹거리를 만드는 CEO로서의 진정한 자부심이라는 걸, 뼛속까지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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