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안/충북 음성

2001년 겨울, 평범한 일상의 어느 날이었다. 방학 기간 집에 머물던 작은아이가 제 아비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엄마, 이게 무슨 말이지?”

거기에는 불길한 내용의 문자가 떠 있었다.

<지금 어디 가고 있나요? 목소리 듣고 싶어요>

핸드폰을 낚아채는 그의 얼굴에 노여운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무슨 내용인지 들어야 했다. 심상찮은 분위기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두 딸을 두고 우리는 집을 나섰다.

운전대를 잡은 그는 저무는 해를 향해 달리며 굳게 입을 다물었다. 차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한 시간을 넘게 달려 어느 운치 있는 카페 구석진 자리에 앉은 그가 입을 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말하는 그의 어조는 단호했다.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야, 인정해 줘.”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가. 한때의 바람이니 용서하라고 해도 감당하기 벅차거늘 사랑이라 하는가. 그의 음성이 웅웅거리며 내 머리 주위를 떠다녔다.

우리는 서로 자신의 입장에서만 이야기했다. 결론이 없자 그는 자리를 떴다. 날은 어둑어둑해지고 대중교통도 없는 낯선 곳에 나를 버려두고 가버린 것이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아산만 쪽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이 휘히힝- 짐승 소리를 내며 몰려왔다 가고 있었다. 그 바람 한가운데서 나는 그보다 더 매서운 바람의 실체를 온 감각으로 느끼며 예측할 수 없는 앞날이 두려워 떨고 있었다.

미래의 내 시간을 위해
일상이 달라졌다. 그는 드러내놓고 그 여자를 만나러 가고 다정다감한 어조로 통화했다. 방에 같이 있을 때 전화가 오면 거실로 나가고, 내가 거실에 있으면 방에서 통화했다. 나는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차라리 몰랐더라면 적어도 그는 쉬쉬하기라도 했을 것이다.

내가 두려운 것은 우리가 갈라서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믿는 그 사랑이라는 것이 끝날 때까지, 아니면 우리 가정이 부서질 때까지, 그 과정을 겪는 동안 내가 감내해야 할 정신적 고통이었다. 황폐해질 내 영혼이었다. 어떻게 해야 덜 망가지고 나의 삶을 잘 가꾸어 갈 수 있을까.

그렇게 막막한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이었다. 밤새 내린 함박눈이 아침이 되어도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한 인간이 그 어떤 절망에 빠져도 자연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제 할 일 다 하며 보기 드문 비경을 만들고 있었다. 하늘에서 아기 주먹만 한 눈송이가 끝도 없이 내려오는 광경에 이끌려 나는 밖으로 나갔다.

외딴집을 둘러싼 포도원에는 온통 은빛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그 어떤 어둠의 기운도 범접할 수 없을 절대 순결의 축제였다. 세상의 온갖 추악한 것은 감히 이 축제에 끼어들 수 없으리라. 나는 아무도 범하지 않은 눈길을 걸으며 그 축제 속으로 들어갔다. 방울이가 꼬리를 흔들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를 뿐, 이 세상 천지간에 나 홀로인 듯 사방은 적요했다. 은빛 고요 속으로 들자 내게 닥친 지독한 현실마저도 무감각해지며 나도 그 풍경의 일부가 되어갔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그의 말 이후 달라진 일상
진중한 친구처럼 말 없이
위로가 되어주던 포도나무


포도나무 가지가지마다 화려한 눈꽃이 나를 향해 손짓했다. 나무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잘 지나갈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18년 동안 나를 위로해 준 적이 어찌 이번뿐이랴. 노름에 빠진 그가 처자식만 남은 외딴집을 며칠씩 비울 때도, 전국의 온갖 골프장으로 들락거리며 운동한다고 부산을 떠는 그를 지켜봐야 할 때도, 그런 그를 고쳐 살아보겠다고 싸우느라 기진맥진했을 때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의 모든 희로애락을 묵묵히 지켜본 나무. 그때마다 진중한 친구처럼 말없이 위로가 되어주던 포도나무가 없었다면 나의 삶은 어쩌면 훨씬 피폐해졌을지도 모른다.

방울이가 제날을 만났다 싶은지 포도원을 지나 함박산 꼭대기를 향해 냅다 달렸다. 함박산은 높이가 해발 56m로 산이라기보다는 언덕 수준이다. 그럼에도 들이 넓은 평택시 고덕면에서는 어엿한 산 대접을 받았다. 방울이는 앞서 달리며 자취를 감추었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꼭대기로 나를 이끌었다. 길 없는 야산의 푹푹 빠지는 눈길은 걷기 힘들었지만, 반드시 올라야만 하는 사람처럼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위로 향했다.

산꼭대기에는 평평하고 푹신한 눈밭이 있었다. 거기에 벌렁 누워 하늘을 보았다. 그는 무슨 양심으로 자기가 하는 일을 비밀로 하라고 한 걸까. 나는 무엇이 두려워 그 말에 따르는 걸까. 그를 사랑해서일까. 아니면 두 딸이 걸려 차마 이혼은 할 수 없어서일까. 하지만 이렇게 비굴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과연 잘하는 걸까.

얼굴로 떨어지는 눈송이가 정신 좀 차리라고 했지만 나는 눈을 감았다. 아, 이대로 잠들 수만 있다면 고통도 끝나리라. 몸은 이미 산꼭대기의 거침없는 바람에 얼고 있었다. 얼마나 더 누워 있으면 편안해지는 걸까. 천방지축 뛰어다니던 방울이가 꼼짝 않는 주인 곁에서 낑낑대며 좌불안석이었다. 아주 잠들어버리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육신은 더 이상의 추위를 버텨내지 못해 와들와들 떨었다. 영화의 한 장면이라면 육신의 고통 따위는 없이 아름답고 품격 있게 잠들 수 있으리라. 그러나 정신적인 고통보다 육신의 고통이 더 힘든 나는 부스스 일어나 옷에 묻은 눈을 털었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5,000여 평 포도원 가운데 눈에 덮인 외딴집이 내 모습인 양 외로운 표정으로 동그마니 엎드려 있었다.

‘집으로 가리라. 집안이 훈훈하도록 보일러를 틀어 언 몸을 녹이리라. 집 구석구석 먼지를 털고 닦아 반짝거리게 하고, 된장찌개를 끓여 두 딸과 함께 맛있게 밥을 먹어야지. 너희가 하는 짓이 사랑인지 바람인지 어디 한 번 끝을 보고야 말리라.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가 웃으리라.’

나는 산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빛나는 나의 미래를 위해 지금의 고통에 정면으로 맞서기로 다짐하면서.
 

시간이 흐른 만큼 줄어든 아픔
영 제자리걸음인 것 같던 시간도 흘러 포도나무 전지 작업을 할 때가 되었다. 전지가 늦어지면 자른 부위가 아물기도 전에 수액이 올라온다. 그 물을 타고 지난 계절 열심히 저장한 수체(樹體)내의 양분도 함께 빠져나오고 만다. 그래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밖으로만 돌았다. 자식 돌보듯 키워온 나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아비가 몰라라 한다고 어미마저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가만있지 못하고 전지가위를 들고 밭으로 나갔다.

그는 가끔 일꾼을 사서 하라는 말을 하고는 했다. 그러나 포도 농사는 일꾼에게 너무 의지하면 망치기 십상이다. 일꾼은 시키는 작업만 하면 되지만 주인은 포도나무의 겉모습은 물론 속까지 꿰뚫어 보는 혜안이 있어야 한다. 그런 눈을 갖는데 지름길은 없다. 밥 먹고 숨 쉬고 잠을 자는 일상처럼 많은 시간 애정을 가지고 포도나무와 함께하면 절로 뜨게 되는 것이다. 일할 때도 가지의 굵기와 단단하기 등을 면밀히 살피고, 잎새의 크기나 두께, 색, 촉감 등을 눈여겨 보아가며 상황에 맞는 작업과 양·수분 관리를 해야 한다. 혹여 일하지 않는 날도 들며 나며 나무와 교감하다보면 나무가 무얼 원하는지 알게 되는 것이다.

포도밭에서 살다시피 하는 나를 보고 여자가 다 알아서 하니 남자가 밖으로 돈다고 사람들이 말했다. 이런 엉터리 말이 어디 있나. 여자가 알아서 하면 남자는 더 잘해야 하거늘, 그걸 핑계로 밖으로 도는 남자를 여자 탓으로 보다니.

그때 내가 밭에서 땀 흘린 것은 단지 노동만의 의미가 아니었다. 포도나무도 우리 집 경제만 짊어진 존재가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나무와 주인 이상의 의미였다. 우울해하는 내게 나무는 때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기쁨을 주었다. 다시는 뜨지 않을 것처럼 굳게 감고 있던 겨울눈을 틔우던 사월의 기적, 오월의 초록 축제, 불같은 땡볕 아래에서 성장도 멈추고 포도 익히기에 여념이 없는 나무의 모성…. 나무가 하는 그 모든 일에 함께하다 보면 내 가슴에 뜨거운 감정이 가득 차고는 했다.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제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나무, 나도 나무처럼 내 삶을 잘 가꾸어 간다면 훗날에는 웃을 수 있으리라. 다리에 맥이 쭉 빠진 상태에서도 그런 생각으로 포도밭에 들면 발걸음이 걸어지고 손을 움직여 나무를 돌볼 수 있었다. 일을 함으로써 나는 먹을 수 있었고 잠도 잘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포도는 품종별로 제 각각의 빛깔과 향기를 머금으며 완벽하게 익어갔다. 시간은 저들의 바람이 멈추는 그 날을 향해 쉼 없이 달려왔다는 뜻이었다. 포도나무는 내게 ‘아픔은 이미 그만큼 줄었노라’ 말하고 있었다.

포도밭 풍경
고즈넉하던 포도원이 포도를 먹으러 오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포도가 맛있다는 소문이 나서 굽이굽이 꼬부라진 길을 마다치 않고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이다. 18년 전 볼펜 자루 굵기의 어린나무를 심을 때와 비교하면 믿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18년 전에 우리는 남의 땅을 빌려 포도나무를 심었다. 포도 농사가 얼마나 까다롭고 힘 드는 농사인지 모르고 시작한 일이었다. 농사 기술도 없이 포도나무를 심었으니 3년생이 되어 수확할 때가 되었지만 수확할 포도가 별로 없었다. 그 뒤로도 몇 년간은 포도 수확이 시원찮았다. 너무 궁핍해 어떻게 살아냈는지 설명하기도 구차한 시절이 지난 다음에야 어느 정도 포도 농사 기술이 생겼다.

비록 남의 땅이지만 농사에 자신이 생기자 신바람이 났다. 고급 종으로 품종을 바꾸면서 포도가 맛있다는 소문이 자자해지고 사람들이 포도를 사러 오기 시작했다. 농사꾼으로서 타인의 인정을 받은 기쁨은 일을 해도 신명이 났고 무기력하던 결혼 생활에 활력을 가져왔다. 느티나무를 심고 원두막을 지었다. 주차장도 점점 더 넓어졌다.

포도를 소매로 판 덕분에 형편이 좋아졌다. 자신감이 생기자 농협에 담보대출을 한껏 받아서 포도원 땅을 사게 되었다. 손님 중에는 퇴직 후 이런 곳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남들은 먼 미래에 이룰 꿈으로나 가져보는 행복을 우리는 벌써 이룬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가까운 곳에 행복이 있는 것도 모르고 그는 저 멀리 있는 행복을 찾아 그렇게도 밖을 헤매고 있었다.

바람, 바람, 바람
포도의 계절이 가고 다시 오기를 두 번이나 거듭해 2003년이 되었다. 그해 손학규 경기도지사가 중대 발표를 했다. 우리 지역에 미군과 지역 주민이 함께 거주하는 <국제평화도시>를 건설하겠다는 내용이었다. 7,000명 주민의 삶의 터전인 528만 평을 뒤집어엎는다는 뜻이었다. 이 발표가 있고 난 뒤 조용하던 시골 동네에는 다양한 얼굴의 바람이 동시에 불어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하나의 바람은 조상 대대로 지켜온 고향을 개발이라는 핑계로 무자비하게 파헤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코 땅을 내주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회의를 해 반대 현수막을 걸고, 집회를 하는 등의 움직임이 있었다.

그에 맞선 바람은 반기는 쪽이었다. 돈 안 되는 농사에 지친 농부는 이참에 보상이나 제대로 받아 편히 살자는 생각이었다. 보상은 언제쯤 나오고 보상가는 얼마일지에 대해 무수한 말이 뒤숭숭하게 떠다녔다.

도시개발 바람 분 시골 동네 떠나
포도농사·글쓰기 적합한 곳 물색
글 스승 있는 음성 땅 6000평 구입 
평택의 아픔 털고 새 삶 살기로


나는 이 두 개의 바람을 번갈아가며 타고는 했다. 첫째는 조금이라도 높은 보상가에 하루라도 빨리 포도원이 수용되기를 원하는 바람이었다. 그리되면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을 어렵지 않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한편으로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도대체 몇 주나 되는지 헤아릴 수도 없는 내 포도나무, 포도원 길가 벚나무들이 사월이면 꽃 대궐을 이루던 풍경, 밤송이가 벌어질 때면 도시인들의 마음을 동심의 세계로 이끌던 밤나무, 하늘을 다 가릴 정도의 깊은 그늘로 한여름 더위도 잊게 해 주던 느티나무 숲…. 그것은 단 몇 년 만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을 다 갈아엎는 것은 나에게 또 하나의 큰 아픔이었다.

또 하나의 바람은 큰바람처럼 대놓고 부는 것이 아니었다. 부는 듯 안 부는 듯 아리송한 느낌의 묘한 바람이었다. 머지않아 보상이 나오면 목돈을 만질 거라는 기대는 농촌 사내들의 마음을 헤집어놓았다. 이제 막 싱숭생숭해진 순진한 사내들과 달리 그는 오래전부터 능숙하게 그 바람을 타 온 터가 아닌가. 그 발표 뒤로 몸이 붕 떠서 다니는 사람처럼 그는 상기된 표정으로 집을 나서고는 했다. 나도 모르는 다이아몬드를 언제 구입했는지 고가의 다이아몬드 팸플릿이 그의 앞으로 배달되기도 했다.

이런저런 온갖 바람이 불던 그해, 맹렬히 부는 바람을 내 의지로 잠재울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 바람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상책이 아닌가. 이 바람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내 삶을 내 의지대로 가꿀 수 있으리라.

운명적인 만남
국제평화도시 개발 계획이 발표된 뒤 그는 후끈 달아오른 몸짓으로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들락날락했다. 토지보상이 곧 될 거라는 희망으로 농협에서 추가 대출을 받아 돈을 물 쓰듯 한 것이다. 더는 부부관계를 지속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한때는 두 딸이 결혼할 때까지라도 인내하리라 생각했지만, 부당한 인내는 내 영혼을 병들게 했고 대학생인 두 딸도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이제 저들 때문에 자존심 상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자존심을 지키는 것은 내 몫의 돈을 잘 지키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과수원 땅을 담보로 자금을 마련했다. 과수원이 수용된 뒤 포도농사를 계속 짓기 위한 땅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어디로 갈 것인가. 포도농사 짓기 적합하고 글을 쓰기 좋은 음성으로 가자. 글 스승님이 계신 음성에서 평택에서의 아픔을 털어내고 새 삶을 살 생각이었다.

그즈음 내가 쓴 글의 빛깔은 모두 무채색이었다. 독자의 마음까지도 어둡게 하는 그런 글을 그래도 나는 써야만 했다. 외딴집 포도원에서 버텨내듯 살아간 버거운 하루하루, 그 암담함을 글로 풀어내지 않았다면 어찌 정신을 놓아버리지 않고 살 수 있었으랴.

스승님 댁에서 잠을 자면서까지 땅을 보러 다녔지만 마음에 드는 땅이 없었다. 선생님과 저녁 먹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평택으로 가던 밤늦은 시간이었다. 막 일죽을 지났는데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다. 내가 원하는 땅이 있으니 와 보라는 것이다. 그 밤에 차를 돌려 음성으로 달려가 그 땅과 만났다.

밤 열한 시경에 만난 땅은 가섭산 기슭의 편평한 사과밭이었다. 겨울 한파를 한풀 꺾어줄 가섭산이 북쪽을 막았고, 동·서·남쪽이 트였으니 일조량이 풍부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흙을 한 주먹 떠서 자동차 불빛에 비춰보니 점질 황토였다. 보습력이 지나치게 좋아 배수는 불량하겠으나 미량요소를 잡고 있는 능력이 탁월한 토양이다. 배수에 신경 써서 포도 농사를 지으면 맛은 떼 놓은 당상일 터였다. 게다가 스승님 계신 읍내가 저만치에 보이고 농업기술센터, 군청, 읍사무소 등도 오 분 내의 거리에 있으니 이보다 좋을쏘냐.

며칠 뒤 2006년 오월의 그 날, 나는 손에 든 돈 한 푼 없이 농협에서 대출받은 돈으로 6,000평의 사과밭을 사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새로운 시작
내 앞으로 땅을 장만했더니 자신감이 생겼다. 마침내 우리는 25년 결혼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큰아이는 직장 따라 객지에 있고, 작은아이는 공부 때문에 영국에 있던 해였다. 이제는 두 딸에게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어미의 모습을 보여주리라. 내가 끌고 다니던 고물 트럭에 짐을 싣고 음성으로 향하는데 긴 세월 허우적대던 늪에서 해방된 기분이었다.

그해 가을, 나는 포도나무를 심기 위해 사과나무를 다 잘라냈다. 지표가 드러나자 평평하게만 보이던 땅이 울멍줄멍했다. 땅을 평평하게 해야 하는데 그 일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쉽게 하겠다고 높은 곳의 흙을 깊은 곳으로 밀어붙여서만은 안 될 일이었다. 긴 세월 온갖 유기물이 축적되면서 식물이 자라기 좋은 환경으로 만들어진 것이 표토다. 푹신푹신하고 미생물과 양분도 풍부한 표토를 걷어버리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이 되어버린다.

굴착기와 덤프트럭이 오고 땅 고르는 작업에 들어갔다. 높은 곳의 표토를 긁어 군데군데 쌓아두고 속살은 퍼서 깊은 곳으로 날랐다. 어느 정도 고른 땅 위에 쌓아둔 표토를 펴고 나니 자연 배수가 잘될 만큼 적당히 경사진 평평한 밭이 만들어졌다. 흙을 떠서 토양검증을 했다. 약산성으로 나온 토양분석표를 바탕으로 P·H 조절을 위해 석회 대신 폐화석을 넣고 깊이 갈아 흙과 잘 섞이도록 했다. 알칼리 성분의 폐화석은 산성 토양을 내가 원하는 6~6.5의 P·H로 조절해준다. 석회처럼 땅을 딱딱하게 하지 않고 공기가 잘 드나드는 흙으로 유지 해 주어 땅이 숨을 잘 쉬도록 해 주는 장점도 있다.

그 땅 위에 서서 나는 그림을 그리고 지우기를 몇 날이고 반복했다. 품종별 포도나무를 심을 위치, 작업장, 화장실, 저온저장고, 원두막, 주차장 등의 위치를 정했다. 주차장과 그늘을 위한 나무는 어떤 종으로 심을지, 비가림 시설은 몇 구역으로 나눌지, 관수 시설은 어떤 방법으로 할지 등을 설계했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이 땅마저도 막대한 자금을 대출받아 마련했으니 여유자금이 없었다. 다른 시설은 미루어도 되지만 비가림 시설은 바로 해야 하는 일이었다. 시설을 기준으로 포도나무 심을 자리가 정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큰돈이 들어가는 비가림 시설을 외상으로 해 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왔다. 평택에서부터 우리 사정을 잘 알던 업체 안주인이 나를 응원한다며 외상 시설을 자청한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스승님과 형제들이 걱정해 주고, 친구들이 응원해주고, 자나 깨나 어미 생각해 주는 두 딸이 있고…. 그 외에도 많은 지인이 나의 새로운 시작을 따스한 마음으로 응원해 주었다.

세 모녀의 한집살이
포도나무는 부잣집 고명딸처럼 성격이 까다롭다. 어쩌면 그 까다로움에 붙잡혀 내가 쓰러지지 않고 잘 버텼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심란할수록 포도나무 가꾸는 데에 더 매달렸다.

그때 내가 타고 다닌 차는 농장의 온갖 짐 다 날라주는 낡은 화물차였다. 주로 입은 옷은 헐렁한 작업복이었고, 신발은 일할 때 흙이 들어가지 않는 장화를 많이 신었다. 여자로서 흔하지 않은 삶이다 보니 주위의 주목거리가 되었다. 얕잡아보는 사람도, 연민의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또 더러는 존경의 시선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다. 다양한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나는 앞만 보고 달렸다. 내가 선택한 일이 지장 받을 만큼 남의 시선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야 훗날 내 어찌 지난 아픔을 깨끗하게 지우고 마음껏 웃을 수 있겠는가.

포도나무 성격이 아무리 까다로워도 주인이 온전히 매달린 덕분인지 농사는 순조로웠다. 육체노동이 많은 포도 농사가 힘은 들었지만 풍년 농사의 기쁨은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그런데도 가끔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있었다. 육천 평 넓은 밭에 혼자 서 있으면 어느 순간 외로움이 밀려왔다. 하루 일을 마치고 빈집에 들면 막막했다. 혼자 먹는 밥은 필요한 에너지를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즈음이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작은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울살이가 조금도 행복하지 않으니 어미와 포도 농사지으며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일 년 뒤에는 큰아이도 다니던 카페를 그만두고 어미 곁으로 와 본인 카페를 열게 되었다.

외로움 밀려올때 어미 찾아온 두 딸
십여년 만에 한집살이 특별한 기쁨
포도값 폭락으로 복숭아 심은지 4년
훌쩍 자란 나무, 내 삶 응원하는 듯


십여 년 만에 다시 시작된 두 딸과의 한집살이는 전에 없던 특별한 기쁨이었다. 식사를 해도, 차를 마셔도 웃음이 거침없이 나왔다. 갈등의 골이 깊은 상태에서 가정생활을 하는 어미·아비의 모습을 지켜본 지난날, 엄청난 혼란을 겪은 두 딸도 어미 못지않게 불행했으리라. 부서진 가정에서 느낄 수 없던 따스한 느낌을 즐기며 우리 세 모녀는 오순도순 한집살이를 한껏 즐겼다.

그래도 가는 길
농사는 순조로웠지만 이번에는 한국 포도 산업에 위기가 오고 말았다. 한미FTA 협정이 발효되면서 미국산 포도가 국내 시장을 장악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여파로 국산 포도 5kg 한 박스 가격이 단돈 만 원도 안 할 때가 많았다. 애써 키운 포도를 헐값에 처분할 때는 내 자식이 밖에 나가 푸대접받는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어미의 심정이 되었다. 두어 해 고민하다가 포도나무를 베어내고 복숭아나무를 심기로 했다.

꽃샘추위가 맵찬 그해 봄날, 드디어 나는 포도나무를 자르기로 작정했다. 비장한 마음으로 톱을 들고 나무 앞에 섰지만 가슴이 쿵쾅거렸다. 직접 만든 묘목을 심어 장정도 없이 가꾼 나무가 아닌가. 나의 입김과 나의 손길이 닿지 않은 나무가 없거늘, 어찌 이리 모진 결심을 했는지. 그러나 수입포도의 위세를 이겨내기에 내 힘은 역부족이지 않은가. 결국 나는 전동 톱날을 나무 허리에 갖다 댔다.

한 그루, 한 그루, 포도나무가 쓰러지는데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일을 계속할 수 없었다. 추위에 한참 쭈그리고 앉았지만 묘책이 없었다. 어차피 감당해야 할 일이 아닌가. 나약한 감정 따위는 꺼내 포도밭 귀퉁이에 세워두자고 결심하고 다시 포도나무 앞에 섰다. 그리고는 생각 같은 건 없는 사람처럼 죽어라 포도나무만 잘랐다.

그런데, 마지막 나무를 자르고 허리를 펴는 순간이었다. 와락 뜨거운 감정이 솟구치더니 목이 탁 막혔다. 억울하고, 아깝고,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뒤죽박죽이었다. 밭 귀퉁이에 얌전히 세워둔 감정이라는 녀석이 어느새 내 안으로 달려든 게 분명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잘 자지 못하였다. 아침이 되니 머리에 열이 심하고 으슬으슬 추웠다. 겨우내 잘 보내놓고도 꽃샘추위가 올 무렵이면 감기가 들고는 했다. 한번은 치러야 할 연중행사였거늘, 그 많은 나무를 자른 죄책감을 덜고 싶었던 나는 폐렴까지 가는 감기를 기꺼운 마음으로 앓았다.

그동안 참 많이 아팠다. 마음이 아플수록 농사에 집중했다. 그래도 안 되면 글을 썼다. 낮에는 과수원 일을 하고 밤에 글을 쓰다 보면 거의 잠을 못 잘 때도 있었다. 그렇게 쓴 글은 충청타임즈 <포도밭에서 온 편지> 코너에 실렸다. 장정 없이 농사짓는 촌부가 2주에 한 편씩 4년간 한 번도 마감일을 어기지 않고 쓴 글이었다. 분명 힘 드는 일인데도 나는 글쓰기를 멈출 수 없었다. 원만하지 못한 결혼 생활, 포도농사를 접고 복숭아농사를 시작한 일 등등. 내 삶은 어찌 이리 고단한지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면 더욱 글쓰기에 매달렸다. 돌아보니 힘든 시기의 나를 잡아준 것이 바로 글쓰기와 농사가 아니었을까 싶다.

복숭아나무를 심은 지 4년째, 어느덧 훌쩍 자란 나무는 지금 밤톨만 한 아기 복숭아를 달고 내 삶에서 또 한 번의 도전을 응원하는 모습이다.

나는 포도나무가 정말 좋았다. 그런데 복숭아나무를 가꾸어보니 그 못지않게 마음이 간다. 땅의 모성이 아니라면 그 무엇이 깊이를 알 수 없는 감동을 끝도 없이 자아낼 수 있을까.

농업은 앞으로도 고단할 것이다. 복숭아나무를 자르며 회한에 잠길 날이 또 올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땅의 모성에 끌려 돈 안 되는 이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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