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시 한림읍 상대리서 태풍 피해를 입은 밭작물을 바라보는 김창준씨 모습.

수확할 것도 대파할 것도 없어…깊은 한숨만
|제주

이달 초 파종한 브로콜리·적채
수일째 물 빠지지 않아 썩어 처참
콩·메밀은 강풍에 쓰러지고
알맹이는 검게 변해 수확 포기


“태풍이 지나 간지 며칠이 지났지만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다. 평생 흙과 함께하며 자식처럼 농작물을 키웠는데 태풍에 대부분이 피해를 입어 수확할 것도 없고 대파할 작물도 없어 올해는 끝났다.”

강풍과 폭우를 동반한 제18호 태풍 ‘차바’가 제주지역에 200억여원 이상의 재산피해를 입히는 등 생채기를 남긴 가운데 지난달 말부터 이 달초 브로콜리와 적채(붉은 양배추) 등을 파종한  밭작물 지역에는 수일이 지난 지금까지 물이 빠지지 않아 농작물이 썩어가 처참한 보습을 보였다. 또한 이 달 중순부터 수확에 들어가야 할 콩과 메밀은 강풍에 쓰러지고 알맹이는 검게 썩어가 수확을 포기해야 할 지경이었다.

태풍이 지나가고 복구 작업이 한창인 지난 10일 오전 제주시 한림읍 상대리 일대에서 농지를 임대해 콩, 메밀, 브로콜리, 적채(붉은 양배추), 비트 등 6만6000㎡ 규모로 농사를 짓는 김창준(50) 씨는 침수된 밭에서 썩어가는 농작물을 보며 깊은 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김씨가 바라보고 있던 브로콜리 및 적채 파종지에는 아직도 물이 고여 있었으며, 푸르러야할 어린싹들은 뿌리가 노출돼 노랗게 썩어가고 있었다.

더욱이 김씨는 이번 태풍으로 70% 가량 피해를 입어 콩과 메밀 수확을 포기해야 할 상황으로 10월에 불어 닥친 늦은 태풍으로 대파 시기도 지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한 상황이다.

김씨는 “콩과 메밀 수확기라 수확을 해야 하는데 태풍으로 낱알이 검게 변하는 등 썩어가 건질 것이 없다”며 “일부를 수확해도 장비나 인건비도 안 되고 대부분 비상품 쭉정이 뿐”이라고 한 숨을 내 쉬었다.

이어 “그렇다고 대파를 하려해도 늦어도 9월말에서 10월 초에는 대파가 이뤄져야 하는 데 이미 시기가 늦어 대파할 작물도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씨는 “비닐하우스 같이 시설 피해라면 고치면 되는데 농작물이라 어쩔 수 없어 시름만 깊어지고 있다”면서 “자식들 키우듯이 농작물을 키웠는데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속이 아프고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다”고 전했다.

김씨는 “현재 상황에서 가장 급한 것은 정부가 신속히 제주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해 농가의 시름을 달래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제주도는 주요 피해 지역에 대한 피해 접수와 현장 조사를 벌이고 있으며, 피해 조사가 끝나는 대로 보상계획 등 농가 지원책을 수립할 예정이다.

제주=강재남 기자 kangjn@agrinet.co.kr
 

▲ 울주군 삼동면 남순옥 씨가 간정태 한농연중앙연합회 수석부회장과 함께 폐허가 된 논과 축사를 가리키며 조속한 지원을 촉구하고 있다.

농업시설 복구 손도 못대…논·축사는 폐허로
울산 울주

도심지역 피해복구 활발하지만
농촌은 인력·장비 턱없이 부족
고가 장비는 고철덩어리 되고
목숨 건진 소도 묽은 설사


제18호 태풍 '차바'로 큰 피해를 입었던 울산광역시 울주군이 북구와 함께 특별재난지역으로 우선 선포됐다. 그러나 농업시설 피해복구 작업은 여전히 뒷전으로 밀려나 있고, 사유시설 피해에 대한 지원은 미미해 농가는 여전히 망연자실해 있다. 도움의 손길이 절실하다.

지난 10일 찾은 울주군 삼동면. 대암댐은 아직도 흙탕물 범벅이 돼 있고, 떠내려 온 원통형의 볏짚 곤포사일러지와 쓰레기더미가 둥둥 떠 있다.

수확을 앞둔 벼를 깔고 누어 자갈밭이 되어버린 논, 엿가락처럼 휘어진 골재만 남은 비닐하우스, 쓰레기장으로 변한 학교운동장 등 댐 상류지역으로 올라갈수록 나흘 전 태풍이 남긴 ‘물폭탄’의 상흔이 아직도 곳곳에 드러나 있다.

들판을 뒤덮은 쓰레기더미를 군부대가 동원돼 치우고, 흙더미나 자갈더미가 쌓인 길을 정비하는 등의 응급복구 작업이 한창이다. 그러나 농업시설 복구에는 아직 손길이 미치지 못할뿐더러, 구체적인 복구 및 지원 계획 언급도 없어 농민들의 어깨는 여전히 축 쳐져 있다.

화잠리 보은천 옆에 사는 남순옥(60) 씨는 “하늘이 뚫린 듯 폭우가 내려 하천이 범람해 휩쓸고 지나가면서 집도 축사도 논도 순식간에 쑥대밭이 돼 버렸다”면서 “나흘이 지났지만 복구 작업을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도 막막하다”고 토로했다.

남 씨에 따르면 축사에 있던 소 3마리가 이번 폭우에 익사를 했다. 물에 잠겨 목만 내밀고 있었던 24마리의 소도 겨우 목숨은 건졌으나 대부분 묽은 설사를 하며 앓고 있다. 트랙터, 굴착기, 스키로더, 트럭 등 고가의 장비들은 물에 잠겨 고철이 돼 버렸다.

볏짚 곤포사일러지와 배합사료도 떠내려가 버렸다. 집은 아래층이 잠겼고, 벼 수확을 앞두고 있던 논 11만8800㎡(3만6000평) 중 8만5800㎡(2만6000평)가 유실되거나 토사와 자갈더미로 뒤덮였다. 새로운 수로가 생기듯 깊게 파이고, 바윗덩이가 떠내려 온 논도 많다. 남 씨의 남편 신재호(62) 씨가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장비 지원이 이뤄지지 않으면 복구에 엄두를 낼 수 없는 실정이라고 한다.

이웃 농업경영인인인 김점순 씨도 하천 제방이 터지면서 9만9000㎡(3만평) 중 6만6000㎡(2만평)이나 되는 논이 유실·매몰되는 피해를 입었다고 전했다.

이번 태풍으로 울주군에는 1660ha에 달하는 농업시설(농경지 침수 796ha, 유실·매몰 224ha, 농업기반시설 파손 250개소)이 수해를 입은 것으로 울주군 농업정책과는 잠정 집계했다.

간정태 한농연중앙연합회 수석부회장은 “울산 도심지역 피해는 언론에 보도가 많이 돼 복구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지만, 농촌지역 피해는 주목을 덜 받아 복구인력과 장비 지원이 턱없이 모자라는 실정이다”면서 조속한 복구 지원을 촉구했다.

이날 오후에 국민안전처는 울산광역시 북구와 울주군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우선 선포한다고 밝혔다. 이미 파악된 피해규모가 특별재난지역 선포기준을 초과할 것이 확실시되기에 우선적으로 특별재난지역 선포를 해 피해수습이 좀 더 신속하게 이뤄지도록 하겠다는 조치다.

이에 따라 북구와 울주군은 피해복구 비용 가운데 지방비 부담분의 일부를 국고로 추가 지원받게 된다. 피해주민들은 가스·지역난방·전기 등 공공요금과 통신요금 감면 등의 간접 지원을 받는다. 그러나 막상 사유시설에 대한 지원은 미미하기에 피해농민의 재기를 위해서는 특단의 대책 마련과 다양한 형태의 지원이 매우 절실한 실정이다. 

울주=구자룡 기자 kucr@agrinet.co.kr
 

▲ 파프리카 하우스가 침수돼 큰 피해가 발생한 백민석씨가 피해 상황을 살피고 있다.

하우스 전체가 물에 잠겨…물폭탄 흔적 곳곳에
경북 경주

파프리카 열매 달린 줄기 수북
작물피해만 수 억 원 달하고
고가 지열난방시스템도 침수
“현실적 보상 없인 생계 막막”


지난 5일 태풍 ‘차바’로 큰 피해가 발생한 경주시 양남면 환서리 백민석(53·전 한농연경북도연합회장)씨 파프리카 농장을 찾았다. 백씨는 3000평과 2500평 연동 하우스 2동에서 각각 파프리카 농사를 짓고 있다. 이번 태풍으로 3000평 연동 하우스 전체에 물이 들어 내부에 있던 작물을 전부 잃게 됐다. 또 나머지 연동 하우스도 물에 반 정도가 침수돼 추가적인 작물 피해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백씨는 “하우스 주변 야산에서 1시간 남짓 짧은 시간에 엄청난 양의 물이 갑작스럽게 쏟아져 들었다. 엄청난 피해가 났던 태풍 매미 때 보다 쏟아진 물 폭탄의 위력이 더 컸던 것 같다. 주변 어르신들은 평생에 이런 비는 처음이라고들 하신다. 자칫 사람이 급류에 쓸려 갈 수도 있을 정도여서 하우스가 잠기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며 아찔했던 당시를 기억했다.

지난 10일 방문한 백씨의 연동 하우스 주변과 내부는 태풍으로 인한 물 폭탄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작물이 들어 있어야 할 하우스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하우스 안에 가득 차 있어야 할 열매가 그대로 달린 파프리카 줄기 들이 몽땅 수거돼 하우스 밖에 여러 무더기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당시 물 폭탄에 쓸려내려 간 스티로폼 패널과 비틀어진 작업용 레일, 재배 매트 등 기구들만 하우스 내부에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다.

인근 해병부대에서 복구지원을 나온 군인들과 지역 농민단체 소속 동료 농민 등 30여명이 하우스 내부에 들어찬 폐기물들을 끄집어내고 하우스 밖에서는 찢어져 손상된 비닐하우스를 임시로 보수하느라 분주했다.

백씨는 “재배 포트가 지면에 위치한 3000평 연동하우스 1동은 포트가 놓인 부분이 완전히 물에 잠겨 내부에 있던 파프리카를 전부 들어냈다. 지난 7월 정식해 최근에 첫 수확을 한 곳이다. 내년 7월까지는 수확을 할 수 있었던 터라 작물피해만 4억원 이상 될 것 같다. 농작물 재해보험에도 가입하지 않아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는 “하우스 바닥에 물이 들어 움푹 파이고 내려 앉아 매트와 작업용 레일 등을 전부 새로 교체해야 할 판이다. 또 일부 비닐이 찢어지고 구조물이 파손된 부분도 보수해야 한다. 지열난방을 위해 설치한 고가의 난방 시스템이 물에 침수됐다. 시설 복구에만 5~6억원 이상 비용이 들 것 같고, 복구에도 상당히 오랜 기간이 걸릴 것 같다”고 덧붙였다.

또 백씨는 “인근 농가들이 최근 수년째 파프리카 시세가 좋지 않아 작목을 전환하거나 휴경하고 있는 어려운 상황에도 우리 농장은 사명감을 가지고 묵묵히 파프리카 농사에만 전념해왔는데 이런 일이 발생했다”며 “작물피해에 따른 현실적인 보상과 복구비 지원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앞으로 생계가 막막하다”며 지자체와 정부차원의 현실적인 대책마련을 당부했다.

경주=조성제 기자 chosj@agrinet.co.kr
 

▲ 18호 태풍 ‘차바’로 인해 한 해 농사를 망친 농민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도복 및 수발아 된 벼를 바라보고 있다.

수확기 벼 수발아 확산…“하늘이 원망스러워”
전남 고흥

수량 감소·상품가치 떨어져
농협 수매 거부할까 걱정 태산
농작물재해보험 대상서 제외돼
피해보상 길 막혀 발동동


“어떻게 해서 키운 벼인데 이런 헐값을 받을 바에는 차라리 집에서 키우는 소 밥으로 쓰는 게 낫제!”

태풍 ‘차바’로 인해 벼 수발아 피해를 입은 전남 고흥의 한 농민이 농협의 나락 선지급금 결정을 보고 이같이 쓴소리를 뱉었다. 초속 30미터 이상의 강풍과 폭우를 동반한 ‘차바’는 고흥군 전역에 벼 도복 및 수발아 피해를 확산시키며 수확을 손꼽아 기다리던 농민들의 기대와 영농의지를 무참히 꺾어버렸다.

“농사는 하늘이 지어준다고 하지만 나락이라도 제대로 수확했으면 좋겠다”는 농민 말에 하늘을 원망하는 마음이 서려있다.

고흥군에 따르면 평년보다 3~5도 높은 기온과 태풍 전 후 10여일 동안 이어진 비로 수확기를 앞둔 1300ha의 논이 벼 수발아 피해를 입은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고온다습한 가을철 이상기후로 자연상태에서 수발아 조건이 맞춰지며 타 지역보다 큰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이처럼 벼 종자가 이삭에 붙어있는 상태로 발아한 벼는 수량감소와 품질저하 등으로 상품 가치는 ‘꽝’이다.

쌀값 폭락에 이어 태풍으로 인한 수발아 피해로 이중고를 겪게 된 농민들은 할 말을 잃고 하늘만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실정에 처하고 말았다.

더욱 큰 문제는 태풍으로 벼 수발아 피해가 발생했다 하더라도 농작물재해보험법상 수발아 현상은 적용 대상에 포함돼있지 않아 피해보상을 받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피해발생 벼 대다수가 침관수 수발아 벼로, 도복으로 인한 수발아와 달리 일반 벼와 구분하기 어려워 피해조사에도 차질을 빚고 있다. 무엇보다 농민들이 걱정하는 것은 수발아 현상이 발생한 벼에 대한 농협의 수매거부다.

이와 관련해 고흥 녹동농협은 지난 7일 이사회를 통해 수발아 비율에 따라 등급을 결정하기로 하고 ‘2016년산 자체벼 수매 정산방침’을 밝혔다.

농협은 수발아 비율이 10%이하는 1등급으로 선지급금 3만원, 11%~30%이하는 2등급 2만5000원, 31%~50% 이하는 3등급 2만원, 50% 초과는 수매불가 등외로 구분한다는 것. 하지만 이번 피해로 수발아 비율이 50%가 안 되는 저품위 벼가 대량 발생할 것으로 예상돼 농가소득 감소는 불을 보듯 뻔한 상황.

농협 관계자는 “농가 생산비 보존도 안 되는 수매가임을 알고 있지만 지난해 자체수매로 인한 적자가 4억 원 가량 발생하고 RPC재고 보유량은 늘어만 가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도 정부는 시장경영에 맡긴다는 이유로 어려움을 농협에 모두 떠넘기려 한다”고 설명했다.

미질이 좋지 않아 수매에 응하지 못하는 농민들은 마땅한 대책이 없어 상인들에게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벼를 헐값에 떠넘기고 있다.

품질 이하의 벼가 일반 벼와 섞여 시중으로 유통될 경우 품질 하락으로 지역 쌀 이미지 손실은 물론이고 판매량 급감 등 막대한 2차 피해가 발생할 상황이다.

이에 현장에서는 예기치 못한 태풍과 이상기온으로 발생한 이번 피해는 민간에서 해결하기엔 역부족이라는 여론과 함께 정부차원의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류철종 한농연고흥군연합회장은 “지난 6일 김재수 농식품부 장관이 현장을 다녀갔지만 아직 이렇다 할 대책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며 “저 품위 벼가 시중에 유통되기 전에 신속하게 피해 벼 전량을 농협에서 수매하고 그 차액을 정부에서 보존해주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또 “장기적으로는 수발아 현상에 강한 품종 개발·보급과 기후변화에 맞는 파종시기 조정을 위한 교육·지도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고흥=김종은 기자 kimje@agri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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