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농기계산업이 위기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는 업계는 물론 전문가들도 이견이 없다. 강창용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국내 농기계산업의 현실을 두고 ‘백척간두’라고 표현했다. 백자나 되는 높은 장대 위에 올라섰다는 뜻으로 더할 수 없이 어렵고 위태로운 지경을 이를 때 쓰는 표현이다. 그만큼 업계가 절박한 상황에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내수시장에서는 국내 업체들끼리의 경쟁에도 모자라 최근에는 수입업체들의 파상공세에 시장을 점차 잃어가고 있는 형국이다. 그나마 수출시장이 최근 성장세에 있지만 지속적인 수출을 위해서는 농기계정책 패러다임의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농기계 보급·사후관리에만 초점…거시적 관점서 접근 필요
자동차·건설 등 원천기술 보유 분야와 통합, 핵심기술 접목
가격 인하·연구개발 확대 움직임…“구조조정 나서라” 여론


▲농기계산업 육성책이 없다?=우리 정부는 1970년대부터 농업기계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결과 1980년대에는 벼농사의 이앙과 수확작업을 기계화하는데 성공했다. 1990년대에는 중소형 농기계 중심으로 벼농사의 일관작업을 완전 기계화하는 성과를 거뒀다. 1993~1997년까지는 이른바 ‘농기계 반값공급’ 정책을 펴 동력경운기 등 소형농기계의 보급을 촉진해 왔다. 그러나 농기계 과다공급과 농가부채를 늘렸다는 비판에 1998년부터 농기계구입 지원자금은 보조가 중단되고 융자로 전환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농업기계화촉진법을 제정하고 농기계의 국산화와 부품 전문화 등을 추진하는 성과도 보였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업계는 2000년 이후 정부가 농기계산업을 육성하려는 뚜렷한 정책이 없었다고 말한다. 농기계산업 정책이 대부분 농기계 공급과 사후관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농기계 산업체 육성을 위한 체계적이고 거시적인 방안이 사실상 없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김경욱 서울대학교 교수는 지난달 6일 국회에서 열린 정책토론회에서 “과거 제조업 국산화 정책이 성공해 지금의 농기계산업이 형성됐고 이후 난립된 제조업을 정비해 전문화는 성과를 거뒀다”면서도 “그러나 이후 제조업을 위한 기술육성과 같은 제대로 된 정책이 마련돼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지적을 두고 농업기계화 정책심의회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적지 않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현재 농기계촉진법 제6조에는 농업기계화 심의회를 두도록 했다. 이 심의회에서는 농업기계화와 농업기계화사업의 전반에 대한 심의를 하게 된다. 여기에는 국가 목표의 설정과 법령·제도의 발전에 관한 사항은 물론 농업기계화의 육성 및 지원에 관한 사항 등도 포함돼 있다. 올해 이 심의회는 4월 한 차례만 열렸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심의회에서 현재 농기계산업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논의하고 대안을 마련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면서 “이렇게 중요한 심의회가 올해 상견례 등으로 한번 열린 것을 보면 농기계산업이 위기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정부에서는 그렇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체계적인 연구개발 청사진 필요=국내 농기계시장의 수입업체 잠식이 커지고 있는 원인의 하나는 막강한 자본력과 이를 바탕으로 한 기술력이다. 해외 선진기업들은 20세기 초에 농업용 트랙터를 선보인 이후 100년 가까이 축적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에 국내 업체들도 이러한 기술력에 근접하기 위해 최근 연구개발에 지속적으로 투자를 늘리고 있지만 해외 유수 농기계업체와 비할 수준이 아니다.

실제로 한국농기계공업협동조합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존디어나 AGCO, 구보다의 농기계 매출 대비 연구개발 투자비율은 2013~2014년 최대 4%에서 최소 1.2%다. 이 기간 국내 종합형 4개 제조사는 4.1%로 매출 대비 투자비율로만 볼 때 상대적으로 적지 않은 투자를 하고 있다. 그러나 절대 금액에서는 존디어 1조2000억원, AGCO 1210억원, 구보다 1430억원으로 국내 4개사 600억원에 비해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입업체들에 의한 내수시장의 침체는 국내 제조사들이 이마저도 투자하는 연구개발 의욕을 저하시키거나 기술발전이 퇴보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국내 농기계산업의 장기적인 발전과 수출시장에서의 경쟁력 확보를 위한 원천기술의 개발을 뒷받침할 수 있는 체계적인 연구개발 청사진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예를 들어 국내 농기계제조사별로 진행되고 있는 연구개발을 자동차, 건설 등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분야와 통합하고 농림축산식품부, 산업통상자원부 등 관련 부처가 연구개발비를 매칭펀드로 운영하는 형태다. 이럴 경우 연구개발에 투자되는 비용의 중복을 줄이는 동시에 전문분야의 핵심기술을 농기계에도 접목해 해외 업체들이 보유하고 있는 원천기술에 빠르게 근접 또는 추월까지도 할 수 있다는 기대에서다.

이러한 방안에 대해 국내 제조업체의 한 관계자는 “기업 혼자서 몇 백억씩을 투자해 기술을 개발하기에는 사실상 부담이 크다”며 “과거 엔진 개발에 이러한 논의가 있었으나 이행이 되지 못한 사례가 있지만 정부와 다른 분야까지 참여한다면 상황이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농기계학계의 한 교수는 “공동개발에 대해 업계에서 많은 얘기들이 나왔고 공감도 하고 있다. (공동개발에 공감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으로, 말로만 하지 말고 이제부터라도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업체들의 선택은?=“추수시기에 콤바인을 쓰다가 논 한가운데서 고장이 났는데 대리점에서는 인력이 없어 수리에 며칠이 걸린다고 합니다. 콤바인을 1년에 몇 번이나 쓴다고 그렇게 고장이 자주 일어나는지. 가격이라도 싸면 모를까. 그 길로 일본제품을 구매했습니다.”

전남 영암에서 논 농사를 하는 한 농민의 말이다. 이 농민의 말에는 국내 농기계 제품의 현실과 국내 제조업체에 대한 불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처럼 현재 농기계산업이 처한 위기를 농기계업계 스스로 자초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농기계업계가 위기에 봉착했다는 사실이 단순히 농기계구입 융자율 조정에서 불거진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부터 진행 또는 예견돼 왔다는 점에서 농기계업체들의 안일한 대처가 지금의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국내 제조사들은 자신들의 제품이 수입제품에 비해 기술력이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정작 현장의 농민들의 반응은 다르다. 기술력은 떨어지는데 가격은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소비자들의 인식을 바꾸는 열쇠는 결국 국내 농기계업체들이 쥐고 있는 만큼 앞으로 국내 업체들이 어떠한 선택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강창용 연구위원은 과거 토론회에서 “세계시장 진출과 국내시장의 방어를 위해서는 내 탓부터 해야 한다”며 “구조조정을 위한 움직임부터 좀 보여 달라. 정부도 이런 측면에서 특별지원을 해 달라”고 말했다.

이러한 지적이 잇따르자 국내 제조사들도 농기계 가격인하나 품질향상을 위한 연구개발 등을 확대한다는 방침을 내부적으로 세워 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농기계 가격인하는 공감을 하고 있지만 인하 폭은 업체별 상황에 따라 다소 변동될 여지가 있어 보인다. 다만 분명한 것은 지금처럼 이른바 거품이 있는 가격으로는 농민들의 선택을 받기가 힘든 것만은 사실이다. 여기에 품질향상을 위한 연구개발비도 매출액 대비 5%까지 확대한다는 계획도 세우는 등 자구책 마련에 나서는 모양새다.

이를 두고 농기계업체의 한 관계자는 “정부의 융자율 조정과는 별개로 나름의 돌파구를 찾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면서도 “가격인하는 공감을 하지만 농협의 은행사업과 맞물려 사실 고민이 적지 않다. 연구개발비는 목표를 정해둔 만큼 추진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농기계학계의 또 다른 교수는 “농기계 분야는 농업의 기반산업인 만큼 지속적으로 농업기계화 촉진을 지원하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본다”며 “업계에서도 단순히 현재의 위기만을 면피하려는 근시안적인 이익에만 매달려서는 안되고 진정으로 노력하려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김영민 기자 kimym@agri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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