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나의 행복한 시골살이

작은 아이가 4시간에 걸쳐 만든 눈사람.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던 지난 겨울 우리 마을은 참 예뻤다. 나뭇가지마다 축축 늘어질 정도로 무거운 눈을 잘도 이고 있었고, 우리 집 작은아이는 장장 4시간에 걸쳐 눈사람을 아빠보다 더 크게 만들어서 태백의 눈 조각품처럼 예술적으로 표현하여 오고가는 동네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어 웃음 짓게 했다. 할머니가 눈사람 눈동자하라고 갖다 주신 장난감 파란 구슬이 유난히 빛이 났다. 올 겨울 동네사람들 아무도 다친 사람 없고 어느 집 담벼락하나 무너지지 않고 겨울을 잘 났다. 참 고마운 일이다.

눈이 올 때마다 혼자서 보기 아까운 풍경이 그려지는데 윗집 사는 형님과 아랫집 사는 아우님의 눈 쓰는 장면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아무도 밟지 않은 소복소복 쌓인 눈을 치우는 일. 항상 형님이 먼저 시작해서 우리 집까지 오시고 아우는 집 앞부터 마을 어귀까지 밀어낸다. 하얗게 쌓인 눈처럼 맑고 아름다운 박달마을 풍경이다.

아직도 박달산 자락엔 하얗게 눈이 남아있지만 그마저도 낮에는 소리없이 녹아서 마을 앞길로 졸졸졸 흐른다. 모처럼 개울물도 제법 많이 흐르고 마음은 벌써 봄처녀마냥 들떠있다. 산책길에 만나는 어르신들의 노인정 퇴근길이 조금은 가벼워 보여 좋다. 아침에 출근하여 점심을 같이 해서 드시고 오후 4시면 집으로 돌아가신다. 

얼마나 다행인가? 긴긴 겨울을 혼자서 지내시려면 아픈 곳만 생길텐데 함께 모여서 수다도 떠시고 자식들 자랑도 하시고 마을 사람들 소식도 들으면서 소일하시니 어르신들의 겨울이 짧기만 하다. 90도로 굽은 허리를 하고도 버스를 타고 병원에 다니시는걸 보면 안타깝다. 한평생 일속에 묻혀서 사신 훈장처럼 허리는 굽었고 손마디는 할아버지 손인지 할머니 손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로 투박하고 주름투성이다.

보폭을 줄여서 할머니께 인사하고 어찌 지내시는지 안부를 물으면 할머니들은 내 걱정부터 하신다. “시골은 도시같지 않어. 많이 춥지?” “괜찮아요. 신랑이 불 따시게 때줘요.” “그래야지. 도시서 와서 사는 것만도 용한디.” “저 먼저 갈게요 천천히 오세요.” 하고 어르신들을 비켜서서 걸으면 뒤에서 들리는 소리, 아이고 저렇게 날라 다니면 얼매나 좋을꼬 하신다.

걱정해주고 보살펴주시기에 늘 감사하고 건강하시기를 기도한다. 지난 겨울도 무사히 지내셨으니 봄 되면 또 들판으로 나가신다. 텃밭을 가꾸시고 자식들 나눠줄 채소도 가꾸시느라 바쁘시다. 누구든지 간에 일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눈 오면 다 죽는다는 풀도 정말로 다 죽었고, 봄 되면 녹는다는 눈도 다 녹았다. 생활 속에 진리가 있다. 어느 것도 서두르지 말고 다 때가 되면 풀린다는 말씀이다. 어른들은 늘 우리들보다 너그럽고 푸근하시다. 동네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챙겨서 안부 물으시고 여름내 풀과 싸우는 우릴 보고 그렇게 애진자진할 필요 없다고 일러주신다.

이제 며칠 있으면 농사도 본격 시작이다. 하우스 안에 모종은 벌써 싹을 틔우고 파릇파릇 하매나 밭에 나갈 날을 기다리며 잘 자라고 있지만 무엇보다 봄판에 큰일은 밭정리하고 거름내는 일이다. 과수를 하는 사람들은 벌써부터 전정하고 많이 휘어진 나무들을 지지대로 괴어주느라 바쁘다. 유난히 추웠다지만 짧은 겨울이 아쉽기만 하다.

자 올해 농사도 시작이다. 잘 기다려 주었다. 어서 어서 밭으로 나가 해야할 일들을 해야지. 농부가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

올해 모두 다 풍년 들어서 농부들이 활짝 웃는 그런 한해였으면. 오늘처럼 눈부시게 맑은 봄 햇살처럼.....

유안나 씨는 2002년 귀농해 현재 충북 괴산에서 친환경 농사를 짓고 있으며, 천연염색 천을 바느질 해 조각보로 만드는 것을 즐긴다. [시골에 사는 즐거움] 책의 저자이며, 2003~2006년까지 문화일보 ‘푸른광장’의 고정 필자로 활동했다.



충북 괴산/ annarew@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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