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댁의 건강밥상
시골에서 맞은 둘째 해, 이웃 마을의 밭을 빌려 고구마 농사를 지었다. 고구마 모종을 심던 날은 마침 내 생일이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섰는데 남편이 읍내 신발가게 앞에서 차를 세웠다. 장화를 고르라는데, 색깔도 모양도 한 가지여서 그저 발에 맞으면 끝이었다. 그날 나는 검정 장화를 신고 해가 질 때까지 비탈밭에 엎드려 고구마 순을 심었다. 잠시 쉬는 사이 밭에 누웠다가 내가 내는 코 고는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더 오랜 기억도 있다. 여덟 살 무렵, 연탄불도 있었지만 더러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짓던 시절이었다. 어머니께서 설빔이라며 빨간색 바지를 사오셨다. 보들보들한 합성섬유로 된 쫄쫄이 바지였다. 잘 맞나 보자며 어머니는 내게 바지를 입히셨다. 바지는 물론 맞을 리가 없었다. 적어도 3~4년은 입어야 했으니, 길이도 길고 쫄쫄이지만 품도 너글너글했다. 아랫단을 다리 길이에 맞춰 접으며 어머니는 꼭 맞는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설날에 입자며 장롱 속에 바지를 넣으셨다. 다음날, 빨강 바지가 눈에 삼삼해진 나는 몰래 새 바지를 꺼내 입었다. 어느새 어머니는 단을 줄여 놓으셨다. 그 날 군것질거리는 아궁이불에 넣은 고구마였다. 군고구마를 꺼내는데 그만 바지가 아궁이에 스쳤다.
단지 스쳤을 뿐인데. 왼쪽 바짓가랑이 아래쪽이 눌어붙고 말았다. 손에 군고구마를 든 채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가 방에서 뛰어나오시자 나는 더 크게 울었다. 어머니는 꾸중 대신 내 손을 잡고 방으로 데려가셨다. 어머니는 바느질 꾸러미에서 노랑색 천을 꺼내 병아리 모양으로 오려 눌은 자국에 대고 아플리케 수를 놓으셨다. 성한 한 쪽에도 어머니는 똑같이 수를 놓으셨다. 그저도 흑흑 흐느끼는 내게 어머니는 군고구마를 까서 입에 넣어주셨다. 식은 군고구마는 달고 촉촉했다.
양성댁 강분석 앙성댁 강분석(52)씨는 1997년 봄 서울에서 충북 충주시 양성면으로 귀농, 지금은 경북 봉화로 이사해 귀농 12년차를 맞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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