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댁의 건강밥상

이웃에서 고구마 한 상자를 받았다. 지난해 고구마 농사를 걸렀기에,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겨울철 최고의 주전부리는 역시 군고구마가 아니겠는가. 작은 것을 하나 꺼내 껍질째 물에 씻어 맛을 보았다. 달고도 싱싱했다. 아작아작 씹는 소리가 유난스러웠는지, 남편이 말했다. “아, 생맥주 마시고 싶다. 종로 5가 뒷골목, 생고구마 공짜로 주는 데서.” 남편은 고구마보다 생맥주 생각이 간절했던 모양이다. 나는 생전 처음 고구마 심던 날을 떠올리고 있었는데.

시골에서 맞은 둘째 해, 이웃 마을의 밭을 빌려 고구마 농사를 지었다. 고구마 모종을 심던 날은 마침 내 생일이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섰는데 남편이 읍내 신발가게 앞에서 차를 세웠다. 장화를 고르라는데, 색깔도 모양도 한 가지여서 그저 발에 맞으면 끝이었다. 그날 나는 검정 장화를 신고 해가 질 때까지 비탈밭에 엎드려 고구마 순을 심었다. 잠시 쉬는 사이 밭에 누웠다가 내가 내는 코 고는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더 오랜 기억도 있다. 여덟 살 무렵, 연탄불도 있었지만 더러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짓던 시절이었다. 어머니께서 설빔이라며 빨간색 바지를 사오셨다. 보들보들한 합성섬유로 된 쫄쫄이 바지였다. 잘 맞나 보자며 어머니는 내게 바지를 입히셨다. 바지는 물론 맞을 리가 없었다. 적어도 3~4년은 입어야 했으니, 길이도 길고 쫄쫄이지만 품도 너글너글했다. 아랫단을 다리 길이에 맞춰 접으며 어머니는 꼭 맞는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설날에 입자며 장롱 속에 바지를 넣으셨다. 다음날, 빨강 바지가 눈에 삼삼해진 나는 몰래 새 바지를 꺼내 입었다. 어느새 어머니는 단을 줄여 놓으셨다. 그 날 군것질거리는 아궁이불에 넣은 고구마였다. 군고구마를 꺼내는데 그만 바지가 아궁이에 스쳤다.

단지 스쳤을 뿐인데. 왼쪽 바짓가랑이 아래쪽이 눌어붙고 말았다. 손에 군고구마를 든 채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가 방에서 뛰어나오시자 나는 더 크게 울었다. 어머니는 꾸중 대신 내 손을 잡고 방으로 데려가셨다. 어머니는 바느질 꾸러미에서 노랑색 천을 꺼내 병아리 모양으로 오려 눌은 자국에 대고 아플리케 수를 놓으셨다. 성한 한 쪽에도 어머니는 똑같이 수를 놓으셨다. 그저도 흑흑 흐느끼는 내게 어머니는 군고구마를 까서 입에 넣어주셨다. 식은 군고구마는 달고 촉촉했다.

양성댁 강분석
앙성댁 강분석(52)씨는 1997년 봄 서울에서 충북 충주시 양성면으로 귀농, 지금은 경북 봉화로 이사해 귀농 12년차를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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