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보급했던 농민가 가사처럼…70 평생 농민운동 ‘외길’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배달의 농사형제 울부짖던 날…” 농민을 비롯해서 우리나라 국민들 중에서도 웬만한 사람들은 아는 노래, ‘농민가’다. 우리나라 농민운동의 산 증인이자,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농민가를 전국적으로 보급한 이로 알져진 김준기 ㈔한국 4-H본부 회장은 한국농어민신문의 전신인 한국농축수산유통연구원 출신이기도 하다. 본보 창간 29주년을 맞아 김준기 회장을 만나 보았다.

농민가의 유래에 대해 궁금하던 차에 이참에 확실히 물어봤더니 흥미로운 대답이 나왔다. “농민가는 원래 내가 서울농대 다니던 시절 조직했던 ‘농사단’(農士團, NSD)의 단가로 만든 겁니다. 가사는 나와 동기인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과 후배인 이용화(언론인) 등 농사단 멤버들의 의견을 모아 만든 공동창작이고, 곡은 구전되던 것입니다. 그 후 현장에서 대학 4-H를 조직화하고 가톨릭농민회 운동을 한 내가 전국적으로 보급했지요.”

김성훈 전 장관 등과 농사단 멤버로 활동

포항에서 태어나 어린시절부터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도 “농고를 나와 서울농대에 가서 농업에 종사하겠다”는 꿈을 가졌던 그는 58년 서울농대 농학과에 들어갔다. 성천 유달영 선생, 이은웅, 표영구, 이태현 교수 등에게 농학을 배우면서도 사회과학에 관심이 많아 농업경제학과의 김준보 교수 강의를 더 많이 들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학내에서 김성훈 전 장관과 ‘한얼’을 발의했지만 군대에 가느라 참여 하지 않았고, 이후 농촌의 구조적 모순을 연구하는 ‘농사단’의 핵심멤버로 활동했다. 농사단은 김 회장과 함께 이건우 전 가농 경기도회장(작고), 김성호 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고문의 주도로 최민호 서울대 교수(작고), 김성훈 전 장관 등이 창립멤버였다. 당시 서울대에는 ‘개척농사회’라는 조직도 있었는데, 농사단이 ‘운동파’였다면 심재익 전 잠사회장이 주도한 개척농사회는 ‘계몽파’ 성격이었다고.

“처음 농사단 단가였던 농민가는 시대상황에 따라 형태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지금도 4-H출신들이나 가농 출신들은 노래 원형을 부릅니다”. 원래 노래말에도 ‘농사형제 그립다’는 구절이 있어서 노래 제목도 ‘농사형제 그립다’였지만 보급 과정에서 ‘농민형제 그립다’로, 다시 ‘농민가’로 변화해 왔다. 엄혹한 군사정권을 거치고, 민주화 시대를 겪으며 농사단(農士團)의 농사(農士)가 농사(農事)로, 농민(農民)으로 변화된 것이다.

이경해 열사와 후계자 교육 앞장서기도

신구대학 교수이던 김 회장은 한국농축수산유통연구원이 ‘주간 농축수산유통정보’를 발행할 때인 89년까지 감사를 지내면서 신문와 관계를 맺었다. “당시 기자들이 처음 들어오면 내가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농업을 보는 시각을 가르쳤다”고 한다.

농업경영인과의 인연에 대해 물어보자 김 회장은 캐비닛에서 ‘한국농업의 발전과정과 향후 전개방향’이란 도표와 해설로 빼곡히 쓰인 A3 종이 한 장을 꺼낸다. “개방이 시작되던 89년 당시에는 고 이경해 열사가 2대 회장으로 있으면서 나와 함께 한농연을 조직화하고 운동성을 심는 문제를 고민했어요. 그때 전국단위 후계자 회장단 교육을 농협대학에서 열게 됐는데, 당시 정권이 내가 공식적으로 후계자들에게 강의하는 것을 막아서 휴식시간을 2시간이나 잡아 놓고 휴식시간에 비공식으로 강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A3 종이는 그 이전부터 계속 쓰고 있는 강의메모다.

주간 농축수산유통정보 시절, 신문사와 인연

그렇게 농민운동가로 신문사, 그리고 한농연과 관계를 맺는 한편 성남지역에서 빈민, 노동, 신협운동에도 관여하던 그는 89년 이른바 ‘민자통’(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사건으로 이적단체를 구성한 죄명에 의해 구속돼 21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대학생 생협을 이끌고 일본으로 시찰을 떠나려 할 때 잡아 가두더군요. 그때 서경원·임수경 방북, 평양축전 등이 있을 때라 그랬는지, 내가 학생들을 데리고 방북할거라 판단한 것 같아요. 안기부 잡혀가보니 후계자들에게 강의한 내용까지 다 녹음해서 선동죄, 보안법 등을 걸더라고요.(웃음)” 김 회장은 “원래 나만 가는게 아니고 다른 두분 교수와 셋이 가기로 했는데 그분들은 다른 일정 때문에 빠졌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김준기 회장은 이후 사면·복권되고, 나중 국가로부터 명예회복이 됐지만, 평생 농민과 사회 진보를 위해 걸어온 여정은 험난했다.

농민단체 어려워도 연합조직 건설 노력을

김 회장은 향후 농민운동의 방향과 관련, “정부는 농민이 주인이고 자신은 머슴이라면서 주인인 농민 얘기는 듣지 않고 결정하는, 입으로만 거버넌스를 하고 있다”면서 “이는 주인인 농민들이 단결하지 못하는데서 비롯된 측면도 있는 만큼 농민단체들이 어렵지만 연합조직을 지향하고 자주적이고 주체적으로 대응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호는 ‘일농’(一農)이다. 농촌에서 농부의 후손으로 태어나 농고와 농대를 나왔고, 그래서 오직 한 길, 농의 길을 걷겠다는 마음에서 일농을 호로 삼았다는 것이다. 70 평생을 농민을 위해 살아온 그의 인생을 함축하는 것 같다.

>>김준기 회장은  1938년 경북 포항 출신으로 서울농대를 나와 서울시농촌지도소에서 농촌지도사로 일한 뒤 신구대학 교수, 한국농업전문학교 초빙교수로 일했다. 전국대학 4H연구회연합회 초대 회장이었고 한국YMCA연맹 농촌사업위원장, 사월혁명회 공동의장을 지냈으며, 2002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 경기도지사 후보로 나와 선전하기도 했다. 성남지역사회발전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이상길leesg@agri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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