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희식의 엄마하고 나하고

부모은중경 독경이 계속되면서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에 대한 찬탄과 감사가 집안에 가득 찼다. 독기 어린 악담들이 잦아들더니 신음소리로 바뀌었다.

“내가 어지러바서 몬 살아. 너는 어디로 가고 엄노. 희식아. 오댄노 희식아.”

어머니 옆으로 가서 귀를 기울였다.

“내가 여기서 죽으믄 안 되는데, 우리 집으로 가서 죽어야 되는데. 내가 와 이락꼬. 어지러바서 몬 살것어.”

사기 향로에 강화 사자발쑥을 피웠다. 기진맥진 한 어머니는 모기소리 만하게 유언처럼 말씀을 계속했다.

“아래채 더금 우에 널빤지 해 놨다. 널 속에 넣을 것도 없다. 나 죽걸랑 가마니에 둘둘 말아서 가짐택꼴 밭가로 지고 가서 그냥 싸 질러삐라. 뫼똥이고 뭐고 맹글지 말고.”

알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등 중앙에 있는 심유혈을 손바닥으로 누르고 둥글게 문질렀다. 정신적인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안정되는 혈자리다. 어머니는 열세 살에 시집 왔더니 시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외로운 게 제일 무서운 거라면서 생기는 대로 많이만 낳으라고 해서 열둘이나 낳았는데 자식 많이 낳은 죄 밖에 없다면서 가쁜 숨을 몰아 쉬셨다.

가슴을 칼로 후벼파는 것 같다면서 뭇 놈들이 밟아서 간이 겉으로 나왔다고도 했다. 수염 난 놈들이 끌고 가려고 마당에 들어선다면서 소금을 뿌리라고 해서 굵은 소금을 한 바가지 가져와서 어머니 보는데서 마당에 뿌렸다.

나는 힘들어 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어머니가 악화되었다 호전되었다 하는 개념 자체를 넘어 서고자 했다. 어머니랑 같이 사는데 있어 진짜 악화는 몸이 부실해 지는데 있지 않고 주어진 상황을 비관하거나 원망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어떤 상황에서도 미움과 원망의 마음이 일지 않기를 바랐다. 어머니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는 순간을 살기를 바랐다.

어머니가 하도 심해서 아는 목사님에게 전화로 물어봤다. 이런 원한 섞인 푸념을 잘 들어주고 풀어내게 하는 게 좋은지 분위기를 바꿔서 그런 기분에서 빨리 벗어나게 하는 게 좋은지를.

목사님은 그랬다. 기도하라고. 나는 내 식으로 기도했다. 동학수련에서 배운 심고(心告)였다. 기도 중에서는 최고의 기도라고 여겨오던 터였다. ‘내가 지금 이러이러 합니다.’라고 하늘에 알리는 것이다. 나아가서 이렇게 하고자 하오니 하늘이 감응하옵기를 축원하는 것이 심고다.

이런 때에 <존엄을 지키는 돌봄> 월례 모임이 우리 집에서 열렸다. 내가 밖으로 나가기가 더 어려워지자 어머니 문안 인사 겸 모인 것인데 다들 업무에 종사한 지 반 년쯤 지나다보니 실무에도 밝아졌고 그만큼 고집도 생긴 모습이었다.

요양사 회원은 시설 운영자들은 날 도둑놈 심보가 있다고 성토했다. 만날 적자라고 하면서 두 시간씩 하루에 네 집을 다니라고 하니 이동시간 감안하면 밤까지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토요일에도 수혜자의 요청이 있으면 일을 나가라고 하는 눈치라고 불만이 대단했다.

반면에 시설의 운영자는 요양사들이 도대체 말들을 듣지 않고 자기 고집만 부려서 업무 조절하기가 쉽지가 않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 오는 요양사 선생님도 한 달 사이에 두 사람이 바뀌었다. 아무 연락도 없이 요양사가 오지 않아서 다음날 전화를 했더니 다른 사람이 갈 거라고 했다. 며칠 오더니만 어느 날은 한 사람들 더 데려왔다. 앞으로 이 사람이 올 거라고 인사를 시켰다. 신참내기 요양사를 바꿔 보내는 것이었다.

가만히 들어 봤더니 시설에서는 모든 요양사들에게 자동차를 몰고 다니라면서 운전면허를 언제까지 따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정작 자동차 운행비에 대해서는 전혀 지원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교통이 불편한 우리 집은 당연히 기피대상 1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세월 앞에서 사람만 늙어가는 게 아니라 유기체인 조직과 나라도 늙어가는 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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