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희식의 엄마하고 나하고

며칠을 꿈같이 보내고 생일여행에서 돌아오자 어머니는 거의 작년 가을 시절로 돌아가신 듯 했다. 팥 밭으로 고구마 밭으로 같이 트럭을 타고 오가면서 밭두렁을 타고 앉아 새참 함지를 무릎 사이에 끼고 서로 입에 음식을 넣어주며 가을햇살 만큼이나 정겹던 그때처럼.

이런 날들이 계속 될 줄 알았다.

봄날같이 화사해진 어머니의 일상에 어떤 재미를 더 해 드릴까 궁리를 하다가 방구석에 콩나물시루를 넣어드리기로 했다. 서울에서 여동생이 와서 끓인 콩나물국을 드시면서 콩나물 키워 잡수시던 이야기를 하실 때 이 생각을 했었다.

“집에서 콩나물 질가 먹을라카믄 우에는 불린 콩을 넣고 아래는 생콩을 넣으면 우에 꺼 먼저 뽑아 묵고 나믄 아래 끼 또 자라는고마.”

어머니 회고담 그대로 콩나물 시루 바닥에는 짚을 한 움큼 깔고 이틀 쯤 불린 콩을 넣기 전에 생콩을 몇 줌 먼저 넣었다.

어머니는 무척 기뻐 하셨다. 콩나물시루에 물 줘야 한다면서 새벽에도 일어 나셨고 밥상을 받으시면 “아. 참!” 하시면서 콩나물 물바가지부터 챙기곤 했었다. 이런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콩나물을 다 길러 먹고 나면 아궁이 가마솥에서 청국장 콩을 어머니랑 같이 삶을 생각을 했다. 그러나 손가락 마디만큼 자랐던 콩나물은 더 이상 크지 못했다. 어머니가 쓰러지신 것이다.

농협에 신청했던 퇴비가 온다기에 밭에 나가 한참을 기다리다가 다음날 온다는 연락에 헛걸음만 하고 집에 왔는데 어머니가 일어나지를 못하시는 것이었다. 부엌에서 과일을 몇 개 접시에 담아 방에 들어갔는데 가는 실눈만 뜨고는 입도 달싹이지 못했다. 눈물만 계속 흘러내렸다.

사흘을 이런 상태가 계속되었다. 어머니를 무릎에 기대게 하고 미음을 떠 넣어 드렸다. 2~3일을 주기로 좋았다 나빴다 했다. 그때마다 내 몸도 꼭 그렇게 따라 했다. 주변이 모두 평온하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눈에 띄게 어머니는 수척해지셨다.

가족들에게 연락을 할까 망설이기를 여러 날.

밥상을 들고 방에 들어서는데 난데없이 “네 놈이 뭐한데 또 오노?” 하시면서 밥상다리를 잡아 쥐고 마구 흔드셨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밥상이 엎어지면서 방바닥이 난장판이 되었다.

“이까짓거 처 멕이고 날 끌어내다 버릴라 카는 거 아이가? 내가 그거 모르까이!”

기진맥진 해 계시던 어머니 어디에서 저런 광기어린 공격성이 나오나 깜짝 놀랐다.

“내가 사흘을 굴멌다. 하루 이틀 안 먹어도 안 죽는다.”

나뒹굴어진 밥상을 맥을 놓고 바라보던 나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허겁지겁 오디오를 틀었다. 시디로 구워 놓은 ‘부모은중경’이라는 독경이었다. 어머니 은혜 크심을 뼈에 사무치게 노래하는 경전이다. 목탁소리와 함께 독경소리가 집안에 울리기 시작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왼쪽 어깨에 어버지를 모시고 오른쪽 어깨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피부가 닳아서 뼈에 이르고 뼈가 닳아서 골수에 미치도록 수미산을 백 천번 돌더라도 오히려 부모님의 은혜는 갚을 수가 없느니라.

가령 어떤 사람이 손에 잘 드는 칼을 가지고 부모님을 위하여 자기의 눈동자를 도려내어 부처님께 바치기를 백 천겁이 지나도록 하여도 오히려 부모님의 깊은 은혜를 깊을 수 없느니라.

가령 어떤 사람이 부모님을 위하여 아주 잘 드는 칼로 그의 심장과 간을 베어서 피가 흘러 땅을 적셔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고 괴로움을 참으며 백 천겁이 지난다 하더라도 오히려 부모님의 깊은 은혜는 갚을 수 없느니라....”

어머니의 쓰라린 시절들이 이 독경으로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기를 빌었다. 옆방에서 삼배를 올린 나는 무릎을 꿇은 채 입속으로 독경을 따라 했다.
한국농어민신문webmaster@agrinet.co.kr
저작권자 © 한국농어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