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길 전국사회부장

흔히들 우리 사회에는 배울 만한 인물이 없다고 한다. 존경이 사라져 가는 사회다. 나 역시 짧은 호흡에서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많은 이들이 내 인생에 영향을 미쳤고, 본보기가 되었다.  김성훈 상지대 총장도 그런 이들 중 한 분이다. 나는 그의 제자나 그런 위치는 아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관계를 맺어오면서 그로부터 많은 것을 얻고 있다. 후학들은 그를 ‘작은 거인, 행동하는 실학자’라고 불렀다. 아마도 작은 거인이란 비유는 크다고 할 수 없는 키에서 나온 이야기일 것이다. 행동하는 실학자란 말은 교수로서 연구실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농민의 벗으로, 농림부 장관으로, 대학 총장으로 예사롭지 않은 실천의 길을 걸어온 데서 붙인 표현일 터. 꽤나 어울리는 말이라 생각한다.        

나는 김 총장을 90년대 초 처음 만났다. 그는 UR 쌀 및 기초농산물 개방 저지 범국민비상대책회의에 이어 우리 쌀, 우리농업 지키기 범국민대책회의(186개 단체 참여) 상임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1980년 성천 류달영 선생, 김병태 선생(건국대 명예교수)과 더불어 한국농어민신문의 원형인 주간 ‘농산물유통정보’지를 창간한 주역이었고, 신문사의 이사이기도 했다. 나는 그를 만날 때마다 내심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해 했다. 사람 좋은 미소 속에 내재된 그의 날선 비판정신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UR 국면에서 거대한 연대투쟁으로 김영삼 정부의 협상 실패와 농업에 대한 범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대통령과 총리의 사과를 받아 내는 성과를 올렸다.

시민사회단체들의 사랑방이던 서울 안국동 느티나무카페에서 그가 기자회견을 하면 기사 제목과 리드가 바로 떠오를 만큼 설득력이 강했던 기억이 새롭다. 월드 와이드 웹이 채 구축되지도 않았던 시절, 협상 당사자인 정부나 언론조차도 잘 모르던 UR 정보를 인터넷과 미국 인맥을 통해 뽑아내 정부를 곤혹스럽게 하던 커뮤니케이션의 대가이기도 했다. 2004년 쌀 재협상, 지난해 광우병 쇠고기 파동에서 고비마다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농민·시민사회단체에게 큰 힘이 되었던 것도 그의 이런 능력에서 나온 게 아닌가 싶다. 신문사 시무식에 와서 기자들의 손을 꼭 쥐고 해주던 덕담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농업은 국민경제의 뿌리입니다. 여러분 전문기자들이 아니면 누가 농민을 지키겠습니까?” 난 그때 김성훈 ‘이사님’이 해 주시던 그 말에 ‘혹해서 넘어간’ 새내기 기자였다.

가끔씩 나는 그의 말을 다시 보면서 ‘인생’에 대해 생각한다. “인생은 1모작만이 아니고 2모작, 3모작도 가능하다”는 그다. 교수이자 농민운동가로, 국민의 정부 농림부 장관으로 살았던 인생이 1모작이라면 경실련 대표로 활동하며 상지대 총장으로 원주의 지방대학 이름을 반열에 올린 것이 2모작이었다. 그는 이제 길거리의 대안운동은 열혈 시민단체에게 맡기고 유기농 운동의 대부 원경선 선생의 뒤를 이어 11일 환경정의 2대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3모작 인생을 시작하고 있다.

인생의 무게가 늘어갈수록 참으로 그림을 잘 그리는 그다. 아마도 그건 철학이 담보된 방대한 지식, 한시도 일에서 눈을 떼지 않는 부지런함, 자기 행동에 의미를 담아내는 통찰력, 그리고 타고난 커뮤니케이션 능력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시대의 온갖 풍상에서 그를 지켜낸 것은 지도자로서 인간에 대한 사랑과 결벽에 가까운 청렴함도 중요한 요소다. 오는 26일 오후 3시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리는 그의 칼럼집 ‘더 먹고 싶을 때 그만두거라’ 출판기념회가 기다려진다.
이상길leesg@agrinet.co.kr
저작권자 © 한국농어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