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희식의 엄마하고 나하고

갑판 2층에 올라 갈 때는 어느 분이건 눈짓만으로도 알아채고 휠체어를 들어 주었다. 유람선이 배에 탄 사람들을 여유롭게 만드는 것 같았다. 누구의 발걸음도 급하지 않았고 옆 사람을 돌아보고 걸음 속도를 줄이거나 몸을 피해 양보하게 했다. 흰 갈매기들이 우리 배를 따라왔다. 작은 섬들이 뒤로 휙휙 지나가고 저 멀리로 섬과 섬을 잇다가 육지로 연결되는 현수교가 장관이었다.

“저기 다리가?  먹꼬?”

“예. 다리네요. 다리 한번 참 기네요.”

“조선사람 재주 좋아. 일본사람 재주 조타캐도 인자는 조선사람 몬 따라 오제. 바다위에 누가 다리 놀끼락꼬 알았으끼고.”

“일본사람 재주 좋았어요?”

“일본사람들이 바다 밑에도 굴을 뚫고 하늘 위로도 다리 놓고 안 그랬나.”

“일본사람도 바다 위에는 다리 못 놨는가 봐요?”

“몬 놨제. 인자 조선사람이 더 재주 좋아.”

열여섯 어린 나이로 일본에 건너갔던 아버지가 귀국해서 결혼 한 다음 다시 어머니까지 데리고 일본으로 들어갔던 이야기를 꺼내셨다. 집 밖에 나가 본적이 없다던 어머니가 일본 가서 사셨던 기억을 생생하게 풀어 놓으시는 것이었다.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보다 훨씬 풍부하고 사실적인 이야기가 실타래처럼 흘러나왔다.

어머니 기억창고의 자물쇠가 풀린 듯 했다. 하나도 손실되지 않은 70여 년 전 일들이 그림처럼 어머니 입으로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전두엽의 뇌세포가 망실되어 가면서 기억이 산산조각 나버리는 치매의 임상증상으로 볼 때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2층 갑판의 세찬 바람도 어머니의 신명을 부채질 했다. 너무 달뜬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몸에 해로울까 걱정이었지만 기력이 쇠잔해지는 정도보다 보충되는 기운이 이에 못지 않아서 어머니를 만류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버스는 어둠이 깔리는 고속도로를 질주했고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동네 어른들은 관광버스 통로에서 춤을 추었다. 어느새 어머니가 손뼉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오전에는 “미친것들”이라며 눈을 흘기셨었는데 완전히 백 팔십 도 달라지신 것이다.

다음날은 어머니도 그랬지만 나도 몸살이 났다. 유쾌한 몸살이었다. 몸은 무겁고 나른하지만 기분은 나긋나긋했다. 관광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오는 트럭 안에서 어머니에게 말을 걸었었다.

“어무이. 인자 우리 다음에는 오대로 놀러 갈까요?”

“또 놀러간다 카더나?”

“동네 사람 가건 안 가건 우리끼리 가요.”

“오대로 각꼬?”

“어무이. 우리 비행기 타고 제주도 가 볼까요?”

“비행기 탔다가 떨어지면 오짤락꼬?”

“안 떨어져요. 제가 어무이 꽉 붙잡으믄 안 떨어져요.”

“그라믄 몰라. 비행기도 타고 제주도 한번 가 복까?”

몸살로 이삼일 바깥일은 못하고 방 안에서 영상 편집작업을 했다. 봄놀이 전 과정을 틈틈이 캠코더로 찍은 테이프가 세 개나 되었다. 스틸 사진도 활용해서 8분정도로 편집을 하고 디브이디로 변환해서 시디에 구웠다.

이틀 후엔가 이장 집에 가서 이걸 틀었다. 가을 야유회 때는 동네 모든 노인네들이 다 참석 할 수 있도록 젊은 사람들이 일대일로 몸이 좀 불편한 노인들과 짝을 만들어 가자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은 다른 젊은이는 그동안 동네 어른들에게 우리 젊은 사람들이 좀 무심했던 것 같다면서 좋은 생각이라고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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