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희식의 엄마하고 나하고

‘백운역 할아버지’로 상징되는 어머니의 이상 징후가 어떨 때 나타나는지를 확연히 보여주는 기회였다.

2008년 1월 말 경. 수 삼년 만에 찾아 온 몸살로 내가 몹시 아프기 시작했을 때였다. 어머니 낌새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백운역 할아버지’가 근 5개월 만에 처음으로 어머니 입길에 오르셨다.

어머니에게서 ‘백운역 할아버지’는 고착화된 어떤 상징이다. 풀리지 않는 비원의 고갱이다. 근 5개월 여 동안 ‘백운역 할아버지’가 단 한 번도 어머니 입길에 오르지 않았다는 것은 비극의 종말이고 새로운 삶의 도약이었다.

잊혀졌으려니 싶었던 ‘백운역 할아버지’가 어머니 입에서 환생했다. 그 이틀 전에 이미 조짐이 있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않으시고 입맛을 잃고 짜증만 내셨다. 몸살로 앓아 누운 내가 목욕탕에 반신욕을 다녀온다든가, 숲으로 들어가 진종일 삼림욕을 한다든가, 작은 뒷방에 들어가 발가벗고 풍욕과 좌선으로 고통의 시간을 넘어서고 겨우 어머니 앞에 나타나면 어머니는 “너 어데 갔다 와노?”라며 극도의 불안 증세를 보이셨다.

심한 몸살로 내 몸 하나 간수하기 힘들었던 한 주 동안 어머니는 내가 안 보이는 모든 순간을 공포와 절망으로 보냈는지도 모른다. 공포와 절망은 아니더라도 불안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시간이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아침부터 한껏 쏘아 붙이시더니 오전 내내 돌아누워 끙끙 앓더니만 나를 불러 들였다.

“나 좀 일바씨라”

굳이 나를 불러서 일으켜 앉으라고 하는 것은 뭔가 큰 결단을 내 보이기 전의 징조임에 틀림이 없었다.

“가자. 오늘 서울 순이네 가야겠다.”

내가 뭐라 하면 막무가내로 쏘아 붙일 기세였다.

“백운역 할아버지한테 가 보자. 내가 걸어 댕기도 못하고 누워만 있기 주이난다.”

어머니는 주섬주섬 챙겨 가지고 당장 나설 채비를 하셨다. 눈은 강렬한 광채를 띠셨다. 광기라고 하는 게 옳아 보였다. 그런 눈빛이 되는 때가 많다. 광기로 눈빛이 번득일 때를 눈여겨 잘 살펴보면 온 몸에서 동일한 기운이 풍겨 남을 알아 챌 수 있다. 이럴 때는 발산을 잘 도와야 한다.

나는 어머니를 차에 모시고 정처 없이 떠돌았다. 아랫집 소 막사를 지나고 사과농장을 지나 우리 논이 있는 께로 오면서 들판엔 눈들이 듬성듬성했다. 우리 집에는 새하얀 눈들로 뒤덮여 있었는데 아랫녘으로 내려올수록 봄기운이 역력했다.

차창을 열고 바람을 쐬었다. 어머니의 망상과 집착이 날아가라고 차창을 슬슬 내렸다. 어머니는 시원하다며 벅찬 숨을 내 쉬셨다.

장계면과 접경인 계북면 길을 오르내렸다. 같은 길을 오르내리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 논두렁 샛길로 들어가기도 했다. 어머니 주장에 따라 서울 사는 내 여동생 뒷집에 사신다는 ‘백운역 할아버지’네 집에 가는 것이기 때문에 산 넘고 물 건너는 상황을 생생하게 연출했다. 그러나 ‘백운역 할아버지’를 향한 어머니 마음을 돌려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내가 근 1주일을 앓으면서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동안 어머니 가슴에 맺힌 소외와 버림의 불안을 떨쳐 버리기에는 한 두 시간의 자동차 여행으로는 부족했다. 잠시라도 차를 세우고 딴전을 피우면 어머니는 가차 없이 독촉을 하셨다.

“어서 가! 꿈지락 대지 말고 가자. 너는 나 데려다 주고 돌아 와야 될 낀데 어서 어서 가자”

그러면 나는 차를 돌려서 막막하고 고적한 산골길 국도를 질주했다. 갈 곳은 보이지 않았고 시간은 내 편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오직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하는 한 가지는 명백했다. 상황을 주도할 것. 어머니의 요구에 이끌리지 말 것. 앞장서서 어머니 요구를 견인하면서 방향을 틀어 버릴 것. 이것만은 명백했다. 나는 그렇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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