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경 - 유구읍 “밥 좀 주세요” 원래가 무뚝뚝한 성격의 남편이 “밥줘” 또는 “밥먹자”보다 조금은 긴말을 쓴다는 것은 기분이 좋다는 의미도 된다. 안 그래도 반찬 걱정하던 차에 기회는 이때다 싶어 “우리 반찬도 없는데 비벼 먹을까?” 약간의 콧소리를 섞어 말해본다. “비빈다고” “어디 맛있게 한 번 비벼봐” 맛있게라고 강조한 남편의 말은 냉장고에 넣어두고 대신 냉장고 구석구석의 반찬을 모두 꺼내 비빔밥을 만들었다. 커다란 사기그릇에 수저를 푹 꽂으며 남편이 하는 말, “그러니까 이게 일명 냉장고 청소용 희생 비빔밥이라는 거네”란다. “어머어쩜 자기는 그렇게 머리가 반짝이냐! 비빔밥 이름한번 끝내준다” 나의 애교 섞인 얼렁뚱땅에 묵묵히 밥을 먹던 남편이 갑자기 그릇 가운데 선을 그으며 밥을 나누고 있다. “왜” 의아해하는 나에게 “네가 많이 비볐으니까 네가 다 먹어” 3분의1을 자기 쪽으로 열심히 긁어모으는 남편. 그 순간 난 남편의 모습에서, 코흘리개 어린 아이 내 남동생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 어릴 적엔 어느 집이나 군것질거리가 흔치 않았다. 한참 크기 시작하던 우리 5남매는 무엇이든 맛있었다. 엄마는 행여 자식들이 배곯을까 봄이면 쑥 뜯어다 쑥개떡 쪄주시고, 여름이 다가도록 감자 긁어 쪄주시고, 늦가을 서리맞은 호박으로 호박죽도 쑤어 주시고, 한겨울이면 가마솥에 노릇노릇 고구마를 쪄서 시원한 동치미 한보시기랑 먹이곤 하셨다. 어느 여름날, 어머니가 안 계신 날이었다. 언니와 난 삶아서 부엌 살강위에 올려놓은 보리밥을 한 양동 욕심껏 담고, 우물가 함지, 머리엔 조그만 돌멩이를 이고 앉은 항아리에서 시큼한 열무김치도 넣고, 참기름도 몰래 넣고, 장독대에 흰 망사 천으로 예쁘게 싸놓은 고추장 항아리에서 고추장도 퍼 넣고 해서 우리 5남매는 사정없이 내리쬐는 7월의 태양아래 더운 줄도 모르고, 매운 줄도 모르고, 마냥 앉아서 퍼먹던 생각이 난다. 밥이 조금 남으면 양푼 바닥을 박박 긁어가며 줄을 긋고 누가 한 수저라도 더 먹을세라 열심히도 퍼 먹었었다. 밥 먹는 재미에 항아리 뚜껑닫는 것도 잊어버려 밤새 내린 무심한 소나기에 고추장 항아리 다 버렸다고 엄마에게 꾸중도 들었지만, 우리 5남매는 그때의 간보리 비빔밥을 지금도 이야기하며 엄마가 꾸중하시던 모습을 흉내내며 한바탕 웃곤 한다.그런데, 요즘은 더 먹겠다고 줄을 긋는 아이도 형제도 없지만 밥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밥보다 빵, 라면을 좋아하고, 햄버거, 피자를 더 즐기는 우리 아이들도 걱정이지만 어른들의 책임도 있다고 본다. 농민의 목을 조여오는 수입개방과 수입품의 홍수 속에서 내것, 우리 것을 지킨다는 마음과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잘 포장된 쉬운 길이 아닌, 웅덩이와 늪이 있는 길일지라도 어른들이 먼저 가야 한다.아이들에게 두고 두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정겨운 추억을 만들어 주는 일도 우리 어른들의 몫이 아닐까? 한여름 커다란 느티나무의 시원한 그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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