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박한 세계 농민의 현실, 죽음으로 알리고 ‘먼길’

2003년 9월 11일 새벽,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을 맞아 부모형제를 찾아온 대개의 농민자녀들이 고향의 따뜻한 품을 느끼며 고이 잠들었을 그 시각. 이역만리 멕시코 칸쿤 땅에서 비보가 날아들었다. 전북도의회 의원을 지낸 바 있는 이경해 한농연 전 회장(당시 56세)이 “나는 염려마라, 열심히 투쟁하라”는 유언을 남긴 채 자결했다는 것이다. ‘자유무역을 통한 인류번영’이라는 가면 뒤에 전 세계 가족농과 중·소농의 삶을 핍박해온 WTO(세계무역기구)의 본질을 폭로하기 위해 한 농민지도자가 죽음으로 항거한 것이다. 벌써 1년, ‘몸은 먼저 가지만 정신은 지켜볼 것’이라던 고인은 지난 1년 동안 무엇을 지켜봤을까. 이경해 열사가 국내외 농민운동에 미친 영향과 남아 있는 과제를 살펴봤다.

이경해 열사가 제5차 WTO각료회의 개막식이 열린 2003년 9월 11일, '국제농민 공동행동의 날' 시위를 주도하고 있다. 자결 직전의 모습.

#칸쿤 도착에서 자결까지이경해 열사는 한국시각 7일(현지시각 6일) 멕시코 칸쿤에 도착, 한농연회장단을 비롯해 ‘WTO저지를 위한 한국민중투쟁단’의 숙소인 ‘아쿠아마리아나 비치호텔’에 8일 합류했다. 그리고 WTO 제5차 각료회의 개막날인 11일, 전 세계 70여개국에서 1만여명이 참석한 ‘국제농민 공동행동의 날’ 집회에 참석한다. 고인은 이날 ‘WTO Kills, Farmers(WTO가 농민들을 죽인다)’라는 문구가 쓰인 팻말을 앞뒤로 걸고 최선두에서 시위대를 진두지휘했다. 그러다 11일 새벽 2시 50분경, 서정의 한농연회장과 함께 ‘WTO/DDA협상에서 농업을 제외시켜라’는 현수막을 들고 2m50cm 높이의 철책 벽에 오른 그는 미리 준비한 흉기를 꺼내 가슴을 찌른다.“나는 염려마라, 열심히 투쟁하라”는 비장한 유언을 남긴 채.#더욱 거세지는 개방압력이경해 열사의 희생은 15일, 제5차 WTO 각료회의 결렬이라는 결실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경해 열사의 죽음만으로는 모자람일까. 열사의 죽음이후 WTO의 농업개방 시나리오나 우리정부의 개방농정은 변함없이 진행되고 있다. 우선 WTO일반이사회는 지난 8월 1일 DDA(도하개발아젠다)농업협상의 세부원칙(Modality)마련을 위한 기본골격(Framework)에 합의했다. 구체적인 수치 등 세부쟁점은 추후 논의과제로 남겨뒀지만 높은 관세는 더 많이 감축하고, 무역 왜곡적 국내보조 등도 대폭 감축토록 해 놓았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는 UR협상 때 보다 더 큰 폭으로 농산물시장을 열어줘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쌀 재협상도 진행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쌀 관세화유예조치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 중국 등 9개국과 협상을 벌이고 있다. 협상참가국들은 관세화유예의 대가로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하는 쌀의 양을 대폭 늘리거나 국영무역형태인 수입쌀에 대해 민간참여를 허용할 것 등을 요구하고 있다. FTA(자유무역협정)도 속도를 내고 있다. 우리 정부는 올 4월 1일부터 칠레와 FTA를 발효한 데 이어 2004년 싱가폴, 2005년 일본, 2012년 아세안 등과의 FTA를 체결할 계획이다.#싸움은 계속된다물론 정부는 선 대책, 후 개방을 명목으로 119조원을 투·융자하는 농업·농촌종합대책을 발표해 놓고 있다. 그러나 농민들이 바라는 것은 농산물개방에 대비하겠다는 판에 박힌 약속이 아니다. 우선은 미국이나 농산물 수출국들의 압력에 ‘개방은 대세’라며 굴복할 것이 아니라 이경해 열사가 죽음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농업과 농촌, 농민들의 절박한 현실을 내세워 당당히 맞서라는 것이다. 또한 규모화, 전문화를 명분으로 대다수 가족농과 고령농가들을 퇴출시키는 정책이 아닌, WTO나 FTA보다 더 큰 압력이 닥쳐와도 농업·농촌·농민들을 지키고 보호하겠다는 정부의 확고한 정책부터 제시하라는 것이다.이경해 열사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열사의 죽음은 우리 농업과 농촌, 농민의 현실, 나아가 세계농민들이 처해 있는 절박한 현실에 경종을 울렸다. 그렇기 때문에 열사의 농업과 농촌, 농민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희생을 헛되게 해서는 안된다. 이경해 열사의 뜻을 받들어 민족의 생명 줄인 농업을 지키고 농촌회생을 위한 해법을 반드시 마련해야 한다.특히 350만 농민들과 농민단체, 시민·사회단체를 비롯한 각계 인사가 참여해 설립한 ‘이경해 열사 기념사업회’를 농민운동의 정신적 구심체로 자리매김토록 해야 한다. 농업과 농촌을 위해 봉사와 희생, 열정의 삶을 살다간 열사의 정신을 이어가고 이경해라는 이름이 한국농민운동의 상징으로, 전 세계 농민들과 후세 농민들에게 아로새겨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 곁에 남겨진 몫이다.◇서정의 한농연 회장 “전 농민 일치단결…열사 뜻 이어가야”“이경해 열사가 목숨을 던지면서 후배들에게 전하려했던 것은 다름 아닌 농민들이 일치단결해 이 나라 농업과 농촌을 꼭 지켜달라는 당부였던 것 같습니다.”오는 9일부터 11일까지 ‘우리 쌀 사수와 협동조합 개혁을 위한 350만 농민투쟁선포대회’ 및 ‘이경해 열사 1주기 추모식’을 주도하고 있는 서정의 한농연회장(이경해열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의 다짐이다.“이경해 열사는 WTO가 추구하는 자유무역체제는 결국, 산업화된 다국적 곡물기업의 이익을 위해 수천년 동안 지속해온 각국의 가족농과 영세농들을 희생시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죽음을 통해 전 세계에 고발했다”는 서 회장은 농업과 농촌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 이경해 열사의 업적과 희생정신이 전 세계 농민들이 하나로 뭉치는 계기가 되주길 희망했다. 그는 “이경해 열사의 항거로 WTO 제5차 각료회의가 무산된 것은 거대한 다국적 기업의 횡포에 맞서는 것은 결국 전 세계의 가족농, 영세농민들의 일치단결된 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며 “농민단체와 농민지도자들이 사소한 견해 차이를 극복하고 서로 단결해 농업과 농촌, 농민들을 위한 각종 대책을 마련하는데 한 목소리를 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는 심정을 밝혔다.
서상현seosh@agri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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