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고과잉' 강조하다 감산으로... 쌀시장 개방대비 '포석' 의혹양정은 복잡하다. 그러나 우루과이라운드(UR) 타결 이후 정부의 양곡정책 기조는 일관된 방향이 있다. 그것은 쌀 자급기반 확충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면서도 WTO 규정합치를 핑계로 정부수매를 축소하고, 수매가를 가능한 억제하며, 쌀 문제를 시장에 맡기려는 것이다. 지난달 29일 발표된 ‘쌀 수급 및 가격안정대책’, 이달 4일 나온 ‘쌀산업발전종합대책’에도 이런 기조는 관철된다.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올바른 방향인가.* 표류하는 양정 정부 수립 이래, 아니 그 이전부터 우리나라의 양정은 늘 부족한 식량을 자급하는게 최우선의 과제였다. 쌀 가격도 농민들의 기대에는 항상 못미쳤지만, 그나마 안정적인 소득원이 되어 준게 사실이다. 현재 농업소득중 쌀소득의 비중이 52%를 차지하는 것은 이런 판단의 방증이다. 쌀 소득의 안정은 기본적으로 정부가 계속적인 수매정책의 후퇴에도 불구하고 UR 이전까지는 수매를 총괄하면서 시장재고를 일정정도 격리시켜 왔고, 주기적인 흉작으로 재고가 적었기 때문이다. 93~95년 흉작으로 인한 재고 위기에 따라 나온 정부의 정책이 96년의 ‘쌀산업 발전 종합대책’. 기금까지 양정의 골간이 돼온 이 대책의 정책목표는 쌀 자급기반의 확충과 쌀산업 경쟁력 강화→2004년 생산단수 480kg, 재배면적 92만ha 확보, 약정수매제 도입이었다. 결국 증산과 생산비 인하, 가격인하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이런 양정기조로 일단 증산에는 성공했다. 쌀의 10a당 수량은 95년 445kg에서 2000년 497kg으로 크게 늘었다. 정부가 목표한 2004년 480kg은 이미 98년 482kg을 달성하면서 일찌감치 돌파했다. 이는 분명 농민들의 노력과 관련공무원들이 합심해 일궈낸 성과다.그러나 생산비 인하를 통한 가격인하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높은 인구밀도, 좁은 땅덩어리 때문에 미국·호주보다 땅값이 50배 높아 생산비가 3~5배 비싼데다 경작규모도 1ha 전후의 영세소농구조인 것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97년말 터진 IMF는 각종 투입재 가격을 높였다. 10a당 생산비는 WTO 출범전인 94년 40만502원에서 2000년 53만7833원으로 34%나 상승했다. 생산비 절감을 통한 국제경쟁력 확보라는 목표는 허구였음이 드러난 것이다. * 과잉 재고라니?정부와 농협은 재고가 과잉인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정부는 현행 수매제도가 과잉을 부르고 있다며 약정수매를 폐지·축소하려 하고, 휴경 등 생산조정까지 내세운다. 반면 RPC를 운영하는 농협측은 수매를 떠안지 않기 위해, 당장의 적자를 운영자금 지원으로 보전하기 위해 재고문제를 부각시킨다. 정부는 올 재고전망을 989만석으로, 농협중앙회는 1118만석으로 본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런 재고과잉 논리에 수긍하지 않는다. 당장 올해까지도 증산위주의 양정을 펴던 정부가 갑자기 쌀이 남는다고 감산 운운하는 것은 2004년 재협상에서 쌀시장을 대폭 개방하려는 수순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 논거를 보자. 우선 올해 쌀 생산예상량은 3650만석은 지난 90년 4095만석보다도 적다. 또 96~2000년까지 총생산량 2582만8000톤과 소비량 2580만1000톤을 비교하면 초과분은 2만7000톤에 불과하다. 반면 지난 5년간 수입된 의무수입(최소시장접근, MMA)쌀은 39만3000톤으로 95년 이월된 65만9000톤을 합치면 2000년 재고량 107만9천톤과 거의 일치하게 된다. 만약 쌀이 수입되지 않았다면 2000년 재고율은 13%에 머물러 세계식량농업기구(FAO) 적정재고율 17~18%에도 훨씬 못미치게 된다. 쌀 재고 증가는 국내 생산이 늘어서라기 보다는 MMA쌀 수입증가 때문이다. 특히 지난 91년에는 정부재고 141만석 등 전체재고가 1487만석에 달하는 등 89~93년까지 5년간 재고량이 1000만석을 상회하다가 93~95년 흉작으로 재고가 겨우 169만석으로 떨어져 식량위기를 겪기도 했다. 이런 것을 고려하면 WTO 쌀 재협상이나 농협의 이해관계 때문에 부풀려지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또한 논면적이 남쪽의 절반에 불과하고 식량부족이 극심한 북한의 실정을 감안하면 결코 과잉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박정근 전북대교수는 “식량 자급률이 30%를 밑도는 식량부족국이 식량이 남아돌아 수출해야 하는 미국이나 소득문제를 해결한 일본에서 쓰는 휴경 등 생산조정을 한다는 것은 농업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 직불제 확대 '글쎄...'정부는 내년부터 수매가를 안정화하는 대신 논농업직불제 단가를 소득안정 수준으로 내실화하고 나아가 소득안정 직불제로 개편한다고 한다. 그러나 정부는 수매가 안정화는 2002년으로 적시하고는 직불제나 보조금은 시기와 수준을 약속하지 않고 있다. 당연히 농민들이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실제 정부는 UR 협정에 따라 쌀수매보조금을 줄여야 한다고 하면서도 UR 협정이 허용하는 직접지불제에는 인색하기 그지 없다. 쌀의 보조금(AMS) 감축액은 매년 7백50억원씩 10년간 7495억원이다. 그러나 단순히 연간 750억원씩 7495억원이 아니라, 95년 당시 2조원 이상씩 받던 보조금 혜택을 10년간 줄어드는 것을 누적개념으로 보면 무려 4조1250억원을 놓치게 된다. 그런데도 정부는 WTO 출범 이후 5년이나 지난 올해서야 처음으로 ha당 20~25만원씩 2073억원만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내년 예산에서는 국회 농림해양수산위가 권고한 ha당 50만원으로 인상하는 예산이 삭감위기에 처해 있다. * 위험한 수매제 개편정부는 이번에도 그동안의 주장처럼 WTO협정에 따라 가격지지정책인 정부수매는 계속 축소해야 하기 때문에 공공비축제 도입 등 수매제도 개편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때 수매가, 수매량의 국회 동의 등 현행 약정수매제를 공공비축제로 바꾸는 내용으로 양곡관리법을 개정한다는 것. 그러나 유사시를 대비한 공공비축은 필요하지만, 정부가 밝힌 공공비축은 가격지지 성격의 현행 추곡수매제도와는 달리 시가로 매입했다 시가로 방출하는 것이어서 2004년 이후 정부가 가격보장에서 손을 떼겠다는 뜻이다. 더구나 정부는 공공비축제도외에는 별다른 정부수매방법을 제시하지 않고 있어 현행 추곡수매를 폐지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나아가 쌀가격 하락에 대비한 미작경영안정제도를 적극 도입한다고 함으로써 쌀 가격하락을 그냥 놓아두겠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다. 이는 수매가 동결 시사, RPC 수탁수매, 농협 시가매입·시가방출제도 도입과 맞물려 정부가 WTO 쌀 차기협상에서 쌀시장을 대폭 개방하고 공공비축 외에는 쌀 수매에서 손을 떼겠다는 얘기로 들린다.* 올바른 대책은▲단기대책=윤석원 중앙대 교수는 “정부가 공매계획을 취소하고 올해산 수매곡은 시장과 격리하며, 고미나 보관 2년된 고고미는 식용 이외의 용도로 사용하는 한편, MMA 수입쌀은 가공업체에 싼값으로 판매해야 한다”며 과잉물량의 시장격리를 제시했다. 또한 인도적인 차원에서 남북협력기금 등을 활용해 매년 일정량을 북한에 지원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정근 전북대 교수는 “소비증대를 위해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와 결식아동에 대한 지원, 급식확대, 대북지원 등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한농연과 전농 등 농민단체들도 RPC수탁판매·농협 시가매입·시가방출을 비난하면서 재고물량의 격리를 위해 대북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중장기대책=농민단체들은 정부가 농업·농촌기본법에 구체적인 쌀자급계획을 명시하고 남북한을 포괄하는 한반도 전체의 생산 및 수급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농림부는 “2010년까지 남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 식량수급 전망, 소요 경지면적 예측, 농업생산성 증대목표 등을 담은 ‘신한반도 농정지표’를 구상하겠다”고 밝힌바 있어 이행여부가 주목된다. 나아가 쌀뿐만 아니라 99년 현재 겨우 29.4%에 불과한 식량자급도를 높이기 위한 양곡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10년에 한번씩 오는 풍흉주기를 감안하고 시장재고 축소, 계절진폭 보장, RPC 민간유통기능 활성화를 위해 30% 정도의 공공비축물량을 시장에서 격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비축물량은 식량안보용의 경우 FAO 기준재고율 17%에 가격안정용을 더하고, 나머지는 북한지원 등을 고려해 총 30%는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부가 농협이나 시장에 떠 넘기려 하지 말고 실질적인 수매가와 수매량을 보장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농민들은 요구하고 있다. 아울러 정부는 논농업직불제의 상향조정을 통한 현실화, 소득안정을 위한 각종 직불제를 즉각 시행해야만 양정을 신뢰할 수 있다는 여론이다.
이상길leesg@agri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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