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길 논설위원·농정전문기자

정부가 올해 물가안정을 이유로 과일, 축산물, 채소 등에 대해 역대 최대 규모의 관세 면제, 관세 인하 수입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생산비 폭등과 소득감소, 기후재난에 무방비로 노출돼온 농민들은 새해 벽두부터 역대 급의 날벼락을 맞고 말았다.

정부는 지난 4일 ‘2024년 경제정책 방향’을 통해 물가안정을 위해 수입과일, 축산물, 채소 등에 대해 할당관세 적용으로 대대적인 관세 인하, 면제 조치를 취하고 TRQ(저율관세할당물량)도 적기에 도입하기로 했다. 관세 면제와 인하로 인한 관세 지원액만 1351억원에 달하는 역대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그러나 TRQ와 할당관세의 남발은 제도의 취지에도 맞지 않고, 물가안정 효과는커녕 농민만 피해를 보게 된다. 무엇이 문제인가?

저율관세할당(TRQ)과 할당관세는 그 배경이 다르다. TRQ(Tariff Rate Quota, 저율관세쿼터, 저율관세할당)는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정한 것이다. 이는 일정량(시장접근물량)까지는 저율관세를, 이를 초과하는 물량에는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는 제도다.

이는 수출국에게 수출기회를 주면서도 수입량의 증가로 인한 국내 생산자 피해를 줄이기 위해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에서 타협한 이중관세 제도다. 현재 TRQ는 세계무역기구(WTO)와 자유무역협정(FTA)에서 정한 63품목을 대상으로 운영되는데, 시장접근물량 내에서는 무관세나 5~50%의 저율관세다.

이와는 달리 할당관세는 국내법인 관세법이 정한 품목의 관세를 기본관세율의 40%포인트 범위에서 가감하는 탄력관세다. 그 목적은 △원활한 물자수급 또는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특정물품 수입 촉진 △ 수입가격이 급등한 물품 또는 이를 원재료로 한 제품의 국내가격 안정 등이다.

문제는 윤석열 정부 들어 TRQ와 할당관세를 크게 확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TRQ는 정해진 물량 내에서 운영해야 국내 농가 피해를 방지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는 예정된 물량보다 TRQ를 추가로 증량해 고율관세로 인한 농업보호 효과를 스스로 무력화하고, 할당관세도 계속 늘려가는 중이다. 정상적인 고율관세를 피해 TRQ나 할당관세를 늘리는 것은 농민에겐 재앙이고, 수입으로 이익을 보는 업자들에겐 특혜가 될 수 있다.

이번 발표를 보면 마치 농산물이 물가 상승 주범이고, 관세를 없애 수입량을 늘리면 물가가 안정될 것 같은 논리다. 그러나 농산물이 물가 상승의 주범이란 인식은 틀렸다.

소비자물가지수 가중치(1000분위 기준)를 보면 쌀은 5.5, 배추 1.5, 사과 2.6에 불과해 실제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물가대책이 효과를 보려면 전세 54, 월세 44.3, 휴대전화료 31.2, 공동주택관리비 21, 휘발유 20.8, 전기료 15.5, 고등학생학원비 12.8, 도시가스비 12.7, 구내식당비 11.9 등 가중치가 큰 것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애먼 농산물을 잡는 셈이다.

농산물 할당관세를 늘려 소비자 후생을 증대시킨다는 것도 의문이다. 축산물과 수입과일류는 일부 기업이 독과점을 형성한 시장이어서 관세를 깎아 준다고 이들이 가격을 내려주는 것도 아니다. 관세 특혜는 결국 일부 자본에게 나라의 세금을 퍼주고 ‘횡재’를 안겨주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기후, 병충해 등의 영향을 받고 생산의 계절성이 있는 농산물은 그 특성상 가격이 올랐다고 해서 농민이 이익을 보는 구조가 아니다. 재해로 인해 수확이 줄면 소득은 감소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사과의 경우 지난해 기후재해, 병충해로 농사를 망쳤고, 소득이 크게 줄어든 농가가 많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 일각과 일부 언론에서는 사과 값이 물가상승의 주범인 양 악마화하더니 이제 사과 수입 설까지 흘린다. 사과는 세계무역기구(WTO)의 동식물 위생·검역(SPS) 협정에 따라 수입이 금지된 품목이다. 병해충 검역 문제로 현재 수입이 불가능한 사과를 어떻게 들여온다는 것인지? 이 참에 미국산 사과에 대한 검역을 쉽게 풀어주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본래 세금은 헌법 상 조세법률주의에 따라 법에서 정한 종목과 세율로만 거둬야 한다. 다만 상황이 긴박할 때를 대비, 세율 변경의 권한을 정부에게 위임한 탄력관세의 하나가 할당관세다. 당연히 이는 엄격한 기준에 따라 적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물가안정을 빌미로 열대과일에 할당관세를 발동하는 것이 과연 긴박한 상황 때문인가?

할당관세 남발은 국내 농산물 가격의 하락→ 농가소득 감소→생산기반 악화로 인한 생산량 감소→가격 상승→할당관세 확대라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이런 식의 할당관세 운영은 결국 농업을 모든 품목에 걸쳐 파괴하고 식량의 수입의존을 심화시켜 국민을 식량안보 위협에 노출시킬 것이다.

정부는 농산물에 대한 TRQ, 할당관세 남발을 중단하고, 정말 긴급한 상황에만 적용해야 한다. 특히 TRQ, 할당관세 확대는 농민에게 피해를 주는 만큼, 당연히 농민의 동의와 피해보상을 제도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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