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세컨드 홈과 스마트농업을 이야기하더라도 지금 농촌을 지켜내는 일이 뒷전으로 밀려날 수는 없다. 곡물자급률 20%를 지키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수농가, 채소농가마저 무너져 버린다면 식량주권은커녕 농촌소멸의 길에 더 가까이 갈 것이다.

ㅣ윤병선 건국대 교수

나라 안팎에서 발생한 이런저런 사건 때문에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새해를 맞이했다. 새해의 희망을 언급하기도 전에 농민은 큰 기상이변 없이 올해 농사를 지을 수 있을지부터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히 재해를 피하더라도 농산물가격 폭락, 농자재비 폭등이 기다리는 어려운 세상을 살고 있다. 그래도 농가의 살림살이가 이보다 더 나빠질 수는 없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품고 새해를 맞이하지만, 들리는 소식만으로 보면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새해 1월 4일 정부가 발표한 ‘2024년 경제정책 방향’은 “활력있는 민생경제”를 목표어로 제시하면서 올해 사회간접자본에 배정된 예산의 65%를 상반기에 조기 집행하도록 하고, 노인과 취약계층의 직접 일자리 지원 인원의 90%를 1분기에 채용할 계획을 발표했다. 재정지출을 상반기에 집중했을 때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물가 부담을 억제할 목적인지는 모르겠으나, 민생경제 회복을 위해서 물가안정에 총력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물가·서민생활 안정을 위해 내놓은 수급 안정 대책의 내용은 농축산물의 수입 확대로 채워져 있다는 점에 대하여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자국 생산물량의 확대를 통한 물가안정을 선순환적으로 접근하겠다는 언급은 전혀 없고, 수입 물량의 확대와 그것도 저율의 관세가 부과되는 수입 물량의 확대를 자랑삼아 내놓고 있다. 농민들로부터 계속 질타를 받는 저율관세할당인 TRQ 물량을 늘려서 농축산물의 가격을 억제하는 정책을 지속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원래 TRQ는 무역협상 과정에서 수출국의 요구가 반영되어 수입국이 낮은 관세로 수입하도록 하는 기본물량을 규정한 것이고, 수입국인 우리 처지에서는 국내 시장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저율관세가 적용되는 물량을 억제하도록 해야 할 터인데, 수입국인 우리나라가 알아서 증량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는 과일의 경우, 바나나와 파인애플 등 거의 수입에 의존하는 신선과일에 할당관세를 적용한다고 하지만, 과일 사이의 높은 대체성을 고려할 때 국내산 과일 가격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사과를 비롯한 과일 주산지가 무너진다면 소멸위험지역은 더 급속하게 늘어날 수밖에 없다.

‘2024년 경제정책 방향’에는 생활인구 확대를 위한 인구소멸지역의 세컨드 홈 활성화, 스마트 농업 시설에 대한 농지이용 허용을 제시하고 있지만, 인구소멸 위험도가 높은 다수의 지역이 과수 주산지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런 와중에 최근 정부가 사과 수입을 추진하고 있다는 보도가 연이어 나오고 있다. 현재 사과의 수입은 금지되어있는데, 이는 외국산 농산물의 수입으로 인해서 유입될 수도 있는 병해충에 대비하기 위해 수입에 따른 위험도를 8단계에 걸쳐 평가하는 ‘수입위험분석(IRA) 절차’에 따른 것이다.

작년 10월에 4대 그룹이 대주주로 있는 모 경제지는 “수입장벽으로 인해서 한국 사과가 세계에서 가장 비싸졌다”라는 표제의 기사가 실었다. 그러면서 1kg당 가격을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는 분석을 실었다. 제사상이나 선물용으로 큰 사과 중심의 유통이 낮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한국의 상황, 당도와 크기를 기준으로 엄격한 선별이 이루어지는 특징을 무시한 단순 비교로 한국의 사과값을 세계 최고가로 단정을 지어 버렸고, IRA 절차를 수입장벽으로 적시하기까지 했다. 한국 시장을 탐하는 외국의 사과 수출기업의 주장과 전혀 다르지 않은 보도였다.

여기에 더해서 최근에는 미국 및 뉴질랜드와 사과 수입과 관련한 구체적인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보도가 “금(金)사과”라는 표현과 함께 나왔다. 그러다 보니 사과 수입을 위한 군불을 지피는 일련의 작업이 꾸준히 진행되어 왔고, 이제 마무리 수순에 접어든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받고 있다.

이에 대해 농식품부에서는 “사과, 배뿐만 아니라 오렌지, 망고 등 외국산 농산물의 수입위험분석에 따른 협의가 진행 중일 뿐 이외 다른 요인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라는 입장을 내놓기는 했지만, IRA 절차가 세계 모든 국가가 과학적 증거에 기반해서 진행하는 절차인 만큼 몇몇 언론의 기사에 의해서 농정이 휘둘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농식품부의 홈페이지에 농정목표 첫 번째로 명시한 “튼튼하고 굳건한 식량주권”은 물가에 휘둘려서 TRQ를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해서는 결코 달성할 수 없다. 농업을 지키면서 안전한 먹거리를 지키는 IRA 절차를 꼼꼼하게 살펴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세컨드 홈과 스마트농업을 이야기하더라도 지금 농촌을 지켜내는 일이 뒷전으로 밀려날 수는 없다. 곡물자급률 20%를 지키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수농가, 채소농가마저 무너져 버린다면 식량주권은커녕 농촌소멸의 길에 더 가까이 갈 것이다. 자급력 없는 식량안보는 허구에 불과하다는 점을 상기하고, 우리의 농업·농촌과 먹거리를 지키는 일에 소홀함이 없는 새해 농정을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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