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길 논설위원·농정전문기자

우리는 일상에서 ‘농민’을 ‘농민’이라 부른다. 가끔은 ‘농부’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지만, ‘농업인’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농민이란 ‘농사짓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말한다.

대한민국 헌법 속의 명칭도 ‘농민’이다. 헌법 123조 4항은 ‘국가는 농수산물의 수급균형과 유통구조의 개선에 노력하여 가격안정을 도모함으로써 농·어민의 이익을 보호 한다’고 돼 있다. 또 5항에서 ‘국가는 농·어민과 중소기업의 자조조직을 육성하여야 하며, 그 자율적 활동과 발전을 보장 한다’고 규정한다.

이렇게 일상에서 당연하게 쓰는 ‘농민’이란 명칭은 그러나 법률과 행정에서는 쓰지 않고 헌법에만 박제된 이름이다. 90년대 WTO 출범 이후 정부가 농업의 경쟁력 제고와 규모화를 추구하면서 법률과 행정에서 농민 대신 ‘농업인’ ‘농업경영체’란 개념으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11월 11일도 ‘농민의 날’이 아니라 ‘농업인의 날’이다. 통계용어로는 ‘농가’ ‘농가인구’가 있고, 각종 보조사업이나 지원사업을 할 때는 ‘농업경영체(농업인, 농업법인)’란 용어를 쓴다.

농업ㆍ농촌 및 식품산업 기본법에서 ‘농업인’이란 농업을 경영하거나 이에 종사하는 자를 말한다. 농업정책의 수혜자가 되기 위해선 ‘농어업경영체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농업경영체’에 등록해야 가능하다.

그렇다면 자경농이든 임차농이든 농민이 농업경영체에 등록하면 되지 않는가? 문제는 농업경영체에 등록한 이들 중 진짜 농민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경자유전을 무시한 농지법과 허술한 농업인 규정 때문에 사실상 누구나 쉽게 농지를 취득하고, 농업경영체에 등록할 수 있다. 그러니 농민이 아닌 사람이 농지를 차지하고 직불금을 수령하는가하면 임차농 같은 진짜 농민이 소외되는 것이다.

이 문제는 2021년 LH 농지 투기 사태로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사회적 공분을 샀다. 그 결과 농지법도 강화됐지만, 상속, 이농 농지 처분 같은 핵심 사안은 해결하지 못한 채 가짜 농민 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농업인 우대 혜택으로 소형 태양광발전소(한국형 FIT)를 따낸 2만4900여명 가운데 800여명이 서류를 위조한 ‘가짜 농업인’이었고, 37%에 해당하는 9200여명이 농업 외에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최근 감사원 감사 결과는 대표적 사례다.

그래서 그동안의 농업인 정의 논의는 사회 통념상 진짜 농민을 지원하고, 가짜 농민을 방지하는 데 역점을 두어 왔다. 농지제도와 농업인 개념이 문란해서는 공익직불제를 비롯한 모든 농정이 왜곡되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현 정부에서도 농업인 기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그런데 현 정부의 논의는 기존 논의와 결이 많이 다르다.

현 정부에서는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위원장 장태평)가 ‘농업·농업인의 정의 재정립’을 의제로 다루고 있다. 논의는 농업인 정의뿐 아니라 첨단 융복합 기술산업으로 진화하고 있는 농업의 외연을 담아내기 위해 기본법 상 ‘농업’의 개념도 재정립하자는 데 까지 나가고 있다. 워킹그룹 논의 과정에서는 가공, 유통, 체험 등 농촌융복합산업은 물론, 수경 양액재배, 수직농장, 대체식품 등을 농업에 포함시키자는 업계의 주장이 나오고 있다.

농업인 정의 문제는 11월 8일 열린 ‘농업·농촌의 길 2023’에서도 주제로 다뤄졌다. 정현출 한국농수산대 총장은 ‘미래 농산업경영체 구조변화와 정책과제’ 주제발표를 통해 “4차산업 혁명시대 농업이 지속 발전하려면 전후방산업끼지 포함하는 농산업경영체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농산업에는 식품산업, 생산소재장비산업, 유통마케팅, 농업식품기반 벤처사업, 농업교육지도컨설팅사업을 포함하자는 것이다. 또 농어업경영체법의 농업경영체를 ‘농산업경영체’로 개정하고, 기본법 상 농업인은 ‘농업경영인’과 ‘농업종사자’로 구분, 농업경영인만 농산업경영체에 포함시키는 제안이다.

이처럼 윤석열 정부에서 농업인 정의 논의는 농업 개념을 농산업으로 확장, 기업농과 농기업에 대한 지원, 규모화와 4차산업 혁명 등 경쟁력 제고에 방점이 찍힌 것처럼 보인다. 이미 농림축산식품부는 지난 1월 2023년 업무계획을 통해 경영체 역량 강화를 위한 기업 경영양식 도입 및 투자확대를 발표했다.

시대 변화, 농업 여건의 변화에 따라 제도는 달라질 수 있다. 농업인 정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논의가 사회적 통념과 정의에 입각해 충분한 공론화 과정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농민은 농업의 주체이고, 농촌을 유지하는 지역주민이다. 단순한 산업종사자를 넘어 지역, 환경, 문화와 뗄 수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농업인 정의는 실제 마을에 거주하는지, 농사를 경작하는지, 농업의 공익적 기능이나 공동체 기여 같은 활동을 하는 지를 기준에 놓고 논의해야 한다.

농사를 짓지도 않고, 농업의 공익적 기능과 아무 상관없는 비 농민과 기업을 경쟁력 제고란 명분으로 농업인, 농업경영체에 끌어들여 지원하고 농업총생산액이나 높이는 방법은 바른 길이 아니다. 정부는 이 문제를 투명하게 공론화하고, 특히 농민의 의견을 경청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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