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호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기획조정과장

[한국농어민신문] 

미국밤나무는 미국 동부 숲의 주요 낙엽수였다. 얼마나 흔했던지 ‘갓난아기는 밤나무 요람에서 잠들고 죽은 자는 밤나무 관에서 안식에 든다’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였다. 사달이 난 것은 20세기로 막 접어든 무렵, 아시아로부터 한 곰팡이가 유입되면서부터다. 이 곰팡이는 밤나무줄기마름병을 일으키는 균류로, 아시아의 밤나무들은 이 균과 함께 서서히 진화해 곰팡이를 견딜 수 있었으나 미국밤나무에는 거의 100%의 치사율을 나타냈다. 그리고 1950년대에 이르러 미국밤나무는 사실상 전멸했다. 이는 미국밤나무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이와 같은 일이 왕왕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인류는 새 정착지를 찾기 위해 지구 곳곳으로 이동했다. ‘인류의 문명이라는 여정은 조건이 아닌 이동이며, 정박이 아닌 항해’라는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말처럼 지금도 인류는 이동 중이거나 무언가를 이동시키며 세상을 유지하고 있다. 국제무역, 해외여행 등이 증가하면서 지리적인 경계가 무의미해졌다. 그래서 혹자는 지구가 과거 하나의 거대한 초대륙 ‘판게아’가 있던 시절과 비슷하게 연결돼 있다고 해 현재를 ‘신 판게아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운송화물의 양과 운송속도가 증가하면서 생활은 그 어느 때보다 편리해졌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이런 변화는 지구의 생태환경을 빠르게 재편하며 작은 곰팡이부터 큰 동·식물에 이르기까지 외래종의 유입속도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렸다. 선박만 보더라도 24시간 안에 전 세계적으로 1만종의 동·식물을 이동시킬 수 있다고 추정된다. 인간에 의해 유입된 외래종은 급격한 기후변화 덕분에 쉽게 정착하고 적응하는 모양새다. 국립생태원에 따르면 정확한 개체 수 파악은 어려우나 한국에 들어온 외래종은 2009년 894종에서 2021년 2653종으로 연평균 16% 증가했다고 한다.

언제부턴가 농업에 큰 문제가 된 돌발해충도 마찬가지다. 중국에서 유입된 꽃매미와 갈색날개매미충, 미국에서 발생해 유럽을 통해 들어온 미국선녀벌레 등은 과수를 비롯해 다양한 농작물에 피해를 주고 있어 방제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기후변화로 겨울이 따뜻해지면서 부화 시기가 당겨지다 보니 활동 기간은 전보다 길어졌다. 활동 기간이 늘어난 만큼 농가 피해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현재는 농촌진흥청과 산림청, 지자체 등 관계 기관이 돌발병해충 방제 대책협의회를 운영하고 공동방제 주간을 정해 협업방제를 진행하고 있다.

기후변화가 심해지면서 이런 돌발병해충이 더 자주, 더 많이 발생할 것으로 전망된다. 농촌진흥청은 핵심 농업현안을 최대한 빠르게 해결하기 위해 추진하는 종횡무진 프로젝트 중 하나로 국가 농작물 병해충 예찰 예측 개선을 선정했다. 이를 통해 병해충 예찰 체계의 디지털 전환, 병해충 예찰 자동화와 무인화, 병해충 발생 예측모형 개선, 국가 농작물 병해충관리시스템(NCPMS) 빅데이터 분석과 활용성 강화 등을 추진해 정확한 병해충 발생 정보를 제공하고 방제 의사결정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계획이다.

돌발병해충은 지역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은 물론, 농업 생산에도 영향을 끼쳐 식량 공급에 타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 안정적인 식량 생산뿐만 아니라 지속 가능한 농업을 위해서라도 돌발병해충 대비에 힘을 쏟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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