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량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농업진흥정책으로 농업발전 이뤘지만
한 단계 더 나아가려면 재정비 필요
다원적 기능·국토보전 기능에 집중해야

1960년까지만 해도 한국과 아프리카의 경제상황은 비슷했다. 한국은 외국의 원조 없이는 하루도 버티기 힘든 날들의 연속이었고, 유럽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아프리카는 정치적 무능과 내전으로 처참한 날들이 이어졌다. 이후 한국은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경제모범성이 됐지만 아프리카의 상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폐허속의 한국을 일으킨 ‘한강의 기적’이 제조업 중심의 경제발전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1961년 출범한 군사혁명정부는 공업과 농업 발전을 동시에 추구하는 농공병진정책을 추진했다. 공업발전을 위해서는 전국에 산업단지를 만들고 기술교육을 확대하는 한편, 중농정책으로 농가소득을 향상시키고 농업생산력을 증대시키고자 했다. 실제로 농공병진정책 채택 이후 1976년까지 약 15년 동안은 농업의 성장속도가 공업을 능가했고 1980년대 중반까지는 농업의 고용창출력이 공업보다 높았다. 농업의 압축성장이 공업보다 먼저 이뤄졌다는 것이다. 

농업발전에는 농업협동조합정책과 농업기술개발정책이 중심에 있었다. 정부는 농민을 조합원으로 하는 단위농협과 단위농협의 연합체인 농협중앙회를 만들었고, 농협은 구매사업, 판매사업, 지도사업, 신용사업의 4가지 핵심활동을 전담했다. 이를 통해 농업가치사슬 전반의 체계를 정비하고, 농민을 조직화했으며, 자본을 모아 전국 곳곳에 농업관련시설을 확충했다. 또 정부는 제조업 부분에서 거둬들인 재정여력을 농업에 과감히 투입했다. 비료, 농약, 종자 등에 대한 유무상 지원과 각종 수매사업, 경지정리, 수자원 정비, 도매시장과 유통정비 등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농업기술개발정책은 농촌진흥청과 지방농업진흥기관이 주도했다. 지도직과 연구직 공무원이 확충되고, 4H와 여성농업인조직 등 전국적 농민조직이 결성됐다. 농민에게 기술을 교육하고 보급하기 위한 모세혈관 같은 전국 네트워크도 정비됐다. 정부의 정책은 적중했다. 농업발전에 필요한 조직과 제도가 정비되고 각종 농촌진흥사업은 정부주도로 일사분란하게 작동했다. 1977년 식량자급에 성공하고 식량 상황이 안정되면서 제조업 발전에도 탄력이 붙었다. 정부주도의 농업발전정책에서 농업협동조합과 국가농업연구기관의 역할은 틀림없는 정답이었다. 

아프리카 농업이 지금도 제자리인 이유는 농업협동조합과 국가농업연구기관이 빈약하기 때문이다. 자가소비도 버거운 아프리카의 소농들은 잉여농산물을 생산할 수 없어서 자본을 만들 수 없다. 자본이 없으니 미래를 준비할 수 없고 내일은 오늘과 똑같을 수밖에 없다. 정부가 나서서 농업협동조합과 농업기술개발을 주도해야 하지만 아프리카 대부분의 정부는 그럴 능력도 재원도 의지도 없어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아프리카에게 꼭 필요한 농업협동조합과 국가연구기관, 정부주도의 농업진흥정책은 한국에게는 재정비의 대상이다. 선진국이 되고 시장경제가 자리 잡을수록 정부주도의 농업발전 정책은 고비용 저효율의 한계에 봉착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농업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나라들의 공통점은 농업발전의 중심이 정부주도에서 민간주도로 넘어갔고, 정부의 기능은 농업의 산업적 기능보다는 다원적 기능과 국토보전 기능에 더 집중하도록 전환됐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한국은 이 대목에서 전환지체에 있다. 각자의 기득권과 경로의존성에 더하여 정책 리더십 부족과 일반 국민의 농업에 대한 이해부족이 섞여버린 결과다. 제때 필요한 혁신을 오랫동안 미루다 보니, 모두가 각자의 자리, 자기의 시간에서 열심히 하지만 농업 혁신의 속도는 더디고 힘은 점점 부친다. 아프리카는 농업협동조합과 농업연구기관을 새로이 만들어야 하고, 우리는 조직과 제도, 기능을 재정비해야 한다. 농업의 산업적 기능은 민간주도로 길을 내주고, 공공부분은 다원적 기능을 강화하도록 다듬어야 한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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