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미령(경남 창녕군)

[한국농어민신문] 

아파트가 빼곡하게 들어선 회색 도시의 한 계절도 깊어갔다. 몇 권의 책을 들고 어둑해진 골목길을 나선 지도 10년의 세월이 지났다. 혼기를 놓친 후 결혼을 하는 바람에 늦둥이 두 딸을 두었다. 저녁 시간에 과외를 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열한 살 큰 딸의 눈가는 언제나 촉촉해 있었다. 엄마가 없는 공간은 동생을 돌봐야 했기 때문이다. 고사리 손으로 엄마의 옷자락을 붙들고 가지 말라며 떼를 쓰는 다섯 살 막내를 뿌리치는 심정 또한 늘 바람으로 일렁이었다.

중년의 나이 탓일까? 나에게 과외를 받는 맑은 아이들의 눈을 보면서 이제는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이 앞서곤 했다. 1997년 국가부도사태(IMF)가 오면서 남편이 하던 사업이 절망의 도가니로 빠지고 말았다. 운영하던 학원도 집도 모두 빼앗겼다. 나의 가정은 그믐밤 가로등불도 없는 낮선 곳에서 들숨과 날숨만 쉬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는 겪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마음일 것이다.

내가 가진 자질이라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과외 수업이 긴 시간 나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한 가족이 살아남기 위해 생존경쟁에서 최대한의 에너지를 소비하고 남은 배터리는, 가치관까지 방전시켰다. 남편은 사업에 실패한 이후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고 버킷리스트 첫 번째 기록이 귀농하기였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농촌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남편의 건강을 위해 귀농을 결심했다.

귀농을 하겠다는 결정을 하고 보니 우리 가족이 가고 싶은 곳이 특별히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평소에 두 딸에게 생물다양성에 대한 생태학습을 위해 자주 찾았던 우포늪 주변 시골풍경이 가슴에 남아있었다. 그래서 연고도 없는 창녕 지역을 선택하게 되었다. 농지를 구입하기 위해 여러 번 방문한 장소는 경사가 가파른 2500평 단감 과수원이었다. 우포늪이 가까이 있으니 그것으로 좋았다. 나의 짧은 생각이 귀농 후 아이들 학교 통학문제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또한 귀농교육도 받지 않고 농경지를 먼저 선택한 것도 나의 귀농 실패의 원인이 되었다.

막내는 전학 온 초등학교에서 조금씩 적응하기 시작했지만 큰 아이는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어 전학을 할 수 없었다. 매일 창녕에서 대구로 통학을 시켜야했다. 여명이 오기 전 내가 먼저 일어났다. 아침 도시락을 준비하여 잠에 취해 있는 막내를 깨워 언니와 같이 차에 태워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 아침 식사의 공간은 공휴일을 제외하고는 자동차 안이 되었다. 불편하고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평 없이 엄마의 말에 순응하는 딸들이 고마웠다. 언니를 먼저 등교시키고 돌아오면 막내의 등교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막내가 하교하고 나면 혼자서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까지 스쿨버스도 시내버스도 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원 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학원도 부모가 선택해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내가 농촌으로 터닝포인터 할 때 보지 못했던 지리적 위치였다.

학교 다니는 자녀를 둔 부모라면 고려해야만 한다. 부모의 깊이 없는 선택이 막내를 힘들게 했다. 하지만 이른 아침, 우포늪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보는 두 딸의 감탄사는 천진한 정서에 반향을 일으켰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한여름이었다. 물 꿩이 가시연꽃위에서 새끼를 천적으로부터 보호하며 기르는 것을 관찰하는 아이들의 성장 또한 놀라웠다.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것을 배우고 있었다. 그것으로 나는 위로를 삼을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농지를 구입하고 도시민들을 소비자로 목표를 정하고 체험공간도 구축하였다. 나름 세밀하게 계획을 잘 세웠다 생각하며 첫 농사를 지었다. 먼저 내 가족이 농산물을 먹는다는 마음과 흙 살리기를 위해 약을 치지 않았다. 감나무 아래에는 토종닭 1천 마리를 풀어 놓고 자유롭게 먹이를 먹고 쉬게 하였다. 도시의 지인들이 큰 고객이 되어 농장을 찾아 주었고, 소비자 단체에서도 방문객은 늘어갔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농장의 환경과 소득이 없는 상황에서도 계속되는 투자는 우리 부부를 지치게 했다.

가을이 깊어갔다. 감잎이 빨갛게 물들고 다른 농가보다 감이 일찍 주홍빛을 선보였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농장 풍경은 감탄의 언어가 주저리주저리 흘러 나왔다. 약을 치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인 것을, 농사에 지식이 없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가을을 마음껏 만끽했다. 도시에서 억눌린 가슴에 쌓였던 온갖 이물질들을 토해내는 쾌거까지 느꼈다. 기쁜 마음으로 단감을 수확하였다. 약을 치지 않은 단감은 검은 점이 많은 못난이들이었다. 시장에 단감을 출하하였다. 일부 소비자를 제외하고는 단감을 사 주는 사람이 없었다. 가격 또한 형편없었다. 1년 농사의 결실로 내 손에 들어온 돈은 겨우 이백만원이 전부였다. 아이들 교육비는 어찌하라고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가슴도 타 들어갔다. 하늘이 캄캄해졌다. 기대했던 결과는 땀 흘린 노동의 대가를 무시하고 고스란히 땅 속으로 들어갔다. 철없는 아이처럼 가을을 노래했던 나의 심성과 눈물까지 토양의 자양분으로 묻혀 버렸다.

가지고 있던 현금도 바닥이 났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는 큰 딸과 초등학교 5학년 딸의 교육비는 어떻게 감당해야할지 막막했다. 그제야 허겁지겁 정보를 찾아보고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뛰어 다녔다. 밤잠을 설쳐가며 다시 계획을 세워야만했다. 특별히 해결방법이 없어서 다시 과외를 2년 정도 이어갔다. 이렇게 농촌에서 겪게 되는 갈등은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한 해가 저물고 희망찬 봄을 맞이하였다. 나는 여성농업인으로서 귀농학교와 정보화교육, 벤처농업 등 낮 시간을 이용하여 농촌을 배우고 익혔다. 농촌에는 여성의 역할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생활개선에도 가입하고 향토음식연구반에도 가입하여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지향해나갔다. 남편은 주로 농장에서 일을 했다.

어느 날, 밖에서 미팅을 하고 있는데 낯선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병원이었다. 남편이 119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와 있다는 청천병력과 같은 비보였다. 나는 추진하던 일을 멈추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응급실을 막 들어서는데 남편의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눈앞에는 남편의 한쪽 손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가다듬고 남편에게로 다가가 남은 한 손을 꼭 잡았다. 나를 본 남편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긴장을 풀었다.

부화기에서 태어날 병아리를 위해 집을 만들다가 잘못하여 핸드그라인더가 손등을 가로질렀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이만하길 다행이라고 했지만 손등이 너무 심하게 찢어져 성형외과 선생님이 봉합하길 권했다. 4시간의 수술을 했지만 결국 손가락 하나에 뼈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와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피비린내와 함께 방바닥에 떨어진 피가 군데군데 굳어있었다. 마을과 떨어진 외딴 곳에서 남편이 혼자서 몸부림쳤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어 마음이 많이 아팠다. 이렇게 어설픈 농촌생활은 우리를 힘들게 하면서도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운명처럼 또 한 번의 시련을 겪었다. 농장의 닭들은 남편의 고집으로 항생제를 먹이지 않고 방사하여 키웠다. 하지만 토종닭도 계란도 제 값을 받지는 못했다. 닭들이 먹는 물은 물통 안에 황토 흙과 숯을 넣어 정제 후 먹게 했고, 항생제 대신 ‘자연 항생제’라고 하는 아카시 꽃을 숙성시켜 사용하였다. 겨울에는 물이 얼어 닭들이 물을 먹지 못했다.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물통 30개를 준비하여 주변의 우물가에서 꽁꽁 언 손을 호호 불며 물을 길러 날랐다.

뿐만 아니라 단백질 공급을 위해 칠성시장에서 조개를 갈 수 있는 기계를 구입하고, 조개껍질을 갈아서 쌀겨에 섞여 먹였다. 누가 닭들의 먹이에 이리 정성을 다할까? 산란 사료를 먹이지 않았기에 닭들은 계란을 많이 생산하지 못했다. 그래서 닭의 숫자에 비해 계란 생산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사계절 계란을 수거하여 알코올 묻힌 거즈로 청결하게 닦는 일도 보통일은 아니었다. 판로는 더욱 심각하였다.

나는 홍보에 나섰고 드디어 병원 간호사들과 간병인들을 대상으로 일주일에 두 번씩 직접 계란을 배달을 하였다. 그 결과 풍족하지는 못해도 내가 노력한 만큼만 먹고 살 수 있어서 감사했다.

농장의 사계절은 분주하였지만 뚜렷한 이슈가 되는 작물을 선택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랫집에서 키우던 진돗개 세 마리가 농장에서 한가로이 놀고 있던 닭들을 습격했다. 외출에서 돌아와 보니 닭들의 아우성 소리가 들렸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남편과 나는 빠른 걸음으로 농장으로 올라갔다. 주인을 본 진돗개는 재빠르게 농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토실토실 잘 키운 토종닭들이 여기저기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것이다. 진돗개는 닭의 목덜미를 물고는 또 다른 닭들을 습격하여 무려 200여 마리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닭들의 터전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우리 부부는 망연자실하였다.

그날 농장의 식구들은 슬픔으로 쥐죽은 듯 조용했고 바람조차 고요했다. 닭들에게 큰 기대를 걸며 애지중지 키웠는데 이렇게 자산을 잃고 보니 이제 새로운 무엇인가를 시작하는 것에 두려움부터 앞섰다. 감 농사도 닭 키우기도 모두 실패의 쓴 맛을 보았다. 그 후 닭들은 한 마리 두 마리 병들고 아프더니 숫자가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이렇게 농장의 닭들은 서서히 사라졌다. 농사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자신감을 잃고 농촌생활에 점점 실망하고 있을 무렵, 교육을 통하여 가게 되었던 벤치마킹에서 훌륭하신 멘토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기억에 남는 교훈은 최소 ‘하루에 오만 원이라도 벌 수 있는 작물을 심어라.’ 그리고 ‘틈새시장을 만들어라’란 말을 듣는 가슴은, 좌절감에 빠져있던 나를 깨우며 다시 뛰게 하였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농장을 새롭게 디자인했다. 그리고 감나무를 모두 베어 버리고 특용작물을 선택하여 심고 가꾸었다. 작물들이 자라는 동안 은행의 대출 빚은 늘어만 갔다. 그리고 몇 년 뒤에는 ‘무 농약 인증’과 ‘스타 팜 농장’ 지정을 받게 되었다.

흙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노력의 대가가 조금씩 나의 가슴을 열어 주었다. 이렇게 차츰 농촌에 적응해 가며 귀농학교를 졸업했다. 200시간 동안 많은 것을 배웠고, 선배 농가의 벤치마킹을 통하여 새로운 아이템도 개발할 수 있었다. 특용작물인 참죽나무가 잘 자라주었다. 할머니께서 만들어 주셨던 부각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어깨너머로 보았던 할머니의 동작을 더듬어 만든 부각은 채반에 들러붙어 뒷정리까지 노동의 시간만 늘어났다.

경남 창녕군에 귀농해 특용작물인 참죽나무을 재배하던 배미령 씨는 ‘오방색 양파참죽부각’을 개발하는 등 향토특색음식 개발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경남 창녕군에 귀농해 특용작물인 참죽나무을 재배하던 배미령 씨는 ‘오방색 양파참죽부각’을 개발하는 등 향토특색음식 개발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 번, 두 번 셀 수 없는 실패와 도전을 거듭하면서 결국 ‘오방색 양파참죽부각’을 탄생시켰다. 기쁨이 넘쳤다. 나는 농촌진흥청 농업기술실용화재단을 통하여 ‘오방색양파참죽부각’을 특허출원 등록을 하였다. 이듬해에는 특허등록까지 마쳤다. 그리고 창녕군농업기술센터로부터 지역농산물을 활용한 ‘농업인 소규모 창업기술시범사업’을 지원받았다. 나는 꿈에 부풀어 떨치고 일어나 판로의 길을 나섰다. 그 길은 산 넘어 산이 가로막고 있었다. 먼저 시장조사를 했어야 했는데 놓치고 말았다. 아니 해 보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고생하고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무지한 나는 그 해도 비참하게 실패의 쓴 맛을 보고야 말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정보화 교육에서 배운 블로그의 덕을 톡톡히 볼 수 있었다. 농장을 새롭게 디자인 하면서 참죽과 함께 심었던 감국이 그래도 효자 노릇을 해 주었다. 감국이 자라자 삽목을 시작했고, 그 모습을 여성의 감성으로 블로그에 포스팅 했다. 그 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SNS의 위력은 대단하였다. 블로그를 보고 전국에서 감국묘목을 정말 많이 구입 해 주었다. 그러자 조금의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에게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각오로 농촌생활 적응에 포문을 열었다. 그리고 더욱 분발하여 생활개선회 활동과 향토음식 연구회 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그 결과 향토음식 경연대회에 참여하여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귀농인 협의회를 설립하는데 선구자가 되어 헌신과 봉사를 했다. 그 후 우수귀농인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러자 다른 지자체에서 벤치마킹을 여러 차례 다녀갔다. 이곳저곳에서 귀농강의 문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직 귀농정착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나처럼 실패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부산 벡스코를 비롯하여 많은 곳을 다니며 귀농성공을 위한 조언을 조목조목 열강 했다.

나는 당당한 여성농업인으로 더 많은 활동 범위를 넓혔다. 작지만 강한농업인이 되고자 강소농 단체에 가입하여 ‘농업경영’을 배웠다. 농업도 경영이라는 말이 놀라웠다. 배움을 통해 새로운 꿈을 꾸게 되는 발견을 하면서 ‘영농일지’를 쓰기 시작했고, ‘농업경영회계장부’도 만들었다. 제일 먼저 우리 부부의 노동비를 지불하고 남는 것을 수입으로 기록했다. 그러고 나서야 노동의 대가가 슬프지 않았고 뿌듯하게 가슴을 울렸다.

겨울의 추위가 심할수록 이듬해 나뭇잎은 한층 더 푸르다는 게 자연의 이치라고 했듯이 나의 농촌생활도 조금씩 익어갔다. 농장의 나무들은 부지런히 성장하였다. 참죽, 두릅, 엄나무, 보리수, 꾸지뽕들이 빼곡해졌고 빨갛게 익은 보리수 열매는 태양보다 빛났다. 가을에는 꾸지뽕 열매가 주렁주렁 탐스럽게 익어갔다.

그리고 2017년 봄 나는 벤처농업대학에 입학하였다.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소통하며 배움을 찾는 공간이었다. 수업을 마치면 독서반에서 동아리 활동을 했다. 대부분 수출에 대한 소통이었다. 소농의 개인 업체로 참여한 자신이 왠지 초라해졌다, 제품의 수량이 수출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제안을 했다. 작은 사업이지만 나의 제품으로 토론에 참여해 보고 싶다고 했더니 교수님께서 허락하셨다. 그 결과 양파의 시배지에 살고 있는 내가 양파 쌀 빵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기회를 얻은 나는 분명 기회비용을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결정이 끝나면 바로 움직이는 성격이라 지체할 수 없었다. 100% 쌀가루에 여러 용도의 양파를 활용하여 맛을 평가해 보는 과정도 빼놓지 않았다.

드디어 ‘어니어니’ 양파 쌀 빵과 보리수와 꾸지 뽕 조청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농민들이 쌀값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워할 때, 내가 쌀 소비 촉진에 앞장설 수 있어 가슴이 뿌듯하였다. 나는 재바르게 농진청에서 진행하는 수출 상담을 받았다. 운 좋게도 00물산으로부터 냉동 ‘만주파이’를 북미로 수출하자는 엄청난 기쁨을 안고 돌아왔다.

하지만 나와 콜라보 한 업체(쌀 빵 생지)에서 수출은 니즈(needs)가 많다며 물량을 거부하는 바람에 수출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속이 많이 상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블로그에 포스팅을 했다. 첫 고객은 기자였다. 은인처럼 찾아 온 기자님의 기사는 널리널리 홍보되었다.

양파 쌀 빵이 홍보되자 경상남도에서는 홍보물 영상까지 만들어 주었다. 농민의 날에는 ‘어니어니’ 양파 쌀 빵을 도민들에게 나누어주는 영광도 얻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농가소득을 올렸다. 덕분에 빚도 조금씩 갚을 수 있었고 두 딸의 공부도 걱정 없이 마칠 수 있었다. 특히 경남을 대표하여 가공 상품생산 경영체중 우수 경영체로 선정되어 비즈니스모델경진대회에 참여할 수 있었던 일은 잊을 수 없다.
 

농림축산식품부와 농촌진흥청 주최·주관으로 열린 ‘2018년 가공상품 비즈니스 모델 경진대회’에서 배미령 씨는 장려상인 ‘농촌진흥청장상’을 수상했다. 
농림축산식품부와 농촌진흥청 주최·주관으로 열린 ‘2018년 가공상품 비즈니스 모델 경진대회’에서 배미령 씨는 장려상인 ‘농촌진흥청장상’을 수상했다. 

청정한 농촌에도 코로나 바이러스는 비켜가지 못했다. 농민들의 판로에 높은 장벽이 막혔다. 이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대응할까? 많은 고민 끝에 여성농부 다섯 명이모여 ‘참 농부’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리고 언택트 여행지로 선정된 우포늪 주차장에서 농업기술센터와 협력하여 드라이브스루를 실시하여 침체된 농가에 소득을 올렸다. 그 열기를 모아 강소농(작지만 강한농업) 자율모임조직체를 결성하여 우포늪에 관광객이 많이 찾는 시기를 맞추어 농민시장도 개설하였다.

나의 이러한 행보에 지방자치단체와 경상남도농업기술원에서도 박수와 응원을 보내 주었다. 이곳에 참여한 농가는 지역의 농·특산물을 홍보하며 지금도 농가소득을 향상시키고 있다. 그리고 중년여성농업인CEO 경남지회장을 맡아 여성농업인이 지향하는, 혼자하면 놀이가 되고 함께하면 문화가 된다는 슬로건으로 농촌문화를 회원들과 함께 확산 시켜 나갔다.

우리는 영농조합법인을 설립하였고 ‘줌마줌마’ 스마트스토어 플랫폼을 발 빠르게 구축하였다. 온라인에 재능이 많은 회원들과 임원들의 헌신으로, 온라인의 상승세는 날아올라 라이브방송까지 이어지면서 농가의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오프라인이 어려운 위기에 온라인을 기회로 플랫폼을 구축하였던 것이 내가 여성농업인으로서 앞장서 해야 할 일이었다.

농촌은 오래전부터 고령화 시대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제 나도 노년을 향하고 있다. 지금까지 해왔던 나의 열정도 시대정신을 비켜가지는 못하는 것 같다. 바쁘게 살아오면서 다치기를 얼마나 했던가! 2층 창고에서 내려오다 떨어지면서 갈비뼈 여섯 대가 부러져 병원생활도 오래했다. 택배를 보내려가다 미끄러져 요추골절로 온 몸이 온전하지 못하다.

비록 지금은 힘든 일은 할 수 없는 몸이 되었지만 녹음이 우거진 농장을 새로운 농촌 어메니티(amenity)를 열며 설계한다. 세상은 항상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트렌드에 발맞추어 현재진행형인 경관농업을 향하여 지역 문화와 연계되는 업그레이드된, ‘보나의 정원’이 스케치북 위에 그려지고 있다. 나의 손에는 전지가위가 식물들을 자르고 흙속에 묻으며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시장 조사도 이미 마치고 전문 교수님들을 찾아다니며 견문도 넓혀가고 있다. 그리고 미래의 2세대에게 물려줄 경관농업을 추구하는 농장디자인도 스스로 컨설팅하고 있다.

‘농장다움’, ‘나다움, 을 벗어나지 않고 훼손시키지 않을 생각이다. 앞으로 농촌에서 새롭게 우뚝 설 ‘보나의 정원’은 경쟁사회에서 지친 정신세계를 깨워줄 시공간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큰 딸은 이미 상담심리 석사를 전공하며 꿈꾸는 청년농부 CEO의 밑거름을 다지고 있다. 남편 또한 건강을 회복하고 부전공으로 배운 성악을 하며 치유농업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햇살이 눈부신 아침 작은 식물의 초록 잎사귀 사이로 각양각색의 식용장미꽃과 향 장미, 그리고 작은 꽃씨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이들을 바라보며 지쳐있었던 나의 마음을 치유 받는다.

나는 더 이상 농촌을 떠나서 살 수 없는 한 사람이 되었다. 이제 나에게 남은 시간을 자연과 더불어 세속에 지친 도시민들을 맞이하며, 농촌문화. 생태노동으로 그들과 함께 치유 받을 수 있는 멋진 플랫폼 ‘보나의 정원’ 으로 거듭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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