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숙(54·경기 이천 장호원읍)

[한국농어민신문]

남편 따라 내려온 장호원
‘햇사레 복숭아’ 잘 키워내다
교통사고로 생사의 갈림 길
두 달여 입원 뒤 집에 돌아와

1년 만에 다시 찾은 과수원
절반은 논으로 복구 시켰지만
가족·복숭아 힘이 나를 일으켜
봉지 씌울 수 있다는 것에 다행

복숭아에 봉지를 씌우는 날이다. 다시 그날이 돌아왔다.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처럼 무장해야 한다. 짧은 앞치마를 두르고 200장이 넘는 노란 봉지를 챙긴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토시와 장갑을 끼면 전투준비가 완료된다. 소중하게 복숭아를 다루어야 한다. 손바닥으로 감싸 봉지 속으로 쏙 집어넣고 봉지 끝을 말듯이 접는다. 병, 해충 피해를 줄이고 과실 착색을 좋게 하려고 샛노란 옷으로 갈아입힌다. 노랑 저고리를 입고 한여름 더위와 태풍과 비바람도 잘 견디며 7월에 만나자고 인사를 해본다. 올해는 유난히 덥다는 기상청 예보에 더위를 식히라고 삼베 저고리라도 입혀주고 싶은 심정이다. 이렇게 씌어두면 봉지 속에서도 햇살 받으며 근육질의 몸을 불려 탐스럽게 영글어 갈 것이다. 잘 여문 햇사레 복숭아는 가장 더운 여름철에 사람들의 입을 단침으로 유혹할 것이다.

결혼 후 남편을 따라 장호원으로 내려왔다. 서울에서 회사에 다니다가 농사일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새댁이 농사를 짓는 집으로 시집을 온 것이다. 시어른과 함께 사는 시댁에서 살림은 시어머니가 대장이시고, 벼농사는 시아버지가 대장이셨다. 남편은 회사에 출근하니 나는 할 일이 없었다. 장호원은 ‘햇사레’라는 특별한 상표가 붙는 복숭아가 유명한 곳이다. 나는 겁도 없이 논을 메워 400주가 넘는 복숭아 묘목을 심었다.

나무가 어릴 때는 모든 게 좋아 보였다. 복사꽃이 피면 돗자리를 펴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꽃을 쳐다보았다. 흙이 좋아 장화를 벗고 하염없이 과수원 바닥을 걷기도 했다. 남편은 직장에 다니면서 제초작업과 소독을 담당해 주었다. 제초작업을 끝내면 풀 냄새가 좋아 한동안 과수원을 떠나질 못했다. 남편이 소독하고 제초작업을 해주는 게 고마워 복사꽃이 필 때면 회사 직원들을 초대해 과수원에서 꽃 잔치를 하곤 했다. 방앗간에서 떡을 맞추고 닭백숙을 삶고 삼겹살을 구워 먹이면서도 손님 오는 게 좋았다. 넉넉히 먹거리 준비를 해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다 대접했다. 남편은 직장에 다니면서 과수원 일을 돕는 걸 많이 미안해했다. 나는 오히려 정년이 되는 그때까지 과수원은 내가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복숭아를 만나게 해 주어 고맙다고 했다.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에서 복숭아 농사를 짓는 장희숙 씨는 복숭아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열성 농민이다.

묘목 3년 차가 되면 열매를 하나씩 단다. 복숭아나무를 심어 놓고 열매가 달리기 전, 어떻게 하면 복숭아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을까 배울 겸 이웃 농장에 봉지 씌우기 작업을 나가기도 했다. 워낙 일손이 부족하기에 일을 나간다고 하니 농장 사장님께서는 ‘신입생 환영회’라는 이름으로 케이크와 수박까지 사 오셔서 파티도 열어 주셨다. 내 농장에서 혼자 일하면 물 한잔 떠다 주는 사람이 없다. 남의 일을 하다 보니 물과 간식, 음료수까지 챙겨 주셨다. 남이 해주는 밥맛은 얼마나 좋던지. 농장 사장님은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직원우대를 해 주셨다. 초보 농군인 내게 복숭아 농사를 쉽게 하고 재미를 느끼도록 많은 용기를 주셨다.

한 해 두 해 지나자 나무가 커지고 일은 점점 많아졌다. 언제까지 초보 농사꾼으로 있을 수가 없어 영농교육을 받으러 쫓아다녔다. 궁금한 것은 사진을 찍고, 평소와 다른 이파리는 따 가지고 복숭아 연구소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연구소 소장님께서 농업마이스터 대학에 입학해 복숭아에 대해 더 공부해 보면 어떻겠냐고 하셨지만, 그럼 우리 집 복숭아 농사는 누가 짓느냐며 몇 번을 거절했다. 사실 혼자 하는 농사라 제철마다 해 줘야 할 일이 많다. 이른 봄, 꽃이 피기 전에 소독약을 뿌리고 꽃이 피면 꽃을 솎고 열매가 맺기 시작하면 열매를 솎아내고 봉지 씌워 여름에 수확해야 한다. 삼복더위에도 그 깔끄러운 복숭아를 따야만 한다. 낙과가 염려되어 비가 와도 비를 맞고 수확해야 한다. 복숭아를 따기 전에 미리 할 일이 있다. 최대한 손톱을 짧게 자르는 일이다. 갓난아기 만지는 심정으로, 조금이라도 상처가 나면 큰일이다. 하늘이 짓는 농사이기에 자연에 순응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자식 같은 복숭아라서 어디가 아픈지, 퇴비가 부족한지 파악해야 하고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살펴야 한다.

꽃봉오리 피기 전에 솎아주는 것을 적뢰라고 한다.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기 전 미리 일을 줄이기 위해 아픈 다리를 어르고 달래며 봉오리를 따 준다. 어찌 보면 세상에 나오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녀석들에게 미안하지만 이럴 수밖에 없는 주인의 심정도 이해해 줄 거라 믿는다. 제꽃가루받이가 되지 않는 품종은 수정이 잘 되는 다른 품종의 꽃을 미리 따서 꽃가루를 만들어야 한다. 일일이 꽃에 묻혀 주는 수정 작업을 할 때는 어깨도 몹시 아프지만, 주렁주렁 달릴 열매를 생각하니 힘이 든 줄도 모른다.

6월이 되면 아침 일찍부터 봉지 씌우기 작업에 돌입한다. 엊그제 깎은 풀은 왜 이리도 빨리 자라는지. 인력 구하기도 힘들고 인건비는 계속 오르고, 이런저런 이유로 봉지를 씌우는 손이 무겁기만 하다. 농사 첫해에는 아까운 마음에 욕심이 지나쳐 주렁주렁 달았다가 낭패를 봤다. 너무 많이 결실시키면 과일이 작아지고 나무가 힘들어한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욕심을 내려놓지 못해 된통 혼이 나고부터는 욕심을 버리고 적당히 착과시켰더니 나무가 편안해했다. 봉지 씌우기가 끝난 나무는 순 자르기를 해줘야 한다, 삐죽삐죽 솟아난 웃자람가지를 잘라줘야 한다. 필요 없는 양분 손실을 미리 막아주고 햇볕이 고루 들어야 맛이 좋아지니 힘들어도 꼭 해야 하는 작업이다. 전지가위를 허리에 차고 가지 자르는 모습을 아버님이 보시더니 ‘우리 며느리 농사꾼이 다 됐네’ 하시며 껄껄껄 웃으셨다.

드디어 복숭아 수확 철이 되었다. 이른 새벽에 사다리 위를 오르내리며 작업을 하는데 논에 가셨던 시아버지께서 오셔서 말을 걸어오셨다.

“나 없으면 에미는 누구랑 복숭아 따니?” “아버님이 오래 사셔야죠.” 무른 복숭아 하나 껍질을 벗겨 드리니 맛나게 드셨다. “맛있구나. 우리 며느리 복숭아 대장이 다 되었구나!”

혼자 복숭아를 따고 있을 며느리 걱정에 아침밥도 거르고 나오신 게 분명했다. 시아버지의 그 말씀에 초보 농사꾼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새벽같이 딴 복숭아는 가족들이 모여 포장을 도왔다. 어머님은 봉지를 벗기고, 딸은 상자를 접고, 아들은 옆에서 단물 흘려가며 먹었다. 손발이 척척 맞아 들어갔다. 애들은 마침 방학이라 아르바이트한다면서 도와주는데 입으로 들어가는 게 더 많은 것 같았다. 우리 집 복숭아 농사는 이렇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온 가족이 하나가 되어 이제 겨우 복숭아와 친해지려고 하던 그때 교통사고가 났다. 작년 봄, 읍내에 나갔다 오는 길이었다. 신호대기 중인 내 차를 대형트럭이 뒤에서 박았다. 차는 폐차가 되었고 나는 혼수상태로 중환자실에서 일주일간 깨어나지를 못했다. 임종을 맞이해야 할지도 모르는 처지에서 가족들은 내가 살아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고 했다. 복숭아의 봉지를 싸는 시기였지만 그깟 게 무슨 소용이었을까. 생사의 갈림길에서 깨어나기만 기다렸을 식구들을 생각하면 아찔해진다. 다행히 나는 일주일 만에 깨어났다. 부분 기억 상실이 있었고 다리가 좀 불편했지만, 가족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열린 두개 내 상처가 없는 외상성 거미막하출혈’이라는 병명으로 두 달이 넘게 병원 생활을 해야 했다. 병원에서 2개월여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날, 나는 복숭아밭부터 돌아보고 싶었다. 마침 복숭아를 딸 시기였다.
 

장희숙 씨는 몇 년에 걸쳐 기른 복숭아가 수확을 보기 시작한 때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리고 다음 해 복숭아 봉지를 씌우며 이 글을 썼다.
장희숙 씨는 몇 년에 걸쳐 기른 복숭아가 수확을 보기 시작한 때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리고 다음 해 복숭아 봉지를 씌우며 이 글을 썼다.

워낙 몸을 많이 다치고 아픈 상태라 내가 다시 복숭아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솔직히 고민이 되었다. 그래도 밭에 열린 복숭아는 마저 끝을 봐야 했다. 무슨 정신으로 복숭아를 수확했는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게 아니라 못할 것 같은 날에도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이끌고 과수원으로 가야 했다. 30도가 넘는 삼복더위에 모기에 물려가며 복숭아를 땄다. 새벽 시간에는 어지러워 나가질 못했다. 아들이 눈을 비비고 나간 뒤 한참 지나 내가 과수원으로 나갈 수 있었다. 작업복을 걸치고 밭에 나가 복숭아를 따서 선별작업을 했다. 중간중간 농막에 들어가 누워 있다가 어지럼증이 사라지면 다시 작업했다. 몸에 무리가 갈까 조심하느라 느릿느릿 된장찌개를 끓이고 밥을 펐다. 설거지하다가 우연히 바라본 나무에서 복숭아가 힘을 내라고, 빨리 나으라며 '파이팅'을 외쳐주는 것 같았다. 산들바람이 친구가 되어 주기도 했다. 둑에 핀 개망초꽃과 눈이 마주쳤다. 지는 것도 서러운데 꽃잎이 시들어 떨어질 땐 아픈 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백내장 수술로 눈이 침침하신 시어머니는 아픈 며느리에게 힘을 보태기 위해 무거운 복숭아 상자를 번쩍번쩍 날랐다. 죄송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코로나로 집에서 줌(ZOOM·화상프로그램)수업을 받던 아들이 아니었으면 자식 같은 복숭아를 땅에 다 쏟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복숭아 농사에 애착을 가진 것을 알기에 아들은 자기 나름으로 도왔다. 엄마의 소중함을 알기에 나를 위로해 주는 길이 복숭아 농사를 도와주는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줌으로 수업을 듣고 밤에 과제를 하던 아들이 사흘 내내 코피를 쏟았다. 겁이 덜컥 났다. 아들이 안쓰러워 마음이 아려왔지만, 별일 아니라며 엄마를 안심시키는 아들의 말에 가슴이 더 아팠다. 모든 게 괜찮고 괜찮아질 것이라고 최면을 걸면서 복숭아 따기를 도왔다. 제대로 봉지도 못 씌웠고 복숭아 딸 시기에 비가 많이 와서 좋은 품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복숭아 농사를 끝낼 수 있었다.

요즘 들어 진하게 여름 냄새가 난다. 숨이 헉헉거리고 열매와 이파리가 헛갈릴 정도로 빙빙 돈다. 작년 한 해 쉬었다고 복숭아가 더위로 서운함을 표하나 보다. 나무가 낮은 곳은 무릎을 꿇고 일해야 한다. 고개를 숙이고 봉지를 씌우다 나도 모르게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장갑으로 훔친다. 복숭아 봉지를 다시 씌울 수 있을지 선명하지 않았던 그때가 뇌리를 스칠 때면 자꾸 눈물이 난다.

대장이 되기 위해 복숭아나무를 심고 영농교육을 다녀 반전문가라 여기며 복숭아 농사를 지어왔다.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여유와 품격이 있는 과수원을 만들기 위해 나름 피, 땀, 눈물을 쏟았다. 53년 만에 나의 특기가 톱질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 이 관계를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 소중한 기억으로 가득 찬 과수원이 자꾸 눈에 아른아른하다.

식구들은 모두 과수원을 접으라고 하는데 나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몸이 많이 회복되어 다시 농사를 지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남편과 아이들한테 사정사정했다. 그동안 쌓아온 농사 실력이 아까웠다. 자식같이 아껴온 나무들을 다 엎어버릴 수는 없었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부탁하여 과수원의 반만 다시 논으로 복구시켰다. 나머지는 과수 농사를 계속 짓기로 했다.

과수원을 논으로 만들기 위해 굴착기가 동원되었다. 뽑아낸 뿌리를 실어 가는 트럭이 붕붕 대고 소란했지만, 내 마음은 더 시끄러웠다. 과수원을 다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함에 고개를 들기도 죄스러웠다. 시어른들과 동네 사람들이 구경을 나왔다. 어른들이 계시는데 퍼질러 앉아 울 수도 없었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내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농막으로 들어가 버렸다. 숨어 앉아 남은 복숭아나무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사고 1년이 지난 지금, 과수원에서 다시 일한다는 게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시큰거리는 다리 때문에 불편한 것을 본 남편이 고소작업차를 사 주었다. 자동으로 오르내리며 가지치기를 할 수 있고 적화나 열매를 솎을 수 있다. 편하게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남편의 세심함에 감사한다.

지난밤부터 지속하던 가뭄이 해소되는 단비가 오고 있다. 목마름 끝에 한 모금 물이 얼마나 단지.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를 듣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긴 병원 생활도 이겨 냈는데 이젠 세상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다. 통증이 밀려와도 난 복숭아 수확 철인 7월이 마냥 기다려진다.

다시 복숭아 봉지를 씌울 수 있어 다행이다. 아직 한의원에서 침을 맞아야 하고, 가끔 빙빙 돌 때도 있지만 이만하면 움직일 만하다. 정수리가 타는 듯한 뜨거운 태양도 고맙고, 더위를 싣고 온 묵직한 바람도 좋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듯이 다행히 나도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있다. 무릎의 통증도, 어지러움도 모두 모아 봉지 속에 싸매어 멀리멀리 날려 보낸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나를 일으켜 세워준 것은 누가 뭐라 해도 사랑하는 가족과 복숭아의 힘이었다. 먼 훗날 생을 마감하는 날, 내 몸에서는 복숭아 향기가 진동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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