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정(한국농촌사회학회 운영이사)

[한국농어민신문] 

도시 뒷받침하는 공간으로 대상화하면
농촌 파괴와 농민 피폐 막을 수 없어
사람-생물이 주체인 ‘생태적 장소’로 봐야

3년 만에 추석 대이동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고향을 다녀갔다. 농촌에서는 ‘고향 방문을 환영’하는 현수막을 내걸고, 이르게 수확한 사과, 배, 포도 등 햇과일로 도시민을 환대했다. 오랜만에 농촌을 방문한 이들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농촌의 풍요로운 논밭과 아름다운 자연을 보며 평화를 느꼈을까?

가을볕에 이삭이 여물고 들녘은 노랗게 물들어간다. 멀리서 바라보는 들녘은 풍요롭고 평화로운 풍경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주 다른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전국의 성난 농민들이 쌀값 보장을 요구하며 트랙터를 끌고 와 수확을 앞둔 논을 갈아엎는 것이다. 지난 21일, 우리 지역 농민결의대회에 모인 농민들도 수확을 앞둔 논을 갈아엎었다. 축문을 읽는 목소리는 격앙되었고 일부 농민들은 눈물을 훔치며 서로의 등을 쓸어주었다.

밖에서 보면 농촌은 풍요롭고 평화로운 공간이지만, 농촌은 치열한 삶의 현장이고 일터이다. 농촌은 삶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며, 농촌에는 농지를 지키며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민들이 있다. 또 토박이 문화를 지키며 살아가는 주민들이 있고, 농촌 생태계를 유지하는 다양한 생물들이 있다. 이들은 농촌이라는 ‘공간’을 삶의 역사가 이어지는 ‘장소’로 만들어가는 땅의 주인들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농촌을 사람이 살아가는 장소로 여기기보다는 주인이 없는 곳, 개발지나 체험지와 같은 ‘공간’으로 대상화하는 담론이 팽배한 듯하다. 농촌을 대상화하는 담론은 산업화, 도시화와 함께 강화되었다. 1960~1970년대 권위주의 정부의 집권 하에 제1차 국토종합계획(1972~1981)이 수립되었다. 그런데 미국이나 유럽이 지역 단위 계획(regional plan)을 세운 것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국토종합계획은 국가적 차원에서 국토를 하나의 경제단위로 보는 계획이다. 이 계획은 대한민국이라는 단일 경제체를 운영하기 위해 자원 제공과 공업이라는 기능을 지역별로 배치하고, 각 지역의 자원이 효율적으로 교류될 수 있도록 운송 시설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이 국가적 차원에서는 농업과 공업의 병행 발전이라는 농공병진 전략을 강조했지만, 사실상 농촌 지역은 거점도시를 위한 곳간이자 미개발지로 대상화되었으며, 농민은 도시민을 위해 값싸고 좋은 먹거리를 생산해야 했다.

최근 들어 수도권 과밀화와 지방과소화, 농촌소멸 등 위기감이 증대되면서 균형 발전과 로컬(lodal)에 대한 정책적 관심도 커지고 있다. 2023년부터 인구감소지역 지원 특별법, 지방자치분권 및 지역균형발전에 관한 특별법, 농촌공간 재구조화 및 재생지원에 관한 법률, 고향사랑기부금에 관한 법률 등 지역의 내생적 발전을 뒷받침할 법률이 시행을 앞두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농촌을 도시민의 곳간, 도시민을 위한 체험 공간으로 여기는 담론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농촌 주민의 반대와 저항에 부딪히고 있는 풍력, 태양광 발전시설 등 신재생에너지 정책이 그렇다. 농민은 기후위기에 가장 취약한 집단이며 그렇기에 기후변화의 위협을 가장 먼저 느끼고 있다. 농촌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날씨 때문에 ‘이제 하늘과 동업은 끝났다.’고 탄식하는 농민들을 만나기 어렵지 않다. 농민들은 기후변화의 최전선에서 위기를 감지하고 그 피해를 고스란히 감내하고 있다. 그런데 신재생에너지 시설이 농토를 침범하면서 농촌에 들어서고 있고, 그 과정에서 마을 공동체가 몸살을 앓는 것이다. 탄소를 더 많이 배출한 기업이 더 큰 책임을 져야 하며, 국민 전체가 골고루 탄소 감축의 부담을 나누어야 한다. 즉 탄소중립과 신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이라는 좋은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농촌을 재생에너지 생산지로 보는 시선은 매우 우려스럽다.

서울시교육청이 시행하는 ‘농촌유학’ 프로그램도 그렇다. 농촌유학 프로그램은 서울시 학생들이 6개월 정도의 기간을 정해 농산어촌 현지 학교에 다니면서, 계절의 변화, 제철 먹거리, 관계 맺기를 경험하고 생태 감수성을 키울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농촌유학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서울시 학생들의 만족도는 높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이 프로그램이 농촌 현지 학교의 학생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된 바가 없으며, 현지학생의 만족도조차 발표된 것이 없다. 이 프로그램에서 현지학생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농촌공동체에는 외지로의 이주를 계층상승과 연결하는 강력한 서사가 존재한다. 청년들은 농촌에 남아 있는 것에 대한 낙인을 스스로 부여하기도 한다. 농촌 학생들에게 졸업 후 진로를 물어보면 흔히 ‘아무튼 여기 살지는 않을 거예요’라고 답한다. 어쩌면 학생들은 도시로 떠나기 위해 배우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즉 농촌유학 프로그램의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지역 아이들의 꿈을 키우는 장소여야 할 농촌학교를 도시민에게 생태교육을 제공하는 체험 공간으로 도구화하는 것은 아닌가 우려스럽다.

농촌 지역을 국토 단위에서 도시를 뒷받침하는 공간으로 대상화한다면 농촌의 파괴와 농민 삶의 피폐화는 막을 수 없다. 농촌을 그 지역 사람과 생물이 주체가 되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생태적 장소로 보는 담론의 전환이 필요하다. 효율적 생산보다는 농민과 농촌 사람들의 생존, 토박이 문화와 농촌공동체 유지, 농촌 생태계 유지를 먼저 생각하는 담론이 확장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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