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인 소장(마을연구소 일소공도)

[한국농어민신문] 

‘줄서기’에 경쟁 일삼던 과거 청산하고
마을과 마을이 협력해 공동문제 해결
네트워크로 발전해 농촌정책 중심돼야

당사자운동이란 말이 있다. 사회적 차별이나 억압, 혐오와 같은 부조리를 직접 겪고 있는 당사자 스스로가 문제 해결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오래된 주장이다. 주민운동이나 장애인 인권운동 같은 소수자 영역에서 발달해 왔다. 당사자가 아닌 자는 당사자의 고통을 정확하게 알 수 없고, 또 잘못 이해하거나 시혜적으로 접근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말하게 하라”는 원칙을 강조한다.

농촌 마을공동체운동도 마을 주민들이 직접 주인공으로 나서는 관점을 오랫동안 중시해왔다. 마을에 실제 살며 문제 해결을 위해 스스로 전면에 나서는 주민이야말로 진정한 당사자라 할 수 있다. 그들이 실천 주체로 직접 등장할 때 당사자성도 확보할 수 있다. 행정이나 중간지원조직은 어디까지나 서비스를 제공하고 지원하는 조직인 셈이다. 농촌정책에서 강조하는 ‘주민 주도, 상향식’도 이런 관점을 반영한 원칙인 셈이다.

하지만 한국 농촌 현실에서 이러한 당위적 원칙을 실현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역사적으로, 사회구조적으로 여러 이유가 있다. 첫째, 지방자치의 경험이 너무 미흡하고 풀뿌리 보수주의가 만연하다. 당사자 스스로 정치적 권리의식이 미약하다. 둘째, 주민이 실질적인 권한을 가져본 적이 없고, 사회단체도 분열되어 있다. 권력을 행정이 독점하는 관행이 여전히 강고하고, 민간단체 칸막이도 행정만큼이나 높다. 셋째, 도시화의 물결 속에 인적 자원은 고갈되고, 당사자 조직도 발달하지 못했다. 시군 지자체 단위의 민간단체는 대체로 전국 혹은 광역의 지부 성격이 강하고, 상근자까지 두는 조직은 찾기 어렵다. 면 단위로 내려오면 더욱 심각하다.

결국 이런 구조적 요인 속에서 농촌 문제 해결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당사자운동의 중요성은 여전히 중요할 수밖에 없다. 당사자가 직접 나서지 않는 한, 외부에서 지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오히려 부작용이 더 클 수 있기 때문이다. 소위 역량강화사업이란 것도 당사자가 스스로 조직을 만드는 과정을 도와주는 것이 핵심이다. 그래서 교육이 아닌 학습을 중시하고, 학습동아리 활동도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민이 당사자고 마을이 당사자 조직이라면 마을과 마을은 어떻게 협력이 가능할까? 여기에는 “우리 마을의 문제는 모든 마을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마을의 경관환경 관리, 농산물의 안정된 판매, 노인복지 문제, 청년 후계자 양성 등은 모든 마을마다 공통된 숙제이기 때문이다. 마을과 마을이 협력하고 ‘한목소리’를 낸다면 해결 못할 과제가 절대 아니다. 적어도 지방정치의 관행적 풍토를 보더라도 전체 마을의 10%만 조직되어 있어도 절대 무시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농촌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행정리 마을의 한계를 극복하고 마을 사이의 칸막이를 극복하는 것이다. 인구감소, 초고령화, 혼주화(混住化) 등은 눈에 보이는 현상일 뿐이다. 마을과 마을이 연대하고 협력하며 공동의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려는 방향과 실천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공모방식의 행정보조사업은 마을과 마을을 분단시키고 서로 경쟁하는 관계로 만들었다. 이런 점을 반성하며 행정보조사업에 ‘줄 서며’ 서로 협력하지 못했던 과거를 빨리 청산해야 한다.

아무리 많은 행정예산을 ‘끌어와도’ 마을이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행정보조사업은 ‘약’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독’이 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지난 20여년의 경험으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이제는 마을과 마을이 협력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공동의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방향으로 연대와 협력의 네트워크를 구축할 것인가? 다음과 같은 방향성이 핵심이다.

첫째, 시군 지자체 단위로 마을만들기협의회를 조직해야 한다. 마을공동체운동을 먼저 경험하고, 문제의식도 많이 가진 마을 위원장들이 모여야 한다. 후배 마을의 시행착오 경험을 줄이고, 제도개선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행정리 마을 사업이나 권역사업, 체험휴양마을, 읍면 단위 사업 등의 행정사업별 칸막이를 극복하고 마을만들기라는 관점에서 당사자들이 모여야 한다.

전북 진안군의 마을만들기지구협의회가 구성되고 발전해온 역사적 경험에서 배울 점이 많다. 진안군 협의회는 20여년에 걸쳐 사업별 칸막이를 극복하여 설립하고, 다양한 사업을 펼치며 행정과 대등한 협력관계를 구축해왔다. 또 2019년 10월에 결성된 충남마을만들기협의회의 경험도 소중하다. 충남 협의회는 13개 시군 협의회가 모인 광역 협의체에 해당한다. 지난 민선8기 도지사선거에서는 후보자들과 정책협약을 체결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이렇게 마을과 마을이 협력하여 네트워크로 발전하고 농촌정책의 전면으로 등장하는 경로는 충분히 가능하다.

둘째, 읍면 단위 주민자치(위원)회와도 강하게 결합해야 한다. 행정리 마을은 규모가 작기에 제도적인 해결책을 찾기 어려운 문제가 많다. 가까운 이웃 마을과 협력하면 지역문제를 해결하기가 더욱 수월하다. 지역농업의 조직화, 먹거리복지의 실현, 마을요양원 설립, 청년 귀농귀촌인 유치 등도 읍면 단위에서 결국 실현된다. 주민자치회 산하에 마을공동체분과를 설치하고, 모든 행정리 마을의 공통과제에 대해 논의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주민자치회가 주도하여 마을자치계획과 읍면발전계획도 수립하고, 주민총회를 개최하여 과제의 우선순위도 정하는 민주주의 훈련을 반복해야 한다. 필요한 예산은 주민참여예산제 방식으로 확보할 수 있고, 또 ‘한목소리’로 합리적 제안을 한다면 행정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전국 농촌의 선진 주민자치회에서 이런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유튜브 동영상만 검색해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확산중이다.

셋째, 유사한 활동 영역 사이에 칸막이를 극복하며 네트워크 법인도 설립해야 한다. 마을공동체와 주민자치, 사회적경제, 평생학습, 귀농귀촌, 농촌관광 등의 영역은 공통적으로 당사자협의체가 발달해왔다. 이들 단체가 지향하는 사회적 가치는 대체로 공통분모가 많고, 협력관계를 구축할 때 각자의 목표 실현도 훨씬 유리하다. 그래서 네트워크 형식의 비영리 법인을 설립해야 하고, 그러면 행정과의 대등한 협력관계도 가능하다. 중간지원조직의 통합형 설치도 기대할 수 있다.

전국적으로 이런 네트워크 법인은 여전히 사례가 많지 않다. 그만큼 민간단체 사이의 칸막이가 심각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농촌에서 당사자운동이 발전하여 네트워크 법인까지 설립하는 방향, 그리고 이런 법인이 튼튼하게 지역사회에 뿌리내리는 것은 아마도 가장 큰 난제에 해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당사자가 주인공이 되어 농촌정책의 전면에 나서고, 농촌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자면 이런 방향성이 매우 중요하다. 결국 당사자협의체, 주민자치회, 네트워크 법인이 농촌문제 해결의 핵심 열쇳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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