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인 소장(마을연구소 일소공도)

[한국농어민신문] 

사회적 차별이나 억압, 혐오와 같은 부조리를 직접 겪고 있는 당사자가 스스로 문제 해결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오래된 주장이 있다. 주민운동이나 장애인 인권운동 같은 소수자 영역에서 발달해 왔는데, 비당사자들은 당사자들의 고통을 정확하게 알 수 없고, 혹은 잘못 이해하거나 시혜적으로 접근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말하게 하라”는 원칙을 중시하고, 농촌 마을공동체운동도 마을 주민들이 직접 주인공으로 나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행정이나 중간지원조직은 어디까지나 서비스를 제공하고 지원하는 조직인 셈이다.

지금까지 농촌정책에서는 ‘주민 주도, 상향식’을 노래 부르듯 강조했다. 하지만 행정의 보조사업에 주민들을 ‘줄서게’ 하는 경향이 강했고, 거버넌스도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행정이 강하게 주도하는 꼴이었다. 주민이 주도할 수 있는 권한을 행정이 부여하는 방법을 잘 몰랐고, 지난 100년간의 모순이 응축되어 주민 스스로 나서려고도 하지 않았다. 마을공동체운동이 당사자운동으로서 성장하려면 어떤 변화를 모색해야 할까?

2002년 이후에 정부 부처별로 각종 마을사업이 급속하게 늘어났다. 산촌마을이니 정보화마을, 녹색농촌마을, 전통테마마을 등이 있고, 여기에 유사한 정책사업을 나열하자면 훨씬 더 많다. 이런 정책사업은 모두 공모 방식의 보조사업이라는 점이 공통점이고, 사업을 희망하는 마을에서는 주민 다수가 참여하는 추진위원회를 구성하도록 요구했다. 그래서 추진위원회의 대표가 위원장인 셈이고, 행정 공모사업을 추진한 모든 마을마다 있는 셈이다. 공모사업에 여럿 선정되면 위원장이 두세 분이 있기도 하고, 한 분이 모두 겸임하기도 한다.

이런 방식의 사업 추진이 이제 20여 년이 되었고, 위원장이란 호칭도 매우 익숙해졌다. 마을에 따라 이장과 권한 다툼으로 갈등이 심각한 경우도 있고, 전직과 현직 위원장이 다투는 경우도 있다. 공모사업 액수가 클수록 이런 갈등 현상은 더 심각하다. 마을 내부의 조직이나 이해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공모사업마다 위원회를 구성하도록 요구하는 방식이라 행정이 마을의 갈등을 부추기는 꼴이 된다. 이제는 이런 위원회 방식의 제도가 가진 성격과 의미, 문제점을 다시 되짚어보고 개선방향도 찾아야 할 시점이 되었다.

먼저, 사업기간만이라도 위원장에게 활동비를 지원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이장 제도와 비교하면 그 필요성이 명확하다. 이장은 법률과 조례에 임명 근거도 있고, 행정에서 수당도 받으며, 매월 1~2회 정기회의를 통해 행정 정보도 깔끔하게 정리된 문서로 받아본다. 이에 비하면 위원장은 사업지침에만 근거가 있고, 사업기간 중에만 권위(?)를 인정받으며, 끊임없는 자원봉사로 활동해야 한다. 업무량은 어느 쪽이나 열심히 하기 나름이라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하지만 시설물 건축(하드웨어)사업이 포함되어 있으면 위원장은 인허가 과정과 건축 관리·감독, 그리고 사후관리까지 요구받는 경우가 많아 결코 가볍지 않다. 이런 추진과정에 인건비는 결코 지원되지 않고, 상근 혹은 반상근 활동가가 배치되는 것도 아니며, 그래서 대개는 용역사에 일임해 버린다. 이장에 비해 결코 책임성도 약하지 않은데, 제도적 측면의 지위도 권한도 매우 미약한 셈이다. 마을공동체 활동의 공공성을 인정한다면 사업기간으로 한정하더라도 활동비를 이제는 지급해야 거기에 걸맞은 책임도 요구할 수 있다.

둘째, 위원장과 이장의 관계는 처음부터 명확히 구분해 접근할 필요가 있다. 대개 “한 마을에 우두머리가 둘일 수 없다”는 논리도 있어 마을공동체 활동의 초기단계에는 겸임하는 경우가 많다. 행정의 작은 사업예산을 지원받을 때까지는 이렇게 갈 수 있고 그것이 편리한 셈이다. 하지만 소위 ‘역량단계별 지원체계’에 따라 3~4년 활동을 지속하면 이장이 도무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업무량이 늘어난다. 결국 건축물을 짓는 단계에서는 사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행정과 용역사가 주도하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

결국 위원장과 이장의 역할은 서로 다른 셈이고, 처음부터 분리할 것을 전제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느 시기에 어떻게 분리할 지는 마을 스스로가 판단할 사항이다. 역할 분담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을 규모가 작거나 합의가 잘 되지 않는다면 작은 프로그램사업만 계속 반복하면서 새로운 사람이 등장할 때를 기다리는 것이 더 낫다. 이장은 행정과의 창구 역할에 충실하고, 대신에 위원장은 마을의 경제사업이나 프로젝트를 담당하며, 서로의 협력관계를 잘 설계할 수 있을 때 그 마을의 미래는 밝은 셈이다. 마을공동체 활동의 ‘권한과 책임’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갈등을 예방하고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길’이 된다.

셋째, 위원회라는 명칭과 신청자격도 재검토할 여지가 많다. 공모사업 신청서에 첨부된 추진위원회 명단은 대개 형식적이다. 위원장 정도가 역할로 명확하게 두드러질 뿐 마을회(새마을회, 마을자치회 등)와 별 차이가 없다. 공모사업별로 따로 설치되고, 심의와 의결기능은 형식적으로만 작동될 뿐이며, 집행기능은 위원장의 자원봉사에만 의존할 뿐이다. 마을에서 주민조직도를 그린다면 추진위원회를 어떻게 배치해야 할지 여전히 어렵다. 법인도 아니고, ‘주민 다수’로 구성된 실체도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책적으로 조금 더 관심이 있고, 개혁의지가 있다면 기존의 이름뿐인 개발위원회를 정책사업의 집행조직으로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 있다. 나아가 공모사업 신청자격으로 상투적인 추진위원회가 아니라 마을 내에서 권한과 책임을 명확히 부여받은 법인이 더 선명할 수 있다. 마을 이름으로 공모사업을 추진하되, 주민총회에서 권한을 서면으로 위임받은 법인이 책임 주체가 되는 것이 사후관리 측면에서도 효과적이다. 그래서 마을법인 설립을 더 자극하는 것이 중요하다.

위원장 제도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은 행정리 마을 내부에 다양한 정책과 제도들이 개입되어 있음에도 정작 그 관계성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장제도가 그러하고 개발위원회, 추진위원회, 새마을조직 등이 그러하다. 행정사업별로 그때그때 대응하는 정도에 그치고, 5년, 10년 앞을 내다보는 구상을 하지 못한 채 보조사업만 집행하는 셈이다. 이제는 행정 지원과 마을자치 사이의 균형이란 관점에서 마을에 들어와 있는 각종 행정 제도와 조직들을 정비해야 할 시점이다. 당사자인 마을 주민 스스로가 이런 사례를 만들면 더 좋겠고, 여기에 행정과 중간지원조직이 적절한 지원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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