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인 소장(마을연구소 일소공도)

[한국농어민신문] 

농촌 마을을 함께 걸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오래 살았던 귀농인도 있고, 귀향한지 얼마 되지 않은 주민도 있다. 세 시간 정도 걸으면서 서로의 아는 정보를 나누고, 같은 사물을 보고도 생각의 차이가 있음도 확인한다. 깨끗한 자연환경, 풍요로운 인심, 안정된 노후대책 등 지역사회 발전방향도 자연스레 논의하게 된다. 길을 걸으며 동지(同志)를 만나고, 또 만든다는 느낌이 든다.

바야흐로 봄의 계절이 왔다. 꽃들도 피기 시작하고 벚꽃도 만개하였다. 사람들 마음도 환해지고, 웃음소리도 자주 들린다. 농사철에 들어가니 마을 곳곳에 경운기와 트랙터가 바쁘게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대선 이후 국정도 농정도 어떻게 변할지 잘 모르겠지만, 또 올해 소득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지만 언제나처럼 씨 뿌리고 거두는 일은 계속된다. 농업이 아무리 어렵고 농촌살이가 힘들다 해도 이런 ‘경작본능’을 가로막지는 못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정책을 다시 말할 수밖에 없다. 국가와 행정의 정책이 농촌 주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어디가 문제의 핵심인지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정책을 현장 중심으로 바꾸기 위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때다. 대의제 민주주의 상황에서 선출직 몇몇이 바뀌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과제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들을 하면서 지난 3월부터 마을연구소가 기획하여 홍성군 장곡면 32개 마을회관 전체를 걸어보는 행사를 시작하였다. 농촌 마을을 두 발로 걸으며 역사와 문화, 자연을 몸으로 알아가고 지역사회와 친숙해지자는 취지였다. 농촌 현장에서 앎과 삶을 일치시키려 노력하자는 연구소 설립 취지도 담고 있다. 코로나19 상황이라 10인 이내로 참가자를 제한하고, 농번기가 시작되는 4월 중순에는 마쳐야 한다는 제약도 있다. 길을 걸으며 여러 생각들이 스치고, 새로운 다짐도 하고 정리도 된다.

무엇보다 주민들도 가보지 않은 이웃 마을이 많다는 점에 놀라게 된다. 농촌 면은 대개 면소재지 기준으로 사방 10리(4km)에 걸쳐 있다. 직진으로 종단한다면 천천히 걸어도 3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지만 마을과 마을을 잇는 고갯길을 걷는다면 두세 배 시간이 걸릴 수 있다. 그런데 하천이나 능선으로 생활권이 구분되다 보니 의외로 서로 왕래가 많지 않음을 확인하게 된다. 면소재지에서 만나는 경우는 있어도 끝 마을을 방문한 적은 평생 한 번도 없었다는 소리도 듣는다. 1914년 일제 식민지통치의 일환으로 현재의 행정구역이 확정된 이래로 100년이 넘었는데, 아무리 교통이 발달했다 해도 주민생활권으로 이 정도 면적도 사실 좁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새삼 확인한다.

마을길을 걸어보니 농촌 생활환경이 열악하다는 것을 더욱 절실하게 느낀다. 어르신들이 이동하기에 위험한 구간도 많고, 빈집도 너무 많다. 새로 이사 오신 귀촌인이 지은 집과 기존 주민 집은 겉모습만으로도 확연하게 차이가 있다. 예쁜 울타리에 캡스를 설치하고, 큰 개가 지키는 경우는 어김없이 귀촌인 집(일부는 주말용)이다. 농촌답지 않은 경관인데 쓰레기문제가 특히 심각하였다. 작년 고추농사 짓고 회수하지 않은 비닐멀칭이 바람에 날려 전선줄, 나뭇가지에 까마귀 춤추듯 걸려 있다. 마을 도랑과 저수지에도 넘쳐난다. 이런 문제조차 정책이 대응하지 못하는 현실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난개발 문제가 심각한 것도 다시 확인한다. 운전하며 다닐 때는 몰랐지만 막상 걸어보니 눈에 잘 띄지 않는 골짜기에는 어김없이 태양광과 대형 축사가 들어와 있다. 수종갱신이란 명분으로 산림 벌채도 심각하게 이루어져 보기에도 좋지 않고 뒤처리도 미흡하다. 석산개발이나 건설폐기물매립지, 골재 채취, 고속도로 고가구간 등 곳곳에서 주민반대 현수막이 걸려 있다. 마을 주민들과 사전에 협의되지 않은 채 진행되는 개발사업이 지금도 많은 셈이다. 주민들은 정보도 취약하고 힘도 없다 보니 ‘뒷북’을 칠 수밖에 없고, 이런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단체는 여전히 부족하다. 난개발을 예방하고자 농촌공간계획이란 정책도 시작되었지만 몇 개 프로젝트로 이런 문제에 대한 대책이 될지 의문스러울 뿐이다.

농촌 마을을 함께 걸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오래 살았던 귀농인도 있고, 귀향한지 얼마 되지 않은 주민도 있다. 세 시간 정도 걸으면서 서로의 아는 정보를 나누고, 같은 사물을 보고도 생각 의 차이가 있음도 확인한다. 깨끗한 자연환경, 풍요로운 인심, 안정된 노후대책 등 지역사회 발전방향도 자연스레 논의하게 된다. 길을 걸으며 동지(同志)를 만나고, 또 만든다는 느낌이 든다. 아주 대단한 정책이 아니라도 지역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도 회복하는 것 같다. 자꾸 걷다보니 힐링 프로그램으로 이만한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스레 예전 진안군에서 진행했던 진안고원길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2006년에 시작했던 마을조사단이 발전하여 2008년부터 진안마실길이란 걷기 프로그램으로 확장되었다. 여러 비판적인 소리도 있었지만 “사람 다니는 모든 길에는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으며, 그 의미를 알면 상상력은 확장되고 감동도 배가된다”는 주장이 동의를 얻어 2011년 4월에 진안고원길이란 단체도 발족하였다. 총 16개 구간의 216km에 걸쳐 진안군 전체 마을을 원형으로 잇는 방식으로 코스가 설계되었다. 전체 코스를 걸어보는 장기 프로그램은 인기를 얻었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그 당시 귀농귀촌 희망자를 위한 교육장으로 이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도 하고, 주민자치위원회가 중심이 된 면 단위의 둘레길 개척도 구상하였다. 또 국토종주길과 용담호 수몰길, 금호남 정맥길 등으로 확장하여 ‘도보여행길의 천국, 진안’을 꿈꾼 적도 있다. 기존의 마을만들기 활동 전반과 맞물려 씨줄, 날줄로 연결되고 인간적 만남과 교류의 장이 강화된다면 또 다른 농촌 발전 모델로 발전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물론 이렇게까지 발전하지는 못했고, 여기에는 여러 이유들이 겹쳐 있을 것이다.

장곡면 32개 마을을 걸으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하고 힘도 얻었다. 주민들은 여전히 ‘좋은 세상’을 꿈꾸고, 작지만 실천하려는 의지가 있음을 본다. 문제가 심각한 만큼 해결하려는 의지도 움트는 셈이다. 누가 이런 마음을 끌어내고 서로 연결시킬 접착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행정은 무엇을 해야 하고, 정책은 어떻게 부응해야 할까? 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찾지 못했을 뿐이고, 꿈을 모아내지 못했을 뿐이다. 농촌소멸 운운하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고, 농촌 없는 도시도 상상할 수도 없다. 봄이 오는 농촌 마을을 걸으며 다시 한 번 신발끈을 조여 본다. 농한기에는 농촌 주민들이 함께 마을 걷기 프로그램을 곳곳에서 진행해보자고 제안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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