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천 춘천두레생협 이사

[한국농어민신문] 

‘기계적 공정’은 세상을 망칠 뿐
시장상품경제가 공정하려면
기울어지고 무너진 쪽부터 일으켜야

12월의 일상 속에서 겪은 2개의 장면을 소개한다. 가볍다면 가볍고, 무겁다면 무겁다.

(장면 1) 딩동, 카톡이 왔다. “형님, 주소 좀 알려주세요.” “여름에 보고 못 봤고 연락도 꽤 오래간만인데, 갑자기 주소라니 왜요?” “귤 따기 시작해서 좀 보내드리려고요.” “허, 내가 그걸 받을 자격이 되겠습니까?” “먹는 데 무슨 자격이 필요해요?” “그런가요? 먼저 주소 알려주면 나도 주소 남길게요. 제주도는 귤이 흔하고, 여기는 닭갈비가 흔하거든요.” “아이참, 우선 주소부터 좀 알려 주세요.”

가벼운 실랑이 끝에 주소를 교환했다. 며칠 뒤 귤 10kg 박스 택배가 왔다. 역시나 껍질은 까끌까끌 얼룩덜룩, 크기는 들쑥날쑥 제멋대로다. 선별하지 않은 유기농 귤이다. 딸은 못난이 귤이라고 놀린다. 잘난 귤과의 차이점을 설명하다 보니 좀 꼰대스럽다. 그래도 어릴 때부터 먹어왔으니 잘 알아듣는다.

어쨌든 넙죽 받아먹을 자격은 내게 없다. 춘천두레생협의 인기있는 로컬생활재인 자활공동체 닭갈비를 보내려 쇼핑몰 클릭을 했다. 이런, 제주도가 섬이기는 하지만 외딴 섬도 아닌데. 섬은 택배 배송이 안 되는 품목이라고 한다. 방법은 있다. 작업장으로 가서 직접 박스에 넣어 보내면 된다. 그렇지만 연말이라 택배가 늦어질 수도 있으니, 닭갈비 대표님이 걱정하실 것 같다. 결국 다른 업체의 닭갈비를 보냈다. 포장 덕이든 보존제 탓이든 오래는 간다. 과수원 일 끝나고 식구들과 볶아 먹고 구워 먹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귤도 같이 구워 먹으려나. 닭갈비에 곁들이는 채소들은 당연히 빼고 보냈다. 설마 고구마 양배추가 없겠나. 어쨌든 젊은 농부, 당신은 받을 자격 먹을 자격이 있다.

(장면 2) “아빠, 우리 아파트에 밀키트 가게가 생겼어.” “밀키트 가게? 그것만 팔기도 하나? 그런데 생길 자리가 없을 텐데?” “세탁소 자리에 어제 생겼어.” “결국 세탁소가 사라졌구나.”

정확히는 우리 아파트가 아니라 마주한 아파트의 작은 상가다. 눈여겨보니 늦은 밤에도 불빛이 훤하다. 호기심에 들어갔다.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와 같은 방식이다. 냉장고마다 작은 용량의 여러 종류의 즉석식품이 들어차 있다. 밀키트는 약간의 손이 가야 하는데, 데우면 바로 먹을 수 있는 종류가 더 많다. 무인 냉장고 가게다. 마을 단위의 공유 냉장고를 운영하는 공간이 여기저기 생겨나고 있다. 나름 규모가 되는 곳도 있고, 농촌에도 있고 도시에도 있다. 처음에는 의미와 포부를 갖고 시작하지만, 결국 지속적인 참여가 문제일 것이다. 춘천에도 없는 건 아니지만 소규모거나, 협동조합 회원 몇몇의 공동 냉장고 정도다.

위 2개의 장면은 아주 다른 이야기다. 그러나 공통의 탄식이 나온다. ‘시장상품경제’의 틈바구니에서 겨우 숨 쉬는 ‘호혜(互惠)의 경제’는 참 미약하고 참 아슬아슬하구나!

나는 귤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했다. 후배는 무슨 자격 타령이냐면서 귤을 보냈다. 호혜의 경제는 이처럼 누군가 먼저 움직인 힘에 의해서 연쇄적으로 작동하는 경제다.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여러 방식의 화답이 이어지는 경제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삼는 경제다.

2022년 코앞에서 무슨 낭만적이고 몽상적인 호혜의 경제 운운하느냐고? 그렇다면 다들 떠드는 ‘공정(公正)’이라는 화두는 어떤가? 시장상품경제는 수요공급곡선의 기울기에 따라, 냉정하게 운영되면 그만 아니냐고? 생산과 소비, 공급과 수요의 균형이 공정이라고? 웃기지 마시라. 그런 경제학은 100년 전에 끝났다. 그런 ‘기계적 공정’은 세상을 잔인하게 망칠 뿐이다. ‘호혜의 상상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덕분에 그나마 안 망한 것이다.

생산량이 늘었다. 공급이 늘 것이다. 소비는 일정하다. 상품 가격은 하락할 것이다. 여기까지가 공정이 아니다. 진짜 공정은 여기서부터다. 공급이 무너졌고, 무너져가고 있고, 무너질 것이다. 기울어졌고 더 기울어질 것이다. 시장상품경제가 공정하고자 한다면, 기울어지고 무너진 쪽을 일으키고 세우는 것부터다.

공급자가 사라지면 다음 공급이 가능하겠는가? 농업농촌은 단순 공급자가 아니다. 과도하다고? 편중된다고? 퍼붓기라고? 이미 할 만큼 했다고? 제발 그 유치한 경제학에서 벗어나시라.

호혜의 경제는 기울어지면 성립이 안 된다. 농사의 수고로움과 안타까움이 구조적으로 지속된다면, 호혜는 깨진다. 우리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제발 공정이라도.

농업농촌이 더는 황폐해지지 않도록, 약속한 정책은 당연하고, 할 수 있는 모든 정책을 다 해야 한다. 그게 시민이 부여한 국가의 책무이자 정치의 임무다. 당신들이 좋아하는 공정의 근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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