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길 논설위원·농정전문기자

어느 날 책상 위에 메모지 한 장이 남겨져 있었다. 기사를 읽고 물어볼 것이 있다는, 강원도 홍천의 귀농청년이었다. 무슨 일일까? 전화를 해보니 홍천에 귀농한 지 1년 됐다는 청년여성이다.

그가 봤다는 기사는 바로 농사꾼 사상가 천규석 선생과의 인터뷰였고, 자기들도 선생을 뵙고 교훈을 얻고 싶다는 것이었다. “천규석 선생님을요? 그 분이 추구하는 것은 가장 원칙적인 소농두레 공동체인데요? 청년들이 그것을 배우겠다고요?”

무엇을 물어 보려나 했는데, 천규석 선생과 소농두레라니, 다소 뜻밖이었다. “하려면 제대로 해야죠. 주변에 비슷한 친구들이 몇몇 있는데, 지금 농한기니까 함께 선생님을 찾아뵐 수 있을까요?” 진심을 가지고 농사를 대하는 청년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선생께 전화를 드렸다. 안부를 여쭈니, “그냥 그래요. 나이 들면 더 좋아지는 일은 없어요.”하신다. 매달 모여 선생의 철학을 공유하던 모임은 코로나가 조심스러워서 요즘엔 쉬고 있다고 한다.

청년들의 이야기를 전했더니, 흔쾌히 허락하신다. “그런 거라면 내가 만나야지, 허리가 좀 불편해도 그 정도 앉아서 이야기 할 수는 있어요.”

선생과 대화를 나누고 보니 마침 이 달에 받은 녹색평론이 눈에 들어온다. 천규석 선생은 녹색평론의 편집자문위원으로, 녹색평론 창간 때부터 고 김종철 발행인과 농본주의 사상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함께해 왔다.

이번 달은 녹색평론이 두 권이 왔다. 2021년 11~12월호와 창간호(1991년 11~12월). 창간호를 보면서 여러 상념이 교차한다. 지난해 6월25일 김종철 발행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공백이 컸지만, 녹색평론은 독자들의 격려와 후원으로 꿋꿋하게 잡지 발행을 이어왔다.

녹색평론은 올해가 창간 30주년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30주년을 채운 녹색평론은 이번호를 통해 내년 1년 휴간 소식을 전해왔다. 김종철 발행인의 딸인 김정현 편집장은 “사회적 분열과 생태계의 파손이 극에 달하고 녹색평론이 더욱 목소리를 높여야 할 이때에, 1년 휴간 소식을 알려드리게 되었다”면서 “보다 충실하고 의미 있는 작업을 안정적으로 지속해나가기 위한 준비와 모색의 시간으로 헤아려 달라”고 밝혔다. 지난 한 해, 독자들의 격려와 지원으로 녹색평론이 결호 없이 발간됐지만, 보다 충실하고 유의미한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기 위해서는 잠시라도 잡지의 발간 일정에 쫓기지 않고 편집실의 역량을 보강하면서 재정적 기반을 확보해야 할 필요성이 줄어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녹색평론의 1년 휴간을 보는 마음은 무겁다. 그것은 지속불가능한 근대문명의 대안으로 일관하게 농본주의를 설파한 김종철 전 발행인의 부재가 안타까워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껏 근대문명, 성장과 개발에만 올인하면서 자연과 스스로를 파괴해온 인류의 현실이 이제는 언제라도 멸망의 티핑포인트에 도달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악화됐기 때문이다.

최근 영국 글래스고에서 폐막된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는 기후위기에 대한 지구적 관심이 커진 것을 보여줬지만, 각국 이해관계가 얽혀 큰 진전은 없었다. 이번 총회에서 채택된 글래스고 합의(Glasgow Climate Pact)는 지구온도 1.5℃ 이내 상승 억제를 위한 기후행동 강화를 약속했지만, 그것은 합의일 뿐, 구속력은 없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탈 석탄 대신 석탄 감축으로 수정됐고, 석유와 천연가스 사용 제한은 언급되지 않았다.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하는 근대문명이 위기에 봉착해서도, 세계는 자본의 이해, 권력의 이해에 따라 그동안의 경제성장과 개발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공멸의 길로 들어서는 형국이다.

녹색평론은 생태환경 담론의 불모지이던 1991년 창간, 기후위기와 탈 화석연료를 가장 먼저 얘기해 온 곳이다. 기후위기와 코로나 시대에 재난을 이용한 돈벌이를 추구하는 재난자본주의, 가짜 기후대책이 판을 치는 시대에 순환을 중심으로 하는 생태문명, 농본주의, 민주주의를 추구해온 녹색평론의 휴간은 아쉽다.

그러나 절망 속에도 희망은 있고, 위기 속에도 기회는 있다. 그 희망은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천규석 선생에게 소농두레를 배우고 실천해 보겠다는 청년들이 바로 그런 경우다.

모든 걸 자기중심으로 바라보는 사회다. 힘들 것을 뻔히 알면서도, 돈벌이를 위한 계산보다는 실천을 통해 소농두레 공동체에 도전하려는 청년들이 반짝이는 이유다.

“옳은데도 그걸 실패한다고 안하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해봐야 성공할 수 있어요.” 돈을 벌고 명예를 좆는 대신 평생 원칙을 지킴으로써 ‘부러’ 실패하는 삶을 살아온 천규석 선생의 건강과, 청년들, 그리고 녹색평론의 건승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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