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인 소장(마을연구소 일소공도)

[한국농어민신문] 

읍면 사무소, 주민과 가장 밀접한 창구
생활밀착형 사무 이양, 공무원 늘리고
읍면 행정-주민자치회 협력모델 개발을

최근 문재인정부의 자치분권 정책 흐름에 맞추어 주민자치위원회를 실질적인 주민 대표기구인 주민자치회로 전환하는 추세에 있다. 선진적인 지자체일수록 빠르게 전환하고, 그런 경향은 광역별로 편차가 크다. 농촌 읍·면도 조금씩 이런 추세에 반응하고, 그동안 무심했던 농민단체들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읍과 면이 원래 자치단체였다는 기억은 잘 복원되지 못하고 있고, 그 의미도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다. 대신에 일부 보수단체의 정치적 이념공세에 색깔론이 확산되고 있다.

현재의 읍·면 행정구역은 1914년 일제의 식민지 지배 일환으로 정비된 결과이고 거의 변화 없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100년이 조금 넘는 역사를 가진 셈이고, 인구 수가 적다고 이를 통합하려는 시도는 주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닥쳤다. 1949년 제정된 지방자치법에서도 시와 읍·면이 기초자치단체였다. 이승만 정권이 전면 시행을 미루었지만 전쟁기인 1952년에 의원 선거가, 그리고 1956년에는 단체장 선거도 이루어졌다. 4년 뒤인 1960년에는 4.19 시민혁명을 통해 지방자치제가 온전하게 시행되었다. 하지만 1961년의 5.16 군사쿠데타로 지방자치법은 전면 중지되고 지방의회도 해산되었다. 지금도 읍·면사무소 2층 회의실에 예외 없이 걸려 있는 읍면장 사진 중에 1956년과 1960년에 임기를 시작한 사람은 주민 직선으로 선출된 대표인 셈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다시 상기해야 하는 이유는 농촌정책에서 주민참여를 촉진하고 ‘정책과 현장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려는 근본적인 문제의식 때문이다. 현재의 시·군 지자체 단위는 지나치게 규모가 크고, 그래서 ‘제도의 세계’에 해당하고 주민참여는 제도적 절차 속에서만 작동할 수밖에 없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려는 여러 시도가 있지만, 농촌에서는 이마저도 지자체 규모나 거리감, 이동성 등을 고려할 때 정말 쉽지 않다. 1991년의 지방의회 선거, 1995년의 단체장 선거를 통해 제도적 측면에서는 지방자치제도가 전면 부활되었다고 하지만 결국 크게 잘못된 선택이었던 셈이다. 1989년의 지방자치법 전면개정 과정에서 읍과 면이 자치단체의 지위를 잃고 대신에 시·군이 그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농촌은 이런 지방자치제 부활조차 ‘무임승차’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 이후에도 시장의 효율성과 규모화를 중시하는 신자유주의 분위기 속에서 작은 지자체를 통합해야 한다는 정책적 압력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그래서 1995년 이후 실제로 통합이 이루어져 현재의 도농통합시가 대부분 탄생했고, 지금도 그런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또 1999년의 IMF 경제위기 대책의 일환으로 공무원 수 감축이 이루어지고 읍면사무소 기능은 대폭 축소되었다. 그 이후에도 읍면사무소 기능전환이란 명목으로 역할과 권한이 계속 축소되고 있다. 농업인상담소도 2~3개 면이 통합하고, 농업 직렬 공무원 배치도 없어지는 추세다. 여기에 읍면사무소라는 익숙한 이름 대신에 행정복지센터란 간판으로 어느새 바뀌어버렸다. 도로명 주소가 의무화되면서 마을 이름이 사라진 것도 여러 해가 지났다. 여전히 읍·면의 지위를 축소하려는 정책이 곳곳에서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자치분권과 균형발전을 주장하는 사회운동도 있지만 시·군 지자체 권한을 읍·면으로 이양하자는 논의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최근에 주민자치회 전환이 하나의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작년 12월의 지방자치법 전면개정 과정에서 원안에서 삭제된 주민자치회 조항을 다시 복원하고, 또 주민자치기본법을 제정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하지만 시·군의 행정 사무를 읍면으로 어떻게 이양하고, 그래서 읍면 기능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지, 그래서 주민자치회와 어떤 협력구조를 설계할지에 대한 논의는 진전되지 않고 있다. 도시지역 주민자치회 중심으로 일부 이런 논의가 있지만 농촌에서는 찾을 수 없다. 농식품부는 이런 논의 자체를 강하게 기피하는 경향이다.

현재의 읍면사무소는 공공행정의 가장 하위 단위이고 주민 생활과 일상적으로 만나는 가장 밀접한 창구이기도 하다. 주민들의 꿈과 희망을 가까이에서 듣고 문제점도 가장 잘 아는(알아야 하는) 공공기관이다(이어야 한다). 또 행정 공무원으로서는 주민들을 현장에서 직접 만나보고 배우며 성장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훈련장이다. 농업을 기반으로 교육과 문화, 환경, 복지, 건설 등이 실질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공간 규모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읍·면은 공무원이 그냥 ‘스쳐 지나가는’, ‘잠시 쉬었다 가는’ 자리, 혹은 단순한 민원창구에 불과하다. 지역사회의 복잡한 갈등관계에는 절대 끼어들지 않으며, 5년 후, 10년 후 계획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순환보직제 문제와도 맞물려 민원사항이 발생하지 않기만 바라고, 지역사회와 적절한 거리두기를 하며, 주민과 깊은 신뢰관계를 쌓으려 하지 않는다. 주민자치회에서 아무리 주민총회를 통해 자치계획을 수립해도 실현 방법이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이다.

그래서 읍·면 행정에서 적어도 주민들의 생활밀착형 의제를 해결하기 위한 계획 수립 기능과 집행 권한은 꼭 필요하다. 본청에서 시행하는 정책사업 정보는 당연히 공유되어야 하고, 참여할 권리도 보장해야 한다. 직불제 중심의 농정으로 개편될수록 이런 방향이 바람직하다.

새 정부 농촌정책의 핵심과제 중 하나로 첫째, 생활밀착형 사무의 읍·면 이양과 공무원수 확대, 둘째, 읍면장 임명의 주민선택권 보장, 셋째 읍면 행정과 주민자치회의 다양한 협력 모델 개발과 시범사업 시행을 검토할 것을 제안해본다. 이런 방향에서 농식품부와 행정안전부는 적극 협력해야 하고, 대통령 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가 적절하게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정책 결정단위(지자체)와 집행단위(읍면, 마을)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고 현장밀착형, 실사구시형, 상향식 농촌정책으로 발전되기를 기대해본다.

저작권자 © 한국농어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