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연/충남 부여

[한국농어민신문] 

신지연 씨의 꿈은 여성농민이 행복한 농촌, 여성이 살고 싶은 농촌을 만드는 것이다. 여성농민이 행복해야 모든 농민이 행복해지고 농촌도 행복해진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사는 대하소설이라고 책을 쓰고도 남는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글로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니, 왜 사람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라는 진부한 표현을 쓰는지 알 것 같다. 나 또한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기쁜 일, 슬픈 일이 모두 떠오르면서 이 글을 접을까 하다 다시 마음을 잡고 써내려간다. 이는 과거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미래의 여성농민 신지연의 인생을 설계하는 도면이기 때문이다. 이 수기를 나중에 다시 읽어보면서 그 결의를 지키고 있는지 중간점검도 하고 열심히 살아왔다고 내 스스로를 칭찬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서울깍쟁이’까지는 아니지만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서울내기’인 나는 방학 때 할머니 댁에 놀러가 해주는 밥을 먹고 개구리 몇 마리 잡아본 것 빼고는 농촌을 겪어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여성농민으로 살아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 했건만 이렇게 여성농민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적고 있다니! 

나는 ‘농대생’이었다. 농과대학에 입학하였으나 농업도 모르고 지망한 학과가 무엇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인지도 전혀 몰랐다. 그저 보통의 수험생처럼 점수 맞춰서 ‘in서울’ 하라는 부모님의 바람대로 들어갔을 뿐이다. 전공에 관심도 없고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재미에 푹 빠져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당시 대학생들이라면 많이들 참가했던 농촌활동을 가게 되었다. 농민들은 ‘농촌봉사활동’이라 불렀지만 대학생들은 ‘농촌활동’이라고 굳이 이름을 붙인 이유는 봉사가 아닌 연대활동으로서의 농활, 그리고 봉사할 능력이 되는 것도 아닌 겸손함을 담은 말이었을 텐데, 이 농활이 내 인생을 확 바꿔놓고 말았다.

처음 해보는 서툰 농사일에도 마을주민들은 그저 잘한다고 칭찬해주셨다. 하지만 내가 뽑았던 것은 풀이 아니라 들깨였음을 훗날 알고는 그제사 “아이고 아까워!”를 외쳤다. 이렇게 들깨를 뽑아놓고 논에 들어가 피와 벼를 구분 못해 벼를 뽑아놔도, 활력 없는 농촌마을에 20대의 젊은 학생들이 돌아다니는 모습만 봐도 농촌주민들에게는 큰 기쁨이었다는 걸 농민이 되어보니 알 것 같다. 생동하는 젊음을 좀처럼 구경하기가 더 어려워졌지만 지금은 대학생 농활도 사라지고 있어 못내 아쉽다. 이제 정말 내가 잘 가르쳐줄 수 있는데! 

농촌활동을 하면서 농촌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농민의 삶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영어, 수학 공부해서 대학가고 졸업하면 취직해서 아파트도 사고 자동차도 사야지’하며 도시의 삶만 그리던 서울내기 여대생이 만난 농민들은 생명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위대하고 매력적인 존재였다. 씨앗만 심어놓으면 혼자 자라서 열매를 맺는 일인 줄 알았건만 농민들의 손을 거쳐야만 소출이라는 것이 생기고, 어떻게 저렇게 예쁘게 작물을 기를 수 있는지 내게는 창조주이자 만능기술자로 보였다. 농민들에겐 흙이든 돌이든 무용한 것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반반한 돌은 고임돌로 쓰고, 똥과 잡풀은 거름으로 만들어 알맞게 쓸 줄 알았다. 머리만 굴리고 손과 발은 무거운 내 삶에 농민들은 삶에 유용한 실체를 만들어내는 유일한 존재로 여겨졌다.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싶어졌다. 

나는 농민이 되어 작은 씨앗에서 열매를 맺게 하고 길섶에 놓인 작은 돌맹이 하나도 유용하게 쓰면서 살고 싶었다. 그렇게 고향인 농촌에 돌아가 농민으로 살겠다는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해서 남편의 고향으로 귀향, 아니 귀농을 했다. 서울에서만 살던 딸이 이런 결정을 하자 어머니가 얼마나 속상해 하셨는지. 내가 부모가 되어보니 그때 부모님 가슴이 얼마나 녹아내렸을지 알겠다. 그래도 나는 농민이 되기로 결심했고 또 농민이 되었다.

블록버스터 파란만장 여성농민으로 살아남기
둘째 아들, 하마터면 ‘차돌이’가 될 뻔하다


결혼 후 시작된 농촌생활은 파란만장했다. 결혼생활도 힘든 일인데 농촌생활은 농활에서 경험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농촌활동이 걸스카우트 캠프라면 농촌생활은 전쟁에 가까웠다. 돼지를 치고 작물을 기르는 보통의 농사꾼이 되어가려 노력했고, 또 그때나 지금이나 동네에서 드믄 ‘새댁’이 되어 아이도 낳고 시어머니 모시고 그렇게 살아갔다. 

둘째 아이를 낳던 날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큰아이를 낳을 때는 19시간 진통을 해서, 산부인과 병원이 1시간 넘게 걸려도 시간은 충분하겠다 싶었다. 남편도 큰아이가 워낙 늦게 나와서 시간적 여유가 있다 생각하고 돼지밥 주고, 집안일부터 동네일까지 몇 가지의 일을 처리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2002년 큰아이 낳을 때도 군단위 농촌 대부분에는 분만이 가능한 산부인과가 없었다. 둘째를 1시간이나 떨어져 있는 순천까지 가서 낳았다. 그런데 출발하자마자 진통의 간격이 짧아졌다. 아이가 곧 나올 것 같았지만 119를 부른다 하더라도 읍에서 우리 집까지 오려면 30분도 더 걸리던 오지였다. 빨리 병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에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병원으로 내달렸다. 진통 때문에 자동차 안에서 소리를 지르고 남편은 운전하랴 나한테 조금만 참으라고 말하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둘째를 낳았고, 의사는 자동차 안에서 출산했으면 어쩔뻔했냐며 야단을 쳤다. 하지만 농촌의 여성농민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고 심지어 이런 사연은 너무 흔하다. 

어느 동네에는 딸아이가 택시에서 태어나서 이름을 ‘택순’이라 지었다고 한다. 80년대 어떤 택시기사는 워낙 자기 차에서 아이들이 많이 태어나다 보니 아예 탯줄자르는 가위부터 아기를 감쌀 수 있는 수건까지 싣고 다녀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마터면 둘째 아이는 차에서 태어나 ‘차돌이’가 될 뻔 했다.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지만 이것은 농촌의 엄중한 현실이다. 도시는 병원이 많고 산부인과도 골라서 가지만 농촌의 경우 선택은커녕 아예 분만을 할 곳이 없어 임신 기간 내내 불안할 수밖에 없다. 나라 전체가 저출산 상황이어서 산부인과가 많이 사라진다고는 하지만 농촌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고충을 겪고 있다.

어디 산부인과 뿐이던가. 응급실도 멀고 막상 가면 제대로 처치를 할 수 있는 의사가 없어 도시에서라면 별 후유증없이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이나 사고도 장애나 사망으로 이어지는 일이 오늘도 반복되고 있다. 그래도 나는 한국 사람이지만 먼 나라에서 온 결혼이주여성들을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까? 산부인과 병원조차 없는 곳에 어느 여성농민이 출산을 할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어디에 살든 안심하고 출산하고 아이를 건강하게 기를 수 있는 권리는 당연히 보장되어야 하지 않을까. 
 

31살, 우리마을 최초 여성이장이 되다

2005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남편을 떠나보냈다.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마을 언니들이 마을 이장을 하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남편이 그렇게 떠나버렸고, 아이들은 아빠가 돌아가셨는지 아닌지도 모를 정도로 어린데 내가 무슨 일을 맡을 생각이 있었겠는가. 게다가 이장이란 직책은 농촌 마을에서 가장 무거운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언니들은 어린 아이들을 키우며 농사짓고 살겠다는 내게 이장을 하라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이장 일을 하면서 마을에서 떠나지 말고, 함께 살자는 이유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신없이 일이라도 해야 슬픔 속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언니들의 속 깊은 배려였으리라. 물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제 우리 마을에도 여성이장이 나와야 한다는 것. 당시 마을 이장을 하려던 할아버지가 계셨지만 마을을 혁신하자는 의미도 있었다. 당시 전남도에서는 여성 이장을 선출한 마을에 인센티브를 주는 제도도 마침 있었기 때문이다. 언니들은 우리가 다 알아서 준비해놓고 있을 테니 안 하겠다는 말만 하지 말라며 내 새끼손가락을 가져다 꾹 걸었다. 

지금도 농촌마을의 가장 큰 의사결정기구인 대동회의 의결권은 1가구 1표가 대부분이다. 여성 총리도 나오고 대통령도 나오는 세상이지만, 아직도 대한민국 농촌의 여성들에겐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1년에 한번 열리는 대동회에 안건이 무엇으로 올라왔는지 어떤 결정이 났는지도 모른채 대동회 며칠 전부터 마을회관 청소에 음식준비를 하느라 부산스럽다. 막상 대동회 당일에는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대동회가 끝나면 동네사람들 밥 먹이고 치우느라 바쁘다. 대동회뿐만 아니라 이장투표도 1가구 1표다. 그러니 대부분 남편들이 참여하기 때문에 여성농민들과 여성주민들의 뜻은 무시되곤 하였다. 

이런 상황을 역으로 이용해 언니들은 나를 이장으로 당선시켰다. 남편들을 설득해 마을의 여성주민들이 주도적으로 투표에 참여해 만장일치로 나를 당선시켰다. 본래대로라면 대동회에서 음식준비로 바빴을 여성농민들이 회의장에 모두 몰려들어가 스스로가 가구의 대표가 되어 투표를 한 것이다. ‘1가구 1표’라는 농촌의 악습을 역이용한 이장선출이었고, 지금 생각해도 짜릿한 블록버스터급의 이야기다. 

그렇게 서른 한 살에 젊은 여성 이장이 되었다. 마을의 여성농민들과 손발 착착 맞춰 마을 일을 해나갔다. 어찌 보면 우리 마을에는 마을이장이 나 한 명이 아니라 모든 여성농민이 모두 이장이었다. 여성 이장 선출로 전남도에서 주는 인센티브로 마을발전기금을 받았다. 역시 능력은 현금에서 나온다고 했던가! 고작 몇 십 만원 남아있던 마을 통장에는 1000만원이 넘는 종잣돈을 만들어 다음 이장에게 넘겨주었다. 당연히 후임 이장도 여성이장이었고, 이후 우리 마을에서는 마을이장이 연이어 당선되어 ‘암탉이 울면 알을 낳는다!’를 당당히 보여주었다. 
 

나 돌아갈래

엎친데 덮친격으로 큰 아이가 아팠다. 아빠 없이도 열심히 농사지어 당당하게 키우려 했건만 아이가 아프니 막막하기만 했다. 그래서 잠시 꿈을 접기로 했다. 큰아이 치료를 위해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다행히 1년 만에 아이는 건강을 되찾았고 지금은 건장한 청년이 되었다. 하지만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두 아이를 키우는 일이란 상상이상으로 고됐다. 친정어머니가 옆에서 돕느라 애를 쓰셨지만 그때는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웠다. 사무실에서 일을 하면서도 지금쯤이면 산에 고사리가 한창일 텐데, 고추를 심을 때인데 하며 머릿속에서 계속 씨뿌리고 수확하기를 수천 번.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들에게 엄마는 농민으로 살고 싶고 농촌으로 다시 가자고 했을 때 아이들도 흔쾌히 함께 가자고 하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농촌으로 갔던 스물다섯 살의 새색시는 마흔 살이 되어, 농촌의 현실을 고스란히 겪었으면서도 다시 여성농민으로 살기로 결심했다. ‘나 돌아갈래!’를 외치며.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충남 부여군이다. 부여에 내려올 때 큰아이는 중학교 1학년, 둘째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농촌에는 1개의 면에 1개의 학교가 없는 곳도 있기 때문에 아이들 통학거리를 감안해 읍에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 아이들은 농촌 생활에 적응을 잘 했고,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농사일도 곧잘 돕는 착하고 건강한 아이들로 잘 자라주었다. 서울에서 아이를 계속 키웠으면 어땠을까 가끔 생각해 본다. 결론은 서울에서는 이렇게 키우지 못했을 것이다.

전교생이 거의 다 아는 가족 같은 분위기에 서로의 사정을 잘 배려해 주기도 하고 서울처럼 사교육 경쟁이 심하지 않아 일단 심적 부담이 덜했다. 소득 수준도 서로 비슷해 어려운 가정 형편임에도 위축되지 않고 아이들은 건강하게 자라주었다. 큰아이는 올해 대학교 1학년이 되었다. 큰아이는 부여군에 있는 유일한 인문계 남자고등학교에 다녔는데 학생 절반이 기숙사 생활을 한다. 기숙사 생활도 수련회 온 것처럼 즐겁다며 잘 지냈고, 작년 입시에서 원하는 대학과 학과에 무난히 합격을 했다. 서울에서도 가기 힘들다는 학교에 입학을 하니 주변에서 비결을 묻곤 한다. 그러면 ‘농촌으로 오시라’라고 답을 한다. 

농촌의 학교는 특히 이번 코로나19 시기에 오히려 학교 본연의 역할을 해낼 수 있었다. 서울에 사는 조카는 1년동안 학교를 간 날을 손에 꼽는다. 하지만 농촌의 학생들은 대부분 전면 등교를 해서 수업과 학교급식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져서 교육공백이 없었다. 농촌학교의 단점으로 꼽았던 적은 학생수가 오히려 이런 팬데믹 위기에서는 큰 장점이 되었다. 바빠서 학교운영에 거의 참여를 못해도 서로 정보를 알려주고 학부모도 학교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교직원과 학생, 학부모가 참여하는 바람직한 교육의 장을 만들 수 있는 곳도 바로 농촌학교다. 

비슷한 처지의 또래들과 동고동락하며 지낸 농촌학교 생활은 오히려 아이들의 자존감을 높여주었고 지금은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즐겁게 하고 있다. 언뜻보면 자식자랑 같지만 나는 농촌이 가질 수 있는 강점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오히려 사람이 많지 않아 서로 대면하면서 알찬 삶을 꾸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다만 경제적인 논리로 농촌의 학교가 통폐합되지 않고 1개 면에 1개의 초등학교가 보장된다면, 젊은 부모들은 이곳을 떠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여성농민이 어때서

마흔 살에 다시 농촌에 내려와 가장 어려운 일은 농사지을 땅을 구하는 일이었다. 농지가 비싸 땅을 살 수는 없으니 임대를 해서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그 과정이 너무 어려웠다. 귀농 2년 차에 농사지을 만한 땅이 나와 임대를 하러 갔는데 땅주인은 일흔이 넘은 남성농민이었다. 땅을 계약하려니 자꾸 ‘바깥양반’을 데려오라는 것이다. 웃으며 “어르신, 제가 농사지을 땅이니 저랑 계약하시면 됩니다.”라고 해도 여자와는 계약을 안 하겠다며 막무가내였다. “저는 바깥양반도 없고 내가 안사람이기도 하고 바깥사람이기도 합니다.” 라고 했더니 계약을 안 하겠다는 것이다. 황당하고 불쾌했지만 그 땅이 꼭 필요해 남자 지인을 데리고 가서 계약을 성사시켰다. 나한테는 그렇게 무뚝뚝했던 노인이 남자 지인에게는 친절하게 계약서를 써주는 것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여자라서 안 되는 일이라며 차별을 당하고 산 것이 나뿐만은 아니겠으나, 내가 내 돈 내고 땅을 빌리겠다는데 그것조차 여자여서 할 수 없다니.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난다. 

그렇게 1000평의 땅을 빌렸다. 하지만 다른 농지도 내 이름으로 계약하지 못하고 지인 남성의 이름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1500평의 농사를 짓는 농민인데도 내 이름으로 계약한 땅이 없어 농업경영체등록을 하지 못했다. 농사를 지어 먹고 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나는 법적으로 농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농민에게 주어지는 각종 정책의 대상에서 제외가 되었다. 그래서 땅을 사기로 했다. 귀농자금으로 농협에서 대출을 받아 500여 평의 땅을 샀다. 저금리의 이자가 나가지만 굳이 땅을 사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었는데 빚까지 얻어서 땅을 산 것이야말로 불합리하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내 땅이 있어야만 농업경영체 등록을 하고, 국가에서 내가 농민이라 인정을 해주니 말이다. 

매년 초 대출 이자를 갚을 때마다 나와 땅 계약을 하지 않겠다던 그 남자 노인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여자던 남자던 농사 잘 지어 임대비만 잘 주면 되지, 여성농민이 어때서! 아마 이런 억울한 일을 겪은 여성농민들과 여성 귀농인들이 많을 것이다. 격려와 위로를 건네고 싶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부당한 사례를 그냥 웃어넘기지 말고 꼭 해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여자라는 이유로 땅조차 안 빌려주는 이런 현실에서 나는 오늘도 땅 하나 믿고 농사를 짓는다.

여성농민이 행복한 농촌, 여성이 살고 싶은 농촌

나는 1500평의 토종밀농사와 500여평의 토종벼농사, 500여평의 하우스에서 유기농 채소 농사를 짓고 있다. 생협의 생산자 회원이면서 여성농민 운동가로서의 삶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빚까지 얻어가며 산 땅을 가꿔 생태체험농장을 만들고 싶었으나 너무 무리를 한 탓에 결국 나도 건강이 상해 수술대 위에 누워야 했다.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아 그 계획은 조금 미뤘지만 언젠가는 꼭 이루려 한다. 언젠가는 도시민들과 도시의 아이들이 맘껏 흙을 만지고 농작물을 보면서 즐거워 할 생태농장의 꿈을 잘 가꾸어 나가고 싶다. 그래서 지금은 토종벼를 심고 제초제와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생태 논농사를 짓고 있다. 

하지만 농사는 낭만적인 일이 아니다. 소규모 농사를 지으며 그 소득으로 살아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대규모 농사를 짓는 대농이 보면 내 농사규모는 정말 손바닥만하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농사를 다시 지으며 정한 원칙을 나는 아직까지 포기하지 않고 있다. 땅을 살리는 유기농 농사를 지으며, 소득이 적은만큼 최대한 외부 투입을 적게 하여 생산비를 줄이는 노력을 하고 있다. 농사를 통해 토종씨앗을 지키고, 생태농업을 고수해 소비자와 함께 짓는 농사를 짓자는 것이다. 하지만 매일매일 풀과의 전쟁이고, 몸으로만 감내해야 하는 일이 너무 많아 하루하루가 고되다. 그래도 나와의 약속, 아니 땅과의 약속을 어기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나의 꿈을 향해 더디지만 한 발자국씩 나아가고 있다. 

할머니가 그 딸과 며느리에게, 할머니가 이웃 할머니에게 전해주며 꿋꿋하게 간직해온 토종씨앗을 나도 내 후배들과 동료, 그리고 자손들에게 물려주고 싶다. 내 세대에서 사라지지 않게 하겠다는 의무감에 시작한 토종농사는 내 농사의 전부이자 ‘토종농사꾼 여성농민 신지연’이란 정체성을 만들어 주었다. 

토종밀농사를 지어 소비자들에게 직거래로 판매하며 생활을 꾸려나가는 일도 중요하다. 여기에 토종밀에 대해 알리고 토종밀로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도록 알리고 있다. 어떤 소비자들은 내 토종밀쌀을 처음 먹어보고 톡톡 튀는 식감이 신기하다며 밀은 밀가루로만 먹는 것인줄 알았다고도 한다. 토종밀과 통밀쌀을 주문하는 소비자 고객에게 ‘덕분에 농사짓습니다’ 라는 인사를 빼놓지 않는다. 단순히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를 떠나 함께 농사를 짓는 동지로 여기기 때문이다. 주문도 따로 해야 하고 택배비까지 붙는 이 토종밀가루를 기꺼이 소비해주는 농사 안 짓는 ‘소비자 농민’ 덕분에 아는 올해도 토종밀농사를 잘 지을 수 있었다. 이렇게 소비자와 함께 농사를 짓고 있다는 것이 뿌듯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여 이 글에 꼭 남겨두고 싶다. 

작년에는 처음으로 토종고춧가루로 고추장도 담갔다. 함께 활동하는 단체에서는 몇 년 전부터 토종배추, 토종고춧가루, 토종마늘 등 모든 재료를 토종으로 구성해 토종배추김장을 담가 소비자들에게 판매하고 있다. 토종씨앗을 지키려면 농사를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맛을 알리고 자연스럽게 토종 농산물을 먹어주어야만 토종농사는 이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토종으로 농사짓는 농민도 늘어날 것이고 우리의 토종씨앗도 지켜질 것이다. 상상만 해도 짜릿하고 즐겁다.

내가 밭에서 일할 때 동네 할머니들께서는 한마디씩 보태신다. 여전히 농사일에 서툰 내게 “지금은 콩 심을 때가 아녀. 오디가 한창 익어서 떨어질 때 그때 콩을 심어야혀”라고 말씀하신다. 오디가 익으면 오디를 먹느라 새가 콩을 파먹지도 않고 또 계절이 그때여야 한다는 오랜 지혜의 말씀이다. 토종당근인 ‘흰당근’을 심어 어떻게 먹어야 하나 갸우뚱거리고 있으면 “흰당근은 나물로 해 먹어야 맛나. 살짝 쪄서 소금넣고 들기름으로 조물조물하면 맛나.” 이런 귀한 이야기를 지나가는 말로 툭 던지신다. 그러면 나는 한 말씀만 더 해달라고 매달리곤 한다. “내가 무슨 얘기를 했간?”하며 짐짓 모른체 하시고 가던 길을 느릿느릿 걸어가신다.

나는 아직도 할머니들의 지혜의 말씀에 목마르다. 우리 할머니들의 지혜와 ‘토종 레시피’를 훔쳐서라도 배우고 싶다. 고령의 여성농민들이 몸으로 깨달은 삶의 지혜와 농사의 지혜를 차곡차곡 모아 정리해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다. 이 글을 쓰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놓치고 있었던 이 계획을 꼭 실현해야 겠다는 약속도 여기에 적어둔다. 그러려면 내가 토종농사를 열심히 지어야 할 테고, 지금은 비록 초보 농민이지만 언젠가는 베테랑 여성농민, 베테랑 토종농민이 되어 후배들에게 잘 알려주고 싶다. 그리고 나도 종종 장난을 쳐야겠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간?”


나의 꿈을 응원해줘

아무리 농사짓는 게 꿈이었다지만 농촌에서 농사지으며 사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힘들 때마다 한 번씩 내게 거는 마법의 주문이 있다. 나의 꿈은 여성농민이 행복한 농촌, 여성이 살고 싶은 농촌을 만드는 거라고. 농촌은 생존 자체를 걱정하며 소멸위기에 내몰려 있다. 농사지어 먹고 살만큼의 소득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 의료, 복지 등 기본적인 생활 유지도 점점 더 어려워진다.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이어서 여성들이 부당한 일도 종종 겪기도 한다.

하지만 여성농민들이 행복해야만 모든 농민들이 행복해지고 농촌도 행복해진다. 나는 행복한 농촌의 행복한 여성농민으로 살아갈 꿈을 꼭 이루고 싶다. 그 꿈을 남성농민, 여성농민, 도시인들 모두 함께 꾸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 글에 내가 꼭 이루고 싶은 여성농민 신지연의 다짐을 적어두고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꺼내 읽고 다시 마음을 다잡으려 한다. 여성농민 신지연을 여성농민 신지연이 힘차게 응원하면서, 내일도 토종밀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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