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천 춘천두레생협 이사

[한국농어민신문] 

상품으로서 농산물은 유한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경쟁'에 좌우
'공공재' 되려면 아직 갈 길 멀어

농업농촌의 공익적 가치를 인정하는가?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여러 지표를 보아도 충분한 수준이다. 다른 첨예한 쟁점에 비한다면 대체로 무난하게 수긍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이와 연결되는 문제로 더 나아가 보자. 농산물은 공공재인가? 나는 경제학이나 정치학 전공자가 아니므로 직관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검색을 해 보면 ‘먹거리는 공공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역먹거리 관련 정책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는 정치인들, 학자들, 먹거리 관련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 선언적 의미에는 백번 동의하므로 딴지를 걸 마음은 전혀 없다. 그러나 엄밀하고 정직하게 보자면, 여기서 말하는 먹거리는 사실 극히 제한적이다. 아주 좁게는 학교급식에 투여되는 ‘먹거리’를 제어하는 수준 정도에서 ‘공공재’일 뿐이다. 물론 훌륭한 진보임에는 틀림없다.

정치학사전의 공공재(公共財) 항목 첫 줄에는 ‘정부의 재정으로 공급된 재화나 서비스’로 규정한다. 사(私)적 상품이 아니라 공공재로 자리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정치의 영역이다. 정부가 예산을 투여하는 결정까지의 전 과정이 정치다. 공공재는 ‘정부의 재정으로 공급’되는 것이므로 경제가 아닌 정치의 문제가 된다.

정치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일상이 된 문제다. 예컨대 어느 시군 지자체장이 ‘먹거리는 공공재’라고 자신 있게 발언하는 경우. 분명히 지역 정치의 메커니즘에 근거해서 공공적인 지역내 먹거리시스템을 일정 수준 갖춰가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물론 어떤 지자체장은 정치적 이유로 거부하기도 하겠으나, 여하튼 좁은 지역의 좁은 순환시스템이라는 한계는 명확해도 ‘먹거리는 공공재’라는 정치 담론은 힘을 얻어가고 있다.

진짜 문제를 환기해 보자. 농산물은 공공재인가? 이른바 ‘먹거리’ 말고, 지금 갈무리되고 있는 ‘농산물’ 말이다. 지자체 예산으로 컨트롤할 수 있는 급식 ‘먹거리’ 말고, 쌀과 무 같은 ‘농산물’ 말이다. 병해를 극복하고 기적적으로 수확한 나락인데 9% 증산이 예상되니 가격하락을 염려해야 한다. 우리에게 쌀은 공공재인가? 치솟은 인건비와 소비 위축으로 수확 자체를 포기하는 고랭지 무는 우리에게 공공재인가?

공공재는 2가지 특징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비(非)경쟁성(공동소비성)으로, 나의 소비가 타인의 소비를 방해하지 않아야 한다. 항구의 등대를 공공재의 예로 든다면, 등대 불빛을 두고 경쟁할 이유는 없다. 둘째는 비(非)배제성인데,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공급되는 것이다. 등대 불빛의 도움을 받았다고 돈을 내지는 않는다. 그런데 정치학사전에서 예로 드는 등대처럼 2가지 공공재의 특징이 거의 완벽히 재현되는 경우는 드물다. 경쟁과 배제가 내재되어 있거나 얽혀있기 일쑤다. 등대 예시처럼 책에서나 가능하다. 공공재는 어려운 정치의 영역이다.

오늘 농산물이 공공재가 아닌 까닭은, 유한한 농산물이 비경쟁성은커녕 생산유통소비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경쟁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시장에서 선택받기 위해 품질이든 포장이든 가격이든 경쟁에 허덕일 수밖에 없다. 소비자도 시기마다 제한된 농산물을 두고 경쟁한다. 여기에 무책임한 유통과 수입 농산물까지 가세하니 경쟁은 아수라장이다. 마침내 경쟁의 피해자, 패배자는 발생하기 마련. 농민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결국 질 것이 뻔한 경쟁을 반복한다.

오늘 농산물이 공공재가 아닌 까닭은, 상품으로써의 농산물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농산물 그 자체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소비자는 이제 없다. 다만 경쟁을 덧입은 농산물은 암암리에 배타성을 지닌다. 소비력도 유한하다 보니 최상품 농산물에 접근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경북 샤인머스켓 한 송이는 필리핀 바나나 몇 다발과 맞먹는다. 재난 상황에서도 공평한 식량배급은 불가능하다. 양극화 사회에서 상품인 농산물의 비배타성은 극복될 수 없다.

이제 결론이다. 우체통 바닥에 쌓여 놓친 농어민신문 2주치를 한꺼번에 펴 보았다. 농민들의 아우성이 들린다. 농민들은 이것이 문제고 저것이 모순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래서야 그나마 지키고 있는 농사조차 이어가기 어려우니 항변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농민들의 내심은 농민들의 진심은 사실 단순하기 짝이 없다. “농사꾼으로서 농사만 잘 짓고 싶소! 다른 걱정 없이 살고 싶소!” 달리 무엇이 있는가, 결국 이것 아니겠는가.

농업의 공익적 가치는 여기저기서 주장되지만, 오늘 농산물은 공공재가 아니다. 이렇게 물어보자. 농산물이 공공재가 되는 것이 최선의 공동체적 목표인가? 농민은 농사 잘 짓는 장인으로 존재하고 예우받는 세상은 정녕 불가능한가? 그 목표가 성취되려면, 농산물은 일단 경쟁시스템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또한 농산물은 널려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유한하다는 명제가 사회적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언제까지 풍요로울 수도 없고, 현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는 세상이 올 수도 있다. 몇 년 안으로 후계자도 일손도 없어서 유한함이 위기로 닥칠 수도 있다.

변화가 과연 가능할까? 엄연히 공공재로 존재하던 농지마저 사적 욕망의 재화로 변질된 마당에, 경쟁 일변도의 유한한 농산물이 사회적 공공재가 될 수 있을까? 농민은 순전한 공익의 담지자가 될 수 있을까? 물론 나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기후변화 같은 재난으로 불가피하게 농산물이 모자라 공공재로 관리되는 파국은 악몽이다. 우리의 합리적 지성과 상식적 정치에 의해서 변화되고 구축되는 길몽을 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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