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천 춘천두레생협 이사

[한국농어민신문] 

농산물 이동을 담당하는 사람들 
농업농촌의 중요한 멤버이자 축
그림자지만 고마운 존재 기억해야

어느새 십여 년 전 일이다. 당시에는 친환경농산물을 주로 취급하는 로컬푸드 사회적기업의 대표이사였다. 회사가 사라졌으니 사업적으로만 따지면 실패했다. 그러나 협동적인 지역운동이기도 했기에 아주 실패한 것은 아니다. 오늘 춘천의 공공적 지역먹거리 시스템과 운동의 씨앗은 되었으니 말이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던 예수의 말씀으로 애써 위안 삼는다.  

되돌아 회상하면 좋았던 기억도 괴로웠던 사건들도 모두 지난 일이 되어 가물가물하다. 그런데 한 가지만은 여전히 또렷한 것이 있으니, 다름 아니라 ‘새벽 배송의 추억’이다. 대외적으로는 대표였을지언정 실상은 5년 동안 배송기사이기도 했다. 급식업체들이 기피하는 원거리 시골 분교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시내 큰 학교까지 농산물과 각종 식재료를 실어 날랐다. 

매일 4시에 일어나서 출근하자마자 식재료를 분류하고 소분하고 체크하면서 잠을 깼다. 시골학교의 학생 수가 뻔하다 보니, 5개 학교 분량이어도 1톤 트럭에 2단으로 쌓을 일이 없었다. 거리 때문에 7시 전에는 출발해야 했기에, 품목 하나라도 늦게 도착하는 날이면 일단은 다녀온 후에 꼼짝없이 그 길을 다시 달려야 했다. 다행히 시골학교 영양사와 조리사 분들은 아량이 넓다. 지적은커녕 오히려 다시 먼 길 다녀올 것을 걱정해 주었으니 말이다. 

이래저래 11시까지 별 연락이 더 없으면 그날 점심 급식을 위한 책임은 다 한 것이기에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오후에는 또 시골길을 달려 지역 농산물을 수집했고, 시내 학교급식 보관소에 쌀을 배송해 채웠다. 이런 모든 일들은 배송 담당의 몫이었다. 

학교 배송을 하면서 트럭 수동기어 운전을 배웠다. 오르막에서는 진땀이 났고 시동을 꺼뜨리던 순간도 있었지만, 언젠가부터는 왼손으로는 전화를 받고 오른손으로는 기어를 만지는 경지에 올랐다. 안개가 낀 아침의 지방도는 서로 조심하기 마련이지만, 실은 날이 좋을 때가 더 위험하다. 중앙선을 넘나들면서 굽은 도로를 내달리는 승용차들 때문이다. 죽을 뻔했던 적이 여러 번이라, 커브 길에서는 무조건 바깥쪽으로 붙어 달렸고, 지금도 그 버릇은 여전하다. 

농산물 소비자가격에서 유통의 비중이 절반을 넘은 지는 오래다. 유통이라는 범주 속에는 참으로 다양한 양상들이 있지만, 어떤 농산물이라 하더라도 공통된 사태는 유통의 본질인 이동이다. 이것을 담당하는 수만 명의 사람들은 농업농촌의 중요한 축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철저한 그림자들이다. 주인공일 수도 없고 주인공이기를 원하지도 않는 사람들. 

농산물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동 중이다. 산지에서 물류센터로 소매점으로 소비자에게로 이동한다. 이러한 이동의 과정은 농산업의 핵심적인 요소다. 경제적으로 보자면 일련의 과정이 더 합리적이고 더 효율적이면 좋은 일이다. 도로가 확장되고 비포장이 포장되는 것부터 상하차에 도움이 되는 도구들까지 의미는 있다. 그러나 이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농업농촌의 그림자처럼 이방인처럼 심지어 소모품처럼, 존재하지 않는 듯 존재한다. 

운수노동자의 처우에 대해서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농업농촌의 중요한 멤버이면서 멤버십은 없는 기묘한 존재들이 있음을 상기해보자는 것뿐이다. 생산을 담당하는 붙박이 농민과는 달리 불가피하지만 뜨내기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고맙고도 고마운 존재들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뿐이다. 

해마다 생협 배송직원이 여름휴가를 갈 때면, 여건이 되는 조합원이 빈자리를 채우고는 했다. 올해 여름은 마침 여건이 되는 내 몫이었다. 생협 배송직원이 바뀔 때면 그 사이의 한 두 달을 책임졌던 적이 여러 번 있었기에 낯선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몇 년 만에 생협 소비자들과 어린이집에 배송을 하다 보니 옛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한 가지 애로사항이라면 최근에 새로 지어진 고층 아파트 단지들을 처음 찾아갈 때였다. 일단 여기가 몇 동인지 글씨부터 잘 보이지 않고, 트럭을 몰고 들어가도 되는 길인지 인도인지 화단인지 공원인지 분간도 안 되고, 35층 아파트에 엘리베이터가 하나뿐이니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누구나 어떤 일을 새로 마주하면 그 일과 관련된 사물이 새삼스럽게 보인다. 먹거리 배송 트럭을 운전하면서 같은 배송트럭들이 새삼 눈에 띄었다. 대형마트와 농협마트의 작은 트럭, 농산물 긴급수송이라고 써 붙인 대형 트럭, 춘천 특유의 닭갈비 트럭 등등. 문득 옛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이른 새벽 승용차 없는 고속도로에서 오가던 트럭들의 장엄한 행렬들의 기억. 무엇을 싣고 다니든 혈관과도 같은 물류의 세계. 

농업농촌에 대한 애정으로, 길에서 농산물 트럭을 만나면 양보하고 응원해 주시길. 배송기사를 만나면 수고하신다고 조심하시라고 격려해 주시길. 행여 미소와 박카스 한 병 건네신다면 힘을 내서 졸음을 쫓을 수 있음도 기억하시길.

저작권자 © 한국농어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