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길 논설위원, 농정전문기자

고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은 “서구 근대문명은 ‘지속 불가능성’이라는 근본적 결함을 내포한 문명으로, 조만간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며 ‘농본주의’를 이 세상이 지속가능하기 위한 대안으로 제시했다. “물질의 막힘없는 순환을 근본 토대로 하는 영속적인 생존·생활방식, 즉 동아시아 특유의 친환경적 농사 원리를 적극 되살리고, 농민과 농촌을 다시 소생시키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러한 사회로 방향전환을 하자면, 우리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의사 결정 과정, 즉 ‘정치’가 합리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그래서 그는 “지금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이라고 되풀이해서 강조해왔다.

홍성 홍동면 들판 한 가운데에 컨테이너를 놓고 공익법률센터 ‘농본’을 시작한 하승수 변호사는 김종철 선생의 농본주의,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민주주의를 농촌에서 실천하고자 한다. 그는 “농촌을 지키고, 농사를 살리고, 농민과 농촌주민들의 삶을 지키는 방법은 민주주의일수 밖에 없다”고 했다. “지금 여러 마을에서 부패와 관료주의, 자본의 탐욕과 싸우고 있는데, 이런 마을의 노력을 지지・옹호하고, 기득권 세력과 자본의 탐욕을 감시・견제하며, 현장의 목소리를 정책과 입법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한국에서 필요한 사회운동, 정치세력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선’이라고 했다. 내려다보는 자의 시선이 아니라 ‘당하는 자의 시선’, (폐기물을) ‘버리는 자’의 시선이 아니라 ‘버린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의 시선, 전기를 소비하는 자의 시선이 아니라 발전소와 송전선으로 고통 받는 자의 시선을 잃지 않겠다는 것이다.

폐기물매립장 대책위 농민들이 쓰던 컨테이너를 옮겨 농본 사무실을 시작한 것도 “누구의 옆에 설 것인가?”라는 질문을 늘 잊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논・밭과 숲과 농촌에서 살아가는 이웃들 속에서, 농민, 농촌주민의 시선으로 활동하겠다는 말이다.

하 변호사의 말은 고 신영복 선생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신영복 선생은 주류 담론이 아닌 비판적·대안적 담론이라는 의미로 변방을 주목하고, 중심부에 의해 무너져가는 농촌에서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중심부의 시각으로 변방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변방에서 우리 사회 중심부를 바라보고 고민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지요(신영복, 변방을 찾아서).”

선생은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 ‘함께 맞는 비’라는 글에서 이렇게 정의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다. ‘대가’를 바라거나 ‘동정’이 아닌, 타인의 입장과 하나가 되라는 뜻이다. 신영복 선생의 이 글귀는 사회운동을 하는 많은 이들이 ‘더불어 숲’과 함께 늘 마음에 간직하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농민과 농촌을 위해 일한다는 조직과 사람들이 많다. 농림축산식품부와 산하기관들을 비롯해 농협중앙회와 지역 농축협, 각종 농업관련 단체, 기업, 학계가 그렇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지원자들이 있지만, 정작 농민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현재 농가인구는 겨우 220만명으로 20년 전에 비해 절반으로 줄었고, 농업소득은 20년 동안 호당 1000만원(월 83만원) 수준에 그치고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런데 농민들의 수가 줄어들고 농촌이 쇠락해도 이들은 줄지 않는다. 오히려 농촌이 쇠퇴하니까 농촌을 활성화 한다며 사업에 끼어들고, 무슨 컨설팅회사니, 지원센터니 하는 사람들이 농민을 가르치려 들면서 자기 몫을 챙긴다.

물론 이들 모두가 농촌에 필요 없는 존재라 하기는 어렵다. 이들이 있어 그나마 농촌사회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이들이 농민들에게 도움은커녕 오히려 농민 위에 군림하거나 농민에게 기생해 자신들의 잇속만 챙긴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농족’이나 ‘농피아’ 같은 비난이 바로 그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그것은 이들이 근본적으로 ‘농민’의 입장이 아니라 자기들의 입장으로 일하고 있어서다. 이들은 말로는 농촌을 위한다, 농민을 돕는다 할 뿐, 신영복 선생이 말씀하신 “(농민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가 아니라 농민과 농촌을 대상화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사회운동을 하던 이들이 정권에 들어가고, 농민운동이나 전문가 출신이 요직을 차지해도, 그들 다수가 ‘농민’이 아니라 ‘관료’의 입장으로 돌아서 농민을 관리하려 한다. 이것은 현 정부에서 농정개혁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저런 이름으로 농민과 농촌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성찰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누구 옆에 설 것인가’다. 진정 농민을 돕는다는 것은 농민과 공감하고 연대하는 것이다. 자신의 잇속을 위해 농업을 활용하는 ‘농업계’나 ‘농족’이 아니라 바로 ‘농민’과 ‘농촌주민’의 시선으로 일하는 이들의 존재가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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