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안

[한국농어민신문]

햇볕 따스하고 청명한 봄날이다. 나는 거실 큰 창을 열어놓고 흐뭇하게 밖을 내다보며 커피를 마신다. 마당을 빙 둘러싼 꽃밭에서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며 사진을 찍는 딸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다. 딸은 겨울잠에서 깨어난 여러해살이꽃들이 땅을 비집고 올라오는 새싹을 찍는 모양이다. 회양목 앞에서 찍은 사진을 확인하던 아이가 빨리 나와 이거 좀 보라며 어미를 향해 소리 지른다. 뛰어가 몇 장의 사진을 보지만 시력이 안 좋아 잘 보이지 않는다.

집 안으로 들어와 카메라를 컴퓨터에 연결해 돋보기를 끼고 보니 처음 보는 풍경이 화면 가득 선명하다. 타원형의 작고 도톰한 잎을 배경으로 점점이 돋아나는 작은 꽃들, 그 꽃들 머리 위 공중에서 착륙할 꽃을 고르느라 날갯짓하는 꿀벌들, 연초록 회양목꽃에 앉아 꿀 수집에 열중인 꿀벌들의 모습. 여기서 딸이 가리키는 것은 꿀벌 뒷다리 바깥쪽에 달린 작은 주머니 속의 노란색 꿀 덩어리다. 어느 꿀벌의 뒷다리에는 깨알만 한 덩어리가, 어느 꿀벌에는 그보다 제법 더 큰 꿀 덩어리가 매달려 있다. 마치 소중한 것을 가방에 차곡차곡 모으는 부지런한 사람의 모습 같다. 벌이 꿀을 모으는 장면을 처음 목격하는 경이로운 순간이다.

오늘은 완연한 봄날이지만 아직 제대로 꽃이 필 때는 아니다. 한 며칠 더 이렇게 날씨가 따스해도 꽃은 덜컥 피어나지 않을 것이다. 가끔 겨울이 뒷걸음질해 호된 추위가 대지를 덮치면 봄인 줄 알고 깨어나던 봄꽃들이 까무러치고 말 것을 알기 때문이다. 봄을 시샘하는 삼월 추위를 익히 아는 꽃은 잠자코 때를 기다린다. 벚꽃, 개나리, 진달래, 철쭉꽃 등, 세상을 온통 화사하게 물들이는 화려한 꽃은 물론이고, 땅에 붙어서 피어나는 야생화들도 아직은 잠잠하다. 대개의 봄꽃이 관망하며 때를 기다리는데 유독 회양목만이 왜 서둘러 꽃을 피웠을까.

그 까닭은 아마 수수한 생김새에 있지 않을까 싶다. 꽃이라면 그윽한 향기와 함께 당연하게 있는 꽃잎의 아름다움으로 벌과 나비를 불러들이겠지만, 회양목꽃은 꽃잎의 그 화사함을 갖지 못했다. 꽃잎도 없이 암·수술만 있는 연한 녹색의 소박한 꽃. 게다가 동글동글한 초록 잎새를 배경으로 연녹색 꽃을 피워대니 쪼그리고 앉아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도 않는다. 그 때문인지 나는 회양목꽃을 이렇게 자세하게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소의 뒷걸음질에도 한계는 있을 터. 여러 차례의 꽃샘추위가 지나가고, 이제는 정말 봄이다 싶은 순간이 오면 모든 봄꽃이 한꺼번에 와- 하고 피어날 것이다. 회양목꽃으로서는 느긋하게 있다가 그때 가서 꽃을 피워본들 세상 모든 벌과 나비의 관심 밖으로 밀려날 것이 뻔하다. 그런 이유로 한두 번의 눈발을 감내하고서라도 일찍 피어난 사정을 짚어보니 애잔하면서도 더욱더 사랑스럽다.

꽃밭으로 다시 나가보니 꿀벌들은 여전히 꿀 따느라 여념이 없다. 일벌은 양쪽 종아리에 달린 주머니에 꽃꿀을 채웠을 때 30~50mg을 수집한다고 한다. 하루에 7~13회, 최대 3000송이의 꽃을 방문해 꿀을 따 나른다. 1kg의 꿀을 위해서는 2만번 이상 일터를 찾아야 한다. 그러고도 여러 단계의 작업을 거쳐야만 완전한 꿀이 만들어진다니, 나는 이제 한 숟가락의 꿀을 먹을 때마다 벌꿀들의 노고가 떠올라 목이 멜 것만 같다.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조그만 꽃의 향기를 맡아본다. 풍성한 꽃가루 덕분인지 오종종한 꽃에 비해 꿀 향이 그윽하다. 화려하지도 않은 꽃이지만 이 향기에 끌려 겨우내 맛보지 못한 신선한 꿀을 따러 벌들이 온 모양이다. 벌은 먹이가 풍부한 곳의 방향과 거리를 동료에게 알려줄 때는 춤을 추며 소통한다고 한다. 아직은 꽃이 귀한 계절, 수분(受粉) 넉넉한 꽃이 여기 많다고 윙윙 신명나게 날개 춤을 추며 소문낸 것일까. 회양목 나무마다 일벌들의 꿀 따는 작업으로 북새통이다.

평생 농촌에 살면서 늘 가까이 접해온 꿀벌, 그러나 그 꿀벌이 어떻게 꿀을 따 나르는지는 오늘 비로소 처음 알았다. 나 잘났소 하고 도드라지지 않고 무릎 아래 높이에서 있는 듯 없는 듯 꽃 피우는 회양목, 그 소박한 생김새도 오늘 처음 자세하게 알았을 뿐 아니라 세상 그 어느 꽃보다도 가장 먼저 꽃을 피워 온 이유도 알 것 같다. 삶에 쫓겨 엄벙덤벙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 이제는 돋보기 낀 밝은 눈으로 주위도 좀 살펴 가며 천천히 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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