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천 강원도신농정기획단 연구원

[한국농어민신문] 

돌봄·체험·교육 등 초점 둔 지원사업
제한적 사회적 농업에 혼란스러워
인간·협동적 사회 향한 마중물 돼야

지난주 강원도형 사회적농업 활성화를 위한 작은 포럼이 열렸다. 처음으로 종합토론 좌장이라는 걸 맡았는데, 이제 그럴 나이가 되었을까? 계속 집중하면서 종합을 해야만 하니, 토론자로서 준비해온 말을 던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좌장에 소질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문제는 ‘사회적농업’이라는 주제가 난해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왜 난해한가?

이미 익숙해진 사회적경제 또는 사회적기업을 생각해 보자. 단순화하면 여기서 ‘사회적’이라는 수식어는 부정적 상황을 전제한다. 기존의 경제시스템과 기업의 활동이 별로 사회적이지는 못하다는 공통인식에 근거한다. 공정·연대·협동·인권·기여 등의 가치측면에서 심히 부족하고, 시대정신은 이를 반영해야한다는 공감대가 넓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적경제(기업)은 안티테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사회적농업의 경우는? 일단 사회적경제와 마찬가지의 속성이 있다. 농업의 고립과 내·외부적 단절이라는 뼈아픈 결과를 인식하는 사람들이라면, 현재의 농업이 충분히 사회적이지 못하다는 데 동의할 수 있다. 농업 고유의 사회성이 박탈당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생산주의·경쟁력중심 농정이 초래한 폐단이다.

그런데 이렇게 농업농촌의 부정적 상황을 인식하는 시민이 얼마나 될까? 그 숫자가 적다면 사회적경제의 대안적 속성을 이해하듯 사회적농업을 이해할 수 있을까? 원주에서 열린 작은 포럼일 뿐이었지만, 함부로 죄장을 맡으면 안 되겠다는 교훈과 더불어, 세 가지 중요한 논점을 얻었다.

첫째, 사회적경제를 논하는 패턴으로 사회적농업을 논하는 경우에는 신중해야 한다. 경쟁과 승자독식이 용인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시스템의 결과적 부작용 정도는 초등학교 고학년 사회시간에도 배운다. 대안적 노력의 일환으로 사회적경제도 이런저런 모양으로 마주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시민들이 여기저기서 부정적 요소를 체감할 수 있는 경제 부문과 농업농촌 부문은 다르다. 알다시피 시민들은 농업농촌의 부정적 실상을 체감하지는 못하고 있다! 광범위한 공감대는 없다. 이 차이점 때문에 사회적경제에 비추어 사회적농업을 논하면 서로 이해의 정도가 다르기에 헛돌기 십상이다.

둘째, 현재 사회적농업의 범주·대상·목적·방향 등등에 대한 인식이 저마다 제각각이라는 냉정한 사태가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바르고 일관된 정책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사회적농업이라는 용어는 매우 크다. 직관적으로는 농업의 공익성·다원성 등을 포괄하는 넒은 범주의 용어로 들린다. 단적으로 우리 농민과 소비자가 새롭게 깊은 유대관계를 맺는 것을 사회적 가치의 회복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이 사회적농업의 본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시책으로써 사회적농업은 매우 제한적이다. 돌봄·체험·교육·일자리 등에 포커스를 맞춘 지원사업에 국한되어 쓰인다. 여기서 지속적인 혼란을 피할 수 없다. 기대치와 이해가 다르니 통일된 것이 없고, 그 결과 길을 함께 찾기 어렵다.

셋째, 사회적농업이 사회적경제의 부작용이라는 전철을 밟는 일은 결코 일어나서 안 된다. 10여년을 이어 지속되고 있는 사회적경제 분야 지원사업은, 보다 인간적이고 협동적인 사회를 향한 귀한 마중물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마중물이 허비될 때가 있다. 허비되고 마느냐 아니면 나중에라도 다시 물줄기가 이어지느냐는 지역공동체 네트워킹에 달려있다. 대부분의 허비는 ‘사회적’이라는 수식어의 뜻을 가볍게 여긴 개별적 시도의 경우들이었다. 다시 말해, 지원책이라는 마중물은 지역사회 전체를 향해야 한다. 단일한 사례나 개별 농장으로 향하면 잠시 반짝할 수는 있지만, 지역공동체에 축적되지 않는다. 비난 받을만하다.

아래와 같은 기사를 읽었다. “홍성군의 사회적 농업은 기존 생산·가공·유통 등 6차 산업 시스템에 발달장애인, 지역 치매노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치료와 힐링 외에 직업 재활훈련까지 연계하여 시행하는 농업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특히 마을에 거주하는 주민들과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요리, 생활 돌봄을 통한 치유와 재활 서비스를 제공하고, 청소년을 대상으로 사회적 농업을 이해시키고 농업을 통한 진로 탐색의 기회를 제공하는 등 지속가능한 사회적 농업 기반을 조성하는 것이다.” (20.10.13자 농어민신문)

일반화란 항상 어렵다. 홍성에는 수십년 지난한 수렴과 발산의 과정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귀한 역할을 했다. 결국 홍성이라는 지역 내에서는 ‘보다 사회적인 농업’에 대한 일정한 공감대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홍성민들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멀리서 보면 부럽고 따르기 어렵다. 다른 지역에서는 일반화가 말처럼 쉽지가 않다.

강원도형 사회적농업이라는 주제 앞에서, 강원도형은 고사하고 사회적농업에 대한 우리 모두의 불완전하고 불명확한 인식만 확인했다. 그리고 모인 사람들은 우선 솔직해지기로 했다. 우리들은 아직 준비되지 못했다. 이해가 어지러우니 사회적농업에 대해서 간결하게 설명할 방법이 없는데, 무슨 강원도의 활성화를 기대한다는 말인가? 이런 냉정한 성찰을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기로 했다. 마냥 잘 해보자 잘 될 거라는 끝맺음보다는 훌륭하다고 자평한다.

어떻게든 해 보려니 이런저런 고민과 염려가 있다는 뜻이지, 절대로 사회적농업 안팎의 노력을 부정하지 않는다. 현장은 늘 어수선한 미완의 모습으로 길을 걸으며 찾는 법이니 응원하면 된다. 그러나 활성화를 논하는 정책적 기획은 다르다. 큰 것은 크게, 작은 것은 작게, 이것은 이것, 저것은 저것이라는 명료함이 필요하다. 이 모든 일은 솔직해지는 것부터다. 그래서 간단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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