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복 (사)한국농수산물도매시장법인협회 본부장

[한국농어민신문]

누구나 저마다 직분(職分)을 가지고 있다. 농수산물도매시장은 특히나 공공·공익 기구여서 특별법과 정부 정책으로 관리와 운영의 틀을 규정하고 각 종사자의 직분(역할)을 분명히 규정하고 있다.

이 도매시장에서 경매사(競賣士)는 누구보다도 그 역할이 막중하다. ‘농수산물유통 및 가격 안정에 관한 법률’에서는 경매사의 업무를 경매 우선순위 결정, 가격 평가, 경락자 결정으로 규정하고 있다.

도매시장 거래, 특히 경매는 공급(도매시장법인, 생산자단체공판장)과 수요(중도매인)를 담당하는 전문주체를 인위적으로 구분해 상호 대치·견제를 통해 이루어진다. 법인·공판장은 거래금액에 대한 일정률의 수수료가 유일한 수입원이다. 경매사를 법인·공판장 소속으로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날그날 공급과 수요의 실제 상황을 반영하여 거래가 되지만, 경매사는 수수료 수입을 늘리기 위해 높은 값을 유도하는 노력을 하게 된다. 전국의 불특정 농민을 위한 공익적 거래소 역할은 이렇게 확보된다.

경매사 역할이 워낙 중요한 만큼 농안법에서는 지도·감독 규정을 충분히 마련해 두고 있다. 국가가 실시하는 시험에 합격해야만 자격이 주어지고, 법인·공판장은 경매사를 임면했을 때 개설자에게 신고해야 하며, 업무상 중대한 과실을 저지르면 업무정지 또는 면직시킨다. 뇌물수수 등 잘못을 행하면 공무원 신분을 적용해 무거운 처벌을 내리고, 소속 법인·공판장도 같이 처벌하고 있다.

최근 가락시장을 관리하는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가 법인·공판장에, 경매를 할 때 경매사가 응찰자 즉 중도매인 번호를 볼 수 없도록 조치하라고 지시해 도매시장이 일대 혼란에 빠졌다.

우선 지시의 사유가 석연치 않다. ‘출하자가 민원으로 경매사와 중도매인 간 담합 의혹을 제기했다’, ‘일부 중도매인에 대한 편중낙찰 의혹이 있다’ 등을 이유로 들고 있는데, 어떻게 누군가의 의혹을 이유로 이처럼 중요한 행정지시를 할 수 있는지 납득할 수가 없다. 도매시장 거래는 공급과 수요의 대치·견제구조와 구매자 간 경쟁시스템으로 담합의 개연성이 차단된다. 특히 경매는 공개·경쟁의 방법을 통해 최고가격 응찰자에게 낙찰되며, 전자경매시스템은 모든 과정이 컴퓨터로 이뤄지고 실시간으로 공개된다. 근거 없는 모략은 농민의 판매대리인으로서 자기 직분에 충실하고 있는 경매사들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가 권한을 넘어서서 경매사의 업무범위를 제약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경매사가 공정하고 합리적인 거래를 주관하려면, 출하농산물 정보와 함께 구매자 정보도 알아야 한다. 구매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주 납품처는 어디인지, 어떤 품위를 선호하는지, 심지어 재고는 얼마나 되는지 등 각 응찰자의 능력과 성향 및 상황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적절한 거래를 이끌어낼 수가 있다. 응찰자를 알 수 없게 하는 ‘깜깜이 경매’로는 경매사가 제 역할을 해내기 어렵다.

석연찮은 것이 또 있다.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가 경매사의 신분을 공영제로 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경매사는 상품을 수집해 시장을 조성하고, 출하·구매 관련 정보를 종합해 거래를 주관하며, 특히 높은 가격을 유도해 농민의 이익을 보호한다. 제도적으로 경매사 소속을 법인·공판장으로 하는 취지가 명백한데, 도매시장을 관리하는 지방공사가 경매사공영제 주장을 끄집어낸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가장 많은 유통량과 유일한 공개·경쟁시스템 거래, 출하자별·품위별 가격형성, 기준가격 제시 등 도매시장은 많은 공익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특히 농민의 교섭력을 대행하고 지지하는 기능은 매우 중요하며, 도매시장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경매사의 업무범위와 내용은 도매시장의 이같은 공익기능을 가능케 하는 가장 핵심 장치이며 가치다.

이처럼 중요한 사항을 실제 출하자 의견도 충분히 수렴하지 않고, 운영주체인 법인·공판장의 반대도 무시하고, 시뮬레이션조차 해보지 않고 지방공사가 강행하고 있다. 정부와 출하자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조처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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