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이해영 한신대 교수

‘제조업 유리, 농축수산업 불리’ 공식
최근 RCEP 협정문 타결서도 이어져
‘헌법 제123조’ 위헌성 따져야 할 때


오랜 만에 헌법 제123조를 다시 한 번 읽어 본다. ‘①국가는 농업 및 어업을 보호·육성하기 위하여 농·어촌종합개발과 그 지원 등 필요한 계획을 수립·시행하여야 한다. ②국가는 지역간의 균형 있는 발전을 위하여 지역경제를 육성할 의무를 진다. ③국가는 중소기업을 보호·육성하여야 한다. ④국가는 농수산물의 수급균형과 유통구조의 개선에 노력하여 가격안정을 도모함으로써 농·어민의 이익을 보호한다. ⑤국가는 농·어민과 중소기업의 자조조직을 육성하여야 하며, 그 자율적 활동과 발전을 보장한다.’

누가 보더라도 헌법 제123조는 ‘농업 및 어업을 보호·육성’(제1항)하고, ‘농·어민의 이익을 보호’(제4항)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농어업 보호육성과 농어민 이익보호, 이는 그 어떤 이의도 허용될 수 없는 헌법적 정언명법 같은 것이다.

협상학의 원론에서도 통상조약과 같은 국제조약은 체결상대국과의 대외협상 뿐만 아니라 조약으로 인해 영향을 받게 될 국내 이해당사자들과의 대내 협상으로 나누어 다룬다. 특히나 통상협상은 그 대상이 매우 광범위하고 또한 그 영향이 매우 차별적인지라 이해관계를 달리 하는 국내 이해 당사자와의 대내 협상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농어업 보호육성과 농어민 이익보호는 국가의 헌법적 의무이기 때문에 결코 이를 회피하거나 생략할 수 없는 일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통상조약의 체결절차 및 이행에 관한 법률> 제19조는 아래와 같이 못 박고 있다. ‘(농업·축산업·수산업 보호·육성 의무 등) 정부는 통상조약의 이행을 이유로 「대한민국헌법」 제123조에 따른 농업·축산업·수산업의 보호·육성, 지역 간 균형발전, 중소기업 보호·육성 등의 의무를 훼손하여서는 아니 된다. 이 통상절차법은 헌법상 ‘농업과 어업’을 ‘농업· 축산업·수산업’으로 다시 한 번 상세 규정함으로써 변화된 경제 환경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헌법적 규범에도 불구하고 지난 20년의 우리 통상정책의 역사를 돌아볼 때, 통상조약이 체결될 때마다 ‘제조업 유리, 농축수산업 불리’는 단 한 번의 예외도 없는, 마치 통상방정식의 공식이 되어 버렸다. 농축수산업에서 빼다가 자동차, 반도체에 몰아주는, 그래서 농축수산업의 고혈을 빼다 재벌경제를 배불리는 그런 ‘합법적 불공정’은 소위 ‘통상국가’의 상식이요, 정책이요, 일상이다. 예컨대 지난 세월 우리 농업은 16건(57개국)에 이르는 FTA로 인해 수입산 농축산물과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경쟁에 내몰렸고, 막대한 피해를 봤다.

2018년 농축산물 수입액은 350억 달러(약42조5000억원)를 넘어서며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그런데 이 수치는 2018년 한국의 자동차 총 수출액 382억 달러와 비교해 별 차이가 없을 정도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이번에 협정문 협상을 마무리한 RCEP 국가를 상대로 한국은 31억5000만 달러(3조6552억원)의 농산물을 수출하고, 66억8000만 달러(7조7515억원)의 농산물을 수입해 두 배 이상의 심각한 무역수지 적자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보자면 대 RCEP 농업부문 무역적자는 다른 조건이 불변이라면 향후 더 확대될 것이 분명하다.

RCEP 즉 역내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은 전 세계 인구의 약 50%를 포괄하고 세계 국내총생산(GDP) 29%의 규모를 차지한다. 하지만 이런 수치는 그 자체로 어떤 것도 보장해 주지 못한다. FTA가 새로운 성장 동력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것도 환상에 불과하다. 경험적 연구에 따르면 FTA 갯수가 늘면 그 경제효과는 오히려 감소한다.

저 수많은 FTA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의 성장 동력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금의 통상정책 특히 그 인식론적 기반을 이루는 수출지상주의는 개발독재 시대의 유물이다. 통상정책 패러다임의 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에 또 하나의 메가FTA는 축복이 아니다. 지난 20년의 경험을 놓고 볼 때 우리 농업은 이제 그 정책의 위헌성을 따져야 할 시점이다. 국가는 헌법 123조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가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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