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1590년 무렵 남미대륙에서 유럽으로 건너온 감자는 처음에 유럽 상류층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고 가축사료로 사용됐다. 성경에 언급되지 않았고, 시체를 묻는 땅에서 나온 열매라는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영국의 오랜 식민지 수탈로 피폐해진 아일랜드 민초들에게 구황작물 감자는 주곡으로, 구세주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1845년 가을부터 원인 모를 질병으로 아일랜드의 감자가 전멸했다. 감자에 삶을 의존하던 아일랜드인 100만명 이상이 굶어죽었고, 100만명 넘게 새 삶을 찾아 신대륙으로 향했다. 안데스산맥 구석에서 자라던 주먹만 한 작물이 불러온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1861년에 식물병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독일의 식물학자 ‘안톤 데 바리(Anton de Bary)’가 유럽과 신대륙의 역사를 흔들었던 감자흉작의 원인이 ‘감자역병’ 때문이었던 것으로 밝혔다. 사람이나 동물과 마찬가지로 식물도 병원균에 의해 병이 걸린다는 사실을 최초로 확인한 것으로 과학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우리 농업현장이 과수화상병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1780년 미국 뉴욕주에서 처음 발견된 화상병은 이후 유럽과 오세아니아 등 다른 대륙으로 확산돼 문제가 됐다. 2000년 미국 미시건주에서는 940여ha에 이르는 광대한 사과과수원에서 40여만주의 나무가 고사하는 피해를 입은 바 있다. 우리나라는 화상병 청정국가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2015년 천안, 안성의 배나무에서 처음 발견됐고, 올해는 충북 지역까지 크게 확산돼 전국 과수농가에 비상이 걸렸다. 화상병은 구제역과 마찬가지로 발생 과수원 전체를 매몰해야 하는 질병인데다, 치료도 어려워 과수농가에 큰 고통을 안겨 주고 있다. 또 세계 각국의 검역 과정에서 엄격하게 규제하는 병이기 때문에 수출에도 큰 걸림돌이 된다. 그동안 농촌진흥청과 농림축산검역본부, 지자체와 관련 학계 등이 힘을 합쳐 병 확산 차단에 애써왔지만 근본적 해결을 위한 답을 찾는데 다소 시간이 필요한 실정이다. 농촌진흥청은 지난 7월 미래 농업R&D(연구개발)의 핵심과제로 ‘미생물의 과학적 이용 및 관리기반 구축’을 선정하고, 피해가 심각한 병원성 미생물 제어기술 개발 연구를 강화키로 했다. 특히 화상병 해결을 위해 올해부터 긴급과제를 추진하고 2020년부터 5년간 국가 주도의 산학연 공동 프로젝트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화상병의 발생 역학과 진단기술, 생물·화학적 방제기술, 유전적 제어기술, 저항성 품종 육종 연구 등 민관이 힘을 합쳐 화상병 피해를 줄이기 위한 총력전을 펼칠 계획이다.

‘위기’라는 단어에는 ‘위험’과 ‘기회’가 함께 들어있다고 하지 않던가. 감자 대기근은 당시 아일랜드 사람들에게는 많은 상처를 남겼지만, 과학적으로는 식물병리학 연구의 시발점이 됐다. 작금의 과수화상병 위기가 우리나라 농산업과 과학기술 도약을 위한 계기가 될 수 있도록 헌신적인 노력이 필요한 때다. 박테리오파지 등 화상병의 생물적 방제기술과 유전적 병원균 제어기술은 새로운 미생물 소재 산업을 일으키고, 농업과학기술 발전의 선두주자가 될 수도 있다. 화상병 저항성 신품종은 우리나라 과수품종을 다양하고 풍성하게 만들 것이며, 화상병 청정국가 회복은 수출시장에서 우리나라 사과, 배의 경쟁력을 높이는데 기여할 것이다. 과수화상병 문제를 걱정하며 잘잘못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다. 화상병이 우리에게 주는 강력한 메시지를 잘 읽고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정책과 연구, 현장의 관계기관뿐만 아니라 과수농가까지 사명감을 갖고 일심동체가 돼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현란 농촌진흥청 작물보호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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