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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女담] ‘콩의 변’이음전

매일 넓은 상 위에 우리를 부어놓고 주인은 흠결 있는 나의 친구들을 골라냈어. 집안에서도 견디기 어려운 폭염이 지속되는 요즈음은 에어컨을 켠 채 거실에 앉아서 그 일을 계속하더군.

여러 알곡 가운데에도 우리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지루한줄 모르겠대. 동글동글한 모양새도 사랑스러운지 바라보는 눈길이 늘 그윽했지. 그러면서 손바닥 가득히 우리를 담고 뚫어지게 쳐다보며 정말 예쁘고 실하다는 말을 연신했어. 둥글기 때문에 주인의 손아귀에서 미끄러져 쉽게 빠져나가려 한 적도 있는데 기어코 움켜잡는 그 힘을 당해보지 않으면 모를 거야.

최신 기계로 정선을 마쳤다지만 점박이나 쭉정이인 친구들을 다시 한 번 손으로 일일이 가려내는 주인은 그 때마다 매의 눈이 된다는 걸 알고 있지. 한 점 티 없이 맑은 얼굴로 함지박에 들어앉아 있는 우리들은 이후의 행보를 충분히 알고 있어. 메주를 빚어 된장을 담고 남겨놓은 나의 친구들을 이 지독한 폭서의 계절에 시원한 콩국수나 콩물용으로 판매하면 인기가 드높았잖아. 올해도 어김없이 전국의 고객들에게 기꺼이 소매될 것임이 분명해. 불평하지 않고 나는 얌전하게 새 주인을 따라갈 거야. 어느 댁 식탁에서라도 나를 맛있게 요리해서 먹어준다면 더없는 축복이라 여기니까.

한낱 곡식에 불과하다며 나를 혹 과소평가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면 정말 서운한 일이야. 나를 이용한 음식의 가짓수가 얼마나 많으며 구수한 맛은 동서고금의 사람들이 현혹되었잖아. 반드시 사람의 몸에 필요한 영양소 단백질을 거론할 때마다 첫 번째로 꼽히는 음식도 된장이나 두부가 아니었나? 나를 밭의 쇠고기라 칭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그 어떤 수식어보다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이야. 인류의 건강에 끼친 우리의 영향은 지대할 거야.

오랫동안 묵묵히 곁에 있어주니 한 때는 그 소중함을 미처 몰라주는 것 같아서 섭섭한 마음 그지없었지. 언제부턴가 진가를 알고 푸지게 된장을 담그며 살고 있는 주인을 보며 우리는 새삼 자긍심을 갖게 돼.

더위가 무르익는 칠월에 예년처럼 주인부부는 거름을 뿌리고 흙을 포슬포슬하게 만들었어. 건강한 친구들만 서늘한 저장고에 소중히 갈무리했다가 시기를 놓칠세라 서둘러 파종을 마치는 주인의 센스는 올해도 발휘되었어. 스프링클러를 돌려 수분을 기가 막히게 맞추는 정성을 더하니 움을 틔우고 알맞은 기운에 밀려서 우리들은 일제히 세상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어. 캄캄한 땅속이 답답하고 하늘이 그리워서 쏙 고개를 내미는 순간이었어. 난데없는 비둘기가 나타나서 나와 친구들의 머리를 쪼아 먹고 급기야는 내 몸통까지 중심을 잃게 만들었지. 그때의 혼미함을 어떻게 표현할까? 준비 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무척 놀랐지만 우리들에게 유난히 애착하는 주인에게 실망을 주기 싫어서 다시 한 번 기운을 내게 되더군.

비둘기의 습격에 우리들만큼이나 당황한 주인도 당장 묘책을 마련했어.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방법이야. 너무나 평범하면서도 획기적이라고 생각해. 높다란 장대를 밭의 중심에 몇 개나 세워두고 독수리 모형을 매달았어. 두꺼운 종이로 만든 독수리는 바람 부는 방향대로 움직여서 먼데서는 마치 용맹스럽게 날갯짓 하는 것처럼 보여. 비둘기의 습격으로 농사를 망친 어느 농부의 절실함으로 탄생한 아이디어 발명품이 아닐까 싶어. 날짐승의 제왕 독수리가 밭에서 버티니 비둘기의 두려움은 극에 달했을 거야. 그동안 우리에게 부린 행패를 생각해봐. 비둘기가 더럭 겁내는 존재가 나타났다는 사실이 난 너무나 통쾌했어. 하지만 꾀가 많은 비둘기가 종이 독수리의 실체를 곧 알아차리지나 않을까 염려가 커.

유례없는 폭염으로 나도 목마르는 순간이 여러 번이었어. 그럴 때마다 주인이 달려와서 목을 축여주었지만 갈증 증세는 자주 나타나. 지금쯤 훌쩍 자라서 내 키가 주인의 정강이를 웃돌아야 되는데 아직은 미치지 못한 편이야. 빨리 성장하고 싶어. 지금이라도 비가 흠뻑 내려준다면 다른 친구들보다 먼저 꽃을 피우고 건강한 열매로 맺을 수 있을 것 같은 의욕이 불끈불끈 생기거든?

타작마당에서 황금색깔의 나를 어루만지며 흡족해하는 주인 내외의 웃음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어. 폭염으로 인한 가뭄과 비바람도 거뜬히 극복해서 주인의 품에 달려가 안기고 싶어. 무엇보다 종류도 다양한 맛있는 음식으로 거듭나서 내 소임을 다하고 싶어. 나아가 세계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사랑받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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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어촌여성문학회 회원
편지마을회원
한국문인협회 문경지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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