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길 논설위원, 한국농어민경제연구소장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9개월이 지나고, 해도 바뀌었다. 새 정부가 탄생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평창 동계 올림픽도 치르고, 곧 6.13 지방선거와 재보선을 앞두고 있다. 촛불과 탄핵, 새 정부 출범으로 세상은 어떤 방향으로 움직였는가? '나라다운 나라'를 향한 문재인 정부의 약속은 지켜지고 있는가?

문재인 정부 들어 국정농단으로 망가진 나라의 상식이 회복되어 가고, 적폐청산 작업도 상당부분 진행되고 있다. 갈 길이 멀긴 하지만, 일자리 문제 해결 노력, 소득주도 성장으로 경제패러다임 전환, 건강보험과 아동 노인 복지 강화, 집값 안정 노력, 탈핵 에너지전환, 한반도 평화 노력 등 문재인 정부가 꼽는 국정 성과는 나름 평가할 만하다.

문재인 정부의 행보는 그러나 유독 농업분야에서는 답답하리만치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농업분야는 적폐 청산과 농정대개혁의 염원과는 달리 이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기존의 대선공약 조차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것 같다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농민시민사회에서는 대선 이전부터 그동안 농업을 망쳐온 경쟁력 지상주의, 생산주의 농정을 탈피, 농업의 다원적 가치와 이에 대한 직불제 중심의 지속가능한 농업으로 전환하라는 목소리를 내왔다. 문재인 대통령도 후보시절 이를 일정부분 수용해 ‘농정의 기본틀부터 바꾸겠다’고 선언하고, 대통령 직속 농어업특별기구 설치, 직불제 중심 농정으로 전환, 농어업회의소 법제화를 상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지난해 7월19일 발표된 ‘국정운영 5개년 계획 100대 국정과제’의 농업, 먹거리 분야에는 대통령의 공약조차 제대로 담지 않아 비난을 샀다. ‘경쟁과 효율만 강조해온 농정에 대한 국가 철학과 기조를 근본부터 바꾸겠다’던 약속 대신 6차 산업, 스마트 팜 같은 지난 정부들의 기업농 정책을 답습하거나 단기적 현안관리 차원의 사업 나열에 그쳤기 때문이다. 물론 고 농민 백남기 선생에 대한 정부 사과, 우선지급금 환수 문제, GM 작물 개발 중단 등과 같은 현안이 처리되고,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농정개혁위원회를 구성하면서, 그래도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농민들과 함께 농정의 대전환을 이루기 위한 대통령 직속 특별기구법안, 농어업회의소 법안은 여소야대 지형의 국회에서 표류하고 있다. 올 농업예산, 농림축산식품부 업무계획, 2018~2022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 발전계획 역시 농정대개혁이 아니라 공약보다 축소된 국정운영계획의 연장선이란 평가다. 농정개혁위원회는 현장 농민들이 바라는 농정개혁보다는 농정관료 주도로 운영되고 있어 혁신적인 내용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한 농정개혁위원은 “어떤 사안에 대해 농민대표나 민간위원이 문제를 제기하면, 관료들이 시간이 없다거나 재경부가 반대한다는 등의 이유를 대는 바람에 문제를 근본적으로 토론하기가 어렵고, 부서별로 가져오는 것을 검토해 주는 꼴”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런 식으로는 이전 정부의 허다한 위원회처럼 무마용이 되기 때문에 향후 운영하는 것을 보면서 계속 할지 여부를 고민 하고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또 다른 농정개혁위원은 “장관 자문기구는 자문만 할 뿐이고, 민간 위원들과 실무기획단 중간에 관료들이 있기 때문에 관료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면서 “생산주의 농정을 다기능 농정으로, 사업 중심을 직불 중심으로 바꾸는 농정개혁 과제는 결과를 내기 어려운 구조”라고 분석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그것은 역대 정부로부터 이어온 경쟁력 지상주의 농정의 적폐와 그 생태계가 여전하고, 지난 정부의 농정관료들이 온존하고, 대통령 주변과 정부의 파워엘리트들이 농정대개혁에 대한 의지가 미약해서라고 한 전문가는 말한다. 또 다른 전문가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농정개혁에 관해 이뤄진 게 뭐냐?”고 반문하면서 “높은 지지율 믿고 사회적 소수인 농민을 외면한다면 어떻게 촛불정부라고 할 수 있느냐”고 비판한다.

상황을 감안할 때, 농정대전환은 정권 초기인 이 때 범국가적으로 논의하지 않으면 물건너 간다. “개혁 대상인 관료들이 무슨 개혁을 하느냐”는 세간의 의문처럼, 이대로 두면 농정대개혁은 요원하다. 일모도원,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 여소야대의 국회 때문에 대통령 직속 특별기구 법제화가 안 된다는 소리는 하나마나 한, 무책임한 얘기다. 지금 대통령 특별기구를 법으로 만들지, 대통령령으로 만들지를 두고 따지기엔 농민들의 삶의 긴박함이 골든타임을 지나고 있다.

대통령 직속 농어업 특별기구를 통해 새로운 농정으로 나아가는 것은 이제 대통령의 의지에 달려있다. 문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청년 실업과 취업준비생, 중소상인, 세월호 희생 학생, 어린이, 노인, 여성, 치매환자,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장기소액연체자를 일일이 위로한 것처럼 농어업특별기구를 통해 농민을 보듬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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