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길 논설위원, 한국농어민경제연구소장

 

1996년 헌법에 농업 조항 승인
정부 지원의무 등 구체적 명시
올 9월엔 식량안보규정 추가돼
30년만의 기회, 놓치지 말아야


아름다운 알프스의 나라 스위스는 1인당 국민소득이 8만달러로 세계 2위인 선진국이고, 국가경쟁력도 9년 연속 1위다. 유엔의 ‘2017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스위스는 노르웨이, 덴마크 등에 이어 행복지수 4위다. 산악지역이고, 자원이 빈곤하며,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고난을 겪어온 점은 우리와 유사한데도 스위스는 특유의 경쟁력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다. 

스위스의 비결 가운데 농업에 대한 국가 철학과 농정은 이번 개헌 국면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만 하다. 스위스는 연방헌법에 농업의 다원적기능과 지속가능한 농업, 식량안보와 농지보전, 직접지불을 비롯한 지원의무 조항을 두고 있다. 1996년 6월9일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에 농업조항을 승인한데 이어 올 9월 식량안보에 대한 규정을 별도로 신설했다.  

스위스헌법은 농업의 역할과 기능을 국민에 대한 식량공급의 보장, 천연자원의 보존 및 농촌경관의 유지, 인구의 지역분산으로 규정했다. 심지어 정부는 ‘농업에서 합리적으로 기대되는 자구조치에 더해 필요한 경우 자유경제의 원칙을 배제하고 농지를 경작하는 농장을 지원한다’고까지 했다. 나아가 농업이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연방의 조치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직접지불을 통한 농업소득 보전과 그 조건, 자연친화적이고 환경적인 생산방식에 대한 추가 지원, 식료품 생산의 전 과정을 법률로 공개, 비료 화학물질로부터 환경을 보호하는 내용이다. 또한 농업 연구, 상담 및 교육을 장려하고 투자를 지원하며, 농지소유(경자유전)를 강화하는 법률을 제정한다고 돼있다. 

스위스는 지난 9월24일 국민 79%의 압도적 지지로 헌법을 개정, 추가로 ‘식량안보’ 항목을 신설했다. 그 아래에 토지를 포함한 농업생산 기초 보존, 지역에 적합한 식량생산 및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 농업 및 식품산업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기여하는 무역관계, 식량자원의 낭비 방지를 담았다.  

스위스는 이런 헌법을 근거로 농업예산의 80% 정도를 직불로 투입하고 있다. 스위스가 빼어난 자연경관에 농촌환경이 조화된 아름답고 행복한 나라, 세계적인 관광대국이 된 배경에는 농업에 대한 정부와 국민의 아낌없는 지원이 있었던 것이다. 경쟁과 효율만 강조한 농정으로 농촌을 파괴하고, 도시에 비해 농가소득은 60%대, 곡물자급률이 24%에 불과한 우리가 무엇을 반성하고,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 지 드러나는 지점이다. 

현재까지 정치권의 개헌 논의 중 농업관련 내용은 ‘경자유전의 원칙’을 폐지하려고 검토했던 것이 전부고, 지속가능한 농업을 위한 농정대개혁, 농민권리는 들어있지 않다. 이번 헌법 개정논의를 방치할 경우, 권력구조 개편이나 선거제도 등 자기들의 밥그릇을 먼저 챙기고, 노동자 농민보다는 재벌 등 기득권의 이익과 타협할 우려가 있다. 이를 방지하고 농민의 요구를 헌법에 담고자 하는 운동과 논의가 각계에서 활발하다. 지난 18일 ‘농민권리와 먹거리기본권 실현을 위한 헌법개정 운동본부’(농민헌법운동본부)가 출범한데 이어 27일 한국농업법학회 추계학술대회가 ‘미래의 농업 농촌과 헌법적 과제’를 주제로 열렸다. 11월1일에는 국민농업포럼, 농민의 길, 한국농축산연합회 공동으로 ‘건강한 먹거리, 지속가능한 농업 농촌을 위한 농림수산식품분야 헌법개정 토론회’가 진행된다. 

이번 개헌에서는 스위스 헌법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고 농민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사동천 홍익대 법대 교수(한국농업법학회 회장)는 “스위스는 농장에서 식탁, 그리고 음식물 쓰레기까지 식량안보의 모든 중요한 측면을 개정 헌법에 담았다”며 “우리의 새 헌법도 식품안전, 식량안보, 농업의 지속가능성과 공익적 기능, 농어민의 소득보장 및 권익신장을 반영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농지는 국민의 식량생산기반으로서 공익적 성격인 만큼 현행 ‘경자유전의 원칙이 달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농지의 소작제도는 금지된다’고 애매하게 표현된 것을 ‘경자유전의 원칙을 준수하며, 농지 소작제도는 금지한다’고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먹거리를 국민 기본권으로 추가해야 한다는 여론도 강하다. 윤병선 건국대 교수는 “현행 헌법에는 국민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사회보장, 사회복지, 여성의 복지와 권익, 노인 청소년 복지 등은 규정돼 있지만, 먹거리 기본권은 없다”며 ‘모든 국민은 적절한 먹거리에 대한 권리와 굶주림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가진다’는 조항을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번 개헌이 30년만의 개헌이듯 헌법은 한 번 고치면 또 언제 바꿀지 모른다. 현행 헌법은 농민의 권리, 농업의 가치, 지속가능한 농업을 제대로 규정하지 않아, 하위 법률도 이를 담보할 수 없다. 따라서 이번 헌법 개정에서 어느 수준으로 농민의 입장을 담아내느냐에 따라  농업과 농민의 지금부터 30년의 미래가 결정된다. 우리가 개헌 논의를 중시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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