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 발생으로 두 달 이상 입식을 하지 못해 생활고에 시달리는 가금 사육 농가가 늘고 있다.

“입식 지연 때문에 벌써 1년 농사의 절반을 망쳤습니다. 생활비라도 벌기 위해 막노동이라도 해보려 했지만, 건설 경기가 어려워 이마저도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경기 포천에서 5만수 규모로 육계를 사육하는 변대철 씨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지난해  11월에 국내에서 H5N6형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가 발생한 이후 포천에서도 수차례 반복해 AI가 터지면서 병아리 입식 지연으로 사육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AI 발생하지 않았거나
예방적 살처분 안한 농가도
대책 없는 입식 금지에
금전적 손해 심각

충청·전라도 계열업체도
예찰지역에 해당돼 
전체 사육농가 35% 입식 지연
병아리 폐기도 늘어 피해 가중

예찰지역 아닌 곳에 입식 몰려
방역 역효과 우려 목소리도
닭고기 공급 부족도 불보듯


▲AI로 초토화된 가금사육 현장=다른 지역에 비해 사육 인프라가 열악한 경기 북부 지역의 육계 사육 농가들은 1년에 평균 5회전밖에 사육을 하지 못하는데, 입식 지연으로 벌써 2회전의 사육 기회를 놓쳤다. AI가 발생하거나 예방적 살처분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4000만원의 금전적 손해를 입었다는 것이 변대철 씨의 설명이다.

변대철 씨는 “정부에서 시설현대화 자금을 지원받은 농가들은 분기마다 원금과 이자를 상환해야 하는데, 연말에 사육을 못해 대부분 연체된 상황”이라며 “당장 생활비도 부족해 어떻게 생계를 유지해야 할지 막막하다”라고 심정을 토로했다.

변대철 씨가 가장 답답하게 느끼는 것은 대책이나 대안 없이 무작정 입식을 기다려야 하는 현재의 상황이다. 생활고를 토로하며 지자체에 방문해도 농식품부의 방침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답변만 돌아오고, 농식품부도 산발적으로 AI가 발생해 10km의 방역대를 축소시켜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포천의 육계 사육 농가들은 하릴없이 입식이 되는 날만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농식품부와 지자체가 AI 확산 방지를 명목으로 농장 내 계분 반출과 환기를 금지시켜 시설물이 부식되고, 입식 준비도 지연되고 있다.

변대철 씨는 “육계는 산란계나 오리와 달리 AI가 직접 발생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방역대에 같이 묶여 피해를 봐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서 “농식품부가 무작정 입식을 금지할 게 아니라 입식이 가능한 시점에 대해 예상이라도 해줘야 농가들의 심적 부담이 조금이나마 해소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정부의 생계안정자금 지원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피해가 컸던 산란계와 오리의 경우 설 전에 살처분보상금과 생계안정자금 일부를 지급했지만, 피해가 거의 없는 육계 사육 농가들은 뒷전 이었다는 것이다. 또 생계안정자금의 금액도 통계청이 조사해 발표하는 육계 생산비의 70%선에서 결정되는데 육계의 경우 마리당 120원 밖에 지원되지 않아 현실성이 없다는 지적이다.

변대철 씨는 “농식품부가 AI 발생농가 지원에만 몰두하다보니 입식이 지연되는 농가들은 등한시되고 있다”면서 “AI가 발생하지도 않았는데 입식 지연으로 피해를 보는 농가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계열업체들도 입식 지연으로 고통=입식 지연으로 피해를 보는 것은 육계계열업체들도 마찬가지다. 국내 육계계열업체들은 대부분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 밀집돼 있는데 대부분의 지역이 예찰지역에 해당되는 까닭에 전체 계약 사육 농가의 35.1%가 입식이 지연되고 있다. 이에 육계 업계에서는 현행 AI 발생농가 반경 10km의 예찰지역을 3km로 축소해 달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한국육계협회에 따르면 국내 11개 육계계열업체를 기준으로 총 1662 농가가 있는데 이 중 AI가 발생해 예찰지역에 묶인 농가는 총 1324농가다. 여기서 기본 예찰지역인 발생 농가 3km 이내 지역을 제외한 10km대에 묶여 입식을 하지 못하는 농가만 584농가로 전체 농가의 35.1% 수준이다.

입식 지연에 따라 병아리 폐기도 늘었다. 기존에는 주당 병아리 폐기수수가 22만6000수 가량이었지만, AI 발생에 따라 예찰지역이 확대되며 1월 셋째 주는 177만5000수, 1월 넷째 주 401만수, 1월 다섯째 주 403만수, 2월 첫째 주 401만수 등으로 급증했다.

이 같은 입식지연과 병아리 폐기에 따라 육계계열업체와 계약사육농가들의 피해도 증가되고 있다. 육계계열업체의 경우 주당 300만수의 병아리를 폐기했을 때 월간 80억원의 피해가 발생한다. 또 계약사육농가는 300만수 기준 월간 약 45억원의 사육수수료가 감소할 것으로 육계 업계는 전망하고 있다.

입식지연이 금전적 피해뿐만 아니라 방역에도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문제도 제기됐다. 현재 계열업체들이 예찰지역에 포함되지 않은 농가들 위주로 병아리 입식을 늘리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들 농가 중에는 사육환경이 열악한 비닐하우스 농가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또 육계를 출하한 후에는 한 달가량의 휴지기를 가지며 계분을 치우고 소독을 해야 하지만, 계열업체들의 부탁으로 일주일의 휴지기만 가진 채 재입식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 충남 부여의 한 육계 사육 농가는 “닭고기 시세가 좋을 때에도 보너스를 받은 적이 거의 없는데, 이번에 계열업체가 빠른 재입식을 요구하며 150만원을 지원해줬다”면서 “농가 입장에서는 보너스를 받아 좋지만, 한편으로는 방역에 걱정이 되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입식 지연으로 올 봄에는 닭고기 공급이 부족해 가격이 상승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육계 업계에 따르면 2월 초순까지 예상 입식 수수가 850만수로 지난해 1147만수에 비해 약 30%정도 하락해 3월 초순 닭고기 가격이 크게 상승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에 육계 업계는 외국산 닭고기의 수입으로 국내 닭고기 시장 점유율이 하락할 것을 우려하며 정부에 예찰지역 축소를 주장하고 있다.

정지상 육계협회 상무는 “현재의 입식 지연이 지속될 경우 올 1분기에 닭고기 공급이 부족해지고 가격이 상승해 외국산 냉동 닭고기 수입량이 증가할 것”이라며 “현재 AI가 진정국면에 접어들고 있는 만큼, 정부가 예찰지역 축소로 병아리 입식제한 조치를 조속히 완화하는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다.

▲입식 지연이 지역 간 갈등 초래=입식 지연이 지자체 간 불화의 씨앗이 되고 있다. 경남 지역의 한 육계 사육 농가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서 유일하게 AI가 발생하지 않은 경북도는 AI 발생 방지를 명목으로 타 지역에서 부화한 병아리 반입을 금지했다. 경북도 내에 자체 부화장이 있는 계열업체들은 계약 사육 농가들에게 병아리를 납품할 수 있지만, 일반 사육 농가들과 경북 지역 내 부화장이 없는 계열업체와 계약한 사육 농가들은 병아리를 구할 방도가 없어 입식이 지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 해당 농가는 “타 지역의 경우 예찰지역에 묶여 입식이 지연되는데 경북 지역의 육계 사육 농가들은 병아리를 구할 방도가 없어 사육을 못하고 있다”면서 “경북도에서 타 지역에서 부화한 병아리의 반입을 허용해야 입식 지연이 해소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경북과 인접한 경남지역의 일부 지자체에서는 경북지역에서 부화한 병아리만 입식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 곳도 있어 입식 지연의 문제가 더욱 커지고 있다. 일부 계열업체들은 타 지역에서 산란한 종란을 경북 지역의 부화장으로 옮긴 후 부화하는 등 편법을 사용하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또 다른 문제는 경북도의 타 지역 병아리 반입 금지 조치가 중앙 부처로부터 ‘AI 발생 예방’의 우수사례로 칭찬받으며 이 같은 행위를 타 지자체가 벤치마킹하고 있고, 지역 간 불화로까지 번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 육계 사육 농가는 “경북도가 타지역 병아리 반입을 금지한 것을 황교안 대통령권한대행이 칭찬한 이후 다른 지자체에서도 타지역 병아리 반입 금지 조치가 발생하고 있다”면서 “또 일부 지자체에서는 반입 금지 조치를 가장 먼저 시행한 경북도의 병아리 반입을 금지하며 감정적인 대응을 하는 곳도 있는데 결국 농가들만 손해를 입게 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자체 살처분 보상금 부담 가중=예기치 못한 사상 최대 규모의 피해가 발생해 보상금과 매몰비용에 지자체들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AI 발생으로 전국 819농가에서 가금류 3281만수가 살처분 매몰 됐다. 도별 피해 규모를 보면 경기도가 205농가 1572만2000수로 가장 많고, 충남 118농가 598만8000수, 충북 108농가 392만수, 세종 30농가 289만3000수, 전북 115농가 262만3000수, 전남 74농가 132만3000수, 경남 14농가 22만1000수, 강원 122농가 11만9000수, 부산 16농가 1000수, 인천 17농가 400수 등이다. 특히 전체 피해의 약 절반 가량을 차지한 경기도의 경우 안성, 이천, 포천, 평택, 화성 등의 지역에 집중됐다.

이 같은 피해가 발생함에 따라 지자체에서도 보상금의 일부를 책임져야 한다. 가축전염볍 예방법에 따라 살처분 보상금을 정부가 80%, 도와 시·군이 20%를 분담토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전국의 살처분 보상금만 해도 3000억원을 육박할 것으로 추정되면서 살처분이 대량 집중된 시·군에서는 예산 확보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지자체의 한 관계자는 “재정 자립도가 높은 수준인 지자체에서도 AI 피해가 너무 막대하다보니 보상금을 마련하지 못하고 도의 예비비 등을 지원받기도 했다”며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가축질병 살처분 보상을 현행 규정으로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밝혔다.

또 다른 지자체의 관계자는 “이번 AI 사태를 보듯 가축질병 발생을 차단하는 것에 집중해야 하지만 공공예산의 부담을 줄이며 안정적으로 보상해 주는 제도가 필요하다”며 “가축재해보험의 보장 범위를 자연재해와 화재 등은 물론 가축질병도 포함시키는 방안이 요구 된다”고 제안했다.

보상금 이외에도 살처분과 매몰에 소요되는 비용에 대한 개선의 목소리도 제기되고 있다. 현행 가축전염병 예방법에 ‘지자체가 지원할 수 있다’는 임의 규정으로 돼 있어 지자체의 부담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지자체 한 관계자는 “시군의 재정이 열악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보상금에다 살처분 관련 비용도 부담해야 하니 지자체의 어려움은 더욱 가중된다”고 밝혔다.

이를 개선하기 위한 가축전염병 예방법 일부 개정안도 발의됐다.

황주홍 국민의당(전남 고흥·보성·장흥·강진) 의원은 살처분 및 매몰 비용을 국가 및 지자체가 지원하고 지자체이 부담은 100분의 20을 초과할 수 없도록 하는 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황주홍 의원은 “살처분 및 매몰 관련 비용은 지자체에서 지원할 수 있다는 임의 규정 때문에 정부에서 지원하지 않아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자체의 부담이 된다”고 개정안 제안 이유를 설명했다.

이병성·안형준 기자 leebs@agri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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