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의 시간은 계절 단위로 지나갑니다. 하루 일 주일 단위가 아니라 뭉턱뭉턱 지나가니 한 달이, 계절이, 일 년이, 눈 깜짝할 사이입니다. 어느덧 가을 초입이군요.

아침저녁으로 공기 선선하고 귀뚜라미 우는 소리 밤새 요란합니다. 짝을 찾는 벌레들이 목청껏 울어댑니다. 이 땅에 나왔으니 자손을 퍼뜨려야지요. 아주 작은 미물들도 이렇듯 계절 따라 저마다의 모습대로 움직이며 소리 지르며 준비하며 순응하며 살아갑니다.

이제 구들장에 장작불을 피워야 할 때가 찾아왔습니다. 가족이 사는 집에도 온기를 불어넣어야지요. 참 예쁜 가을이 오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싱숭생숭 바빠집니다. 겨울을 준비해야 하거든요. 밭에 앉아 해질녘 가을 노을을 보며 내 삶의 시간도 가을쯤 와 있구나, 긴 휴식을 준비해야 하는구나 괜히 염세주의 철학자가 되기도 합니다.

시간을 먼저 사는 농부들은 이맘때쯤 11월 넘어 하게 될 김장배추와 김장무, 쪽파, 갓, 김장재료들을 심고 가꿉니다. 가을 가뭄이 심한데도 배추들이 잘 자라주었고 열심히 결구를 시작했습니다. 유난히 벌레들이 심한데 아침저녁으로 손으로 벌레잡고 친환경 미생물 약 뿌리고 영양제 주고 배추보다 큰 풀들은 예초기로 잘라줍니다. 문전옥답, 집앞 마당이 배추밭이라 매일 마주치는 배추들을 내몰라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무를 솎고 맛있게 비빔밥을 해 먹었습니다. 한 구멍에 무 씨앗 서너 알을 넣어 서로 경쟁하며 올라온 싹들 중 튼실한 한 놈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솎아주는 것이지요. 물론 살려고 애써서 나온 싹들을 뽑을 땐 조금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매주 도회지에서 출장농부로 내려오는 선배는 함께 무를 솎으면서 ‘선택과 배제, 미안하다’를 속으로 외쳤다는군요.

무 솎은 것을 깨끗이 씻어 소금 넣어 숨을 죽이고 양념을 넣어 열무김치처럼 무순김치를 담으면 두고두고 신선한 맛이 나는 김치를 맛볼 수 있지요. 오늘은 무 솎은 걸로 무순김치를 담으려고 절여놓고 조금 남겨 무순비빔밥을 해먹었습니다.

손으로 한 움큼 잡아 뭉턱뭉턱 잘라 큰 볼에 넣고 밥 두 주걱, 고추장 한 스푼, 애호박 삶은 것 조금, 콩나물 조금 넣으니 볼이 풍성해졌습니다. 여기에 국물이 빠질 수 없지요. 큰멸치 서너 개 우린 물에 통감자 3개를 둥글게 썰어 넣고 양파 1개 썰어넣고 말린 표고버섯 3개, 마늘 다진 것, 고춧가루 한 스푼 넣어 자작하게 끓인 후 파를 쏭쏭 썰어 넣고 소금간을 하면 10분 만에 얼큰감자국 완성. 고춧가루를 넣지 않고 청양고추 한 개 썰어 넣으면 담백한 감자국이 되겠지요.

이제 쓱싹쓱싹 잘 비벼 감자국과 함께 입으로 들어가니 기가 막혀요. 신선한 무순의 씹는 식감이 오감을 자극하고 입안에 감도는 채소들의 향연이란 그 어떤 설명으로도 부족하지요. 이 맛에 농사짓는 거랍니다. 무를 솎을 때 미안했던 마음은 다 사라지고 고마운 이 맛에 흠뻑 취해 배가 터지는 줄 모르고 순식간에 큰 볼을 다 비워냅니다.

농부의 특권 중에 가장 으뜸이지요. 계절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것도 농부요, 가장 신선할 때 맛볼 수 있는 것도 농부지요. 밭에서 금방 가져와 맛이 살아있을 때 맛보게 되니까요.

이제 밭에서는 외롭게 남은 한 포기 무들이 햇살 가득 받고 이슬 받고 땅 속 양분 담아 무럭무럭 살을 찌우겠지요. 사람들 겨울 식량을 위해 종아리 크기만큼 제 몸집을 키우겠지요. 이맘때만 드실 수 있는 무순 비빔밥 드시러 시골 오지 않으실래요? 부럽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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