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목 한농연 농정연구소 소장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악착같이 일하는 사람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장 똑똑한 사람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 이민을 가도 수년 내에 중산층 또는 그 이상으로 자리 잡는다. 우리 농민들도 마찬가지다. 세계 어느 나라 농민보다 똑똑하고, 부지런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일하는 만큼 소득이 오른다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할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우리 농민들이 못사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게 단지 영농규모가 작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왜 많은 농민들이 악착같이 일하기보다는 미리 포기한 채 패배감에 젖어 있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 민족의 또 다른 한 특징, 즉, ‘내가 노력하는 만큼 보상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 아닐까? 열심히 농사지어서 출하를 해도 남는 게 없다면 누가 뼈 빠지게 일하겠는가? 농민들이 악착같이 일하지 않는 이유는 그렇게 하더라도 잘살아지지 않는 현재의 농업생산·판매체제와 시장구조,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농정체제에 있지 않을까? ○생산성 향상돼도 소득은 제자리 정부는 그동안 우리 농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우리 농민을 잘살게 하기 위해 개별농가의 영농을 규모화하고, 시설을 현대화하는데 집중해 왔다. 그러나 “생산성은 향상됐지만, 그것이 농가소득으로 연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정부도 인정했다. 정부 정책대로 농민들은 지난 10여년 동안 너도나도 정책자금을 지원 받아 영농규모를 늘리고, 시설을 현대화하고,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했다. 생산과잉이 되고, 거기다 수입농산물까지 들어와 농산물 값이 X값이 됐다. 생산이 10%만 과잉 되어도 가격은 20~30%나 떨어지는 게 보통인데, 생산이 20%, 30% 과잉되기 일쑤였다. 돈 버는 것은 고사하고, 시설비와 영농비도 못 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가격폭락도 문제지만 요즘은 기상이변이 심해 언제 농사를 망칠지도 모른다. 태풍에, 홍수에, 서리에, 우박에, 저온에, 눈에…. 1년 농사는 물론 전 재산인 기반시설까지 날려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재해보상제도가 있긴 하지만 잃어버린 소득을 보상해주는 것도 아니고, 원상회복할 수 있는 시설비를 다 지원해 주는 것도 아니다. 생계보조와 농사를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종자대 등의 지원에 지나지 않고, 시설은 대부분은 새로 빚을 내서 설치해야 한다. 가격폭락과 기상재해, 병해충의 위험을 무릅쓰며 농사를 짓고, 판매하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다. 뿐만 아니라 비용도 많이 든다. 때맞춰 비료주고, 때맞춰 수확하기 위한 일손 구하는 일이 보통 어렵지 않다. 이런저런 위험과 어려움 다 견디면서 농산물을 시장에 출하하는 경우에도 제값을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거기다 운임과 상차료, 하차료 상장수수료 떼고 나면 남는 게 없는 경우도 있다. 어쩌다 조합을 통해 대형유통업체 등과 거래선을 틀 수 있지만 조건이 까다롭고, 언제 거래가 끊길지 모르는 불안도 있다. 소비자들은 ‘높은’ 가격을 지불하지만 밭떼기판매를 한 농민들은 겨우 본전에 조금 더 얹은 가격에 팔았을 뿐이다. 기상이변 등으로 값이 폭등하면 소비자들은 야단이지만 농민과는 상관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수지 맞추기 어려운 ‘농업 환경’ 아무리 똑똑하고 부지런한 농민이라 할지라도 이런 상태에서 농사를 지어 수지 맞추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위험은 크고, 기대할 수 있는 소득은 적은 상태에서 누구도 빚내서 농자재 구입하고, 구하기 힘든 일꾼 구해가면서 농사를 짓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다 DDA협상이다 FTA협정이다 하면서 지금보다 개방이 훨씬 확대되고, 가격도 더 내려갈 것이라고 하는데, 무슨 기분으로 열심히 농사지을 수 있나? 이미 많은 실패를 하여 융자금은 빚으로 쌓여만 가고, 평생을 갚아도 못다 갚을 부채를 지고 있는 농가가 한 둘이 아닌데…. ○정부 ‘농가 소득보장’ 정책 펴야 여유도 없는 개개 농민들로 하여금 공급이 넘치는 글로벌시장에서 서로 경쟁하면서, 가격폭락의 위험과 비용, 그리고 기상이변의 위험을 고스란히 짊어지게 하면서 농사를 지으라고 할 수 없다. 몇 푼 남지도 않는 농사를 지으라고 할 수 없다. 농민들이 조직화해 판매전문가와 기술자를 영입하고, 출하조절과 수급조정을 하고, 거래교섭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유통과 가공의 부가가치도 소득으로 연결되도록 하고, 수요개발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현실성 있는 보험제와 재해보상대책이 마련돼야 한다. 기본적인 소득 보장을 위한 직접지불제도 실시돼야 한다. 정부정책의 초점은 보통 농민들이 열심히 일하는 만큼 소득이 오르는 체제를 마련하는데 집중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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